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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줍는 아이

10장. 잃어버린 마음의 소리를 노래하는 시인(詩人)

by 진동길

호숫가를 떠난 뒤, 별을 줍는 아이는 한동안 숲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은은히 뒤섞이는 소리는
마치 길동무처럼 아이와 함께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그 작은 멜로디는 때론 바람 소리에 묻히기도 했지만,
아이의 내면 깊은 곳까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밤의 도시, 그리고 시인의 노래

얼마나 더 걸었을까.
숲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도시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세 겹의 돌담과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한 그곳은,
밤이 깊었음에도 여기저기 등불이 켜져 있어
어딘지 아늑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이의 시선이 닿은 곳,
도시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낮은 음률이 있었다.
멜로디라기엔 단정하기 어렵지만,
낯익은 울림에 아이는 호기심이 일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소리를 쫓아가 보니,
낡은 돌바닥 위에 마른 나뭇잎이 수북이 쌓여 있는
작은 광장 한구석에서 시인(詩人)이 앉아 있었다.

시인은 흐릿한 등불 아래에서
조그마한 책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는데,
그는 아이가 다가오는 걸 느끼자
고개를 들어 포근한 눈빛으로 미소를 건넸다.


“안녕, 여행자. 별을 줍는 아이라고 들었어.
네 발걸음 소리가 이상하게도 시(詩)를 닮았더군.”


마음속 비밀을 담은 시(詩)의 힘

아이의 가슴이 미묘하게 떨렸다.
자신의 이야기가 이렇게 ‘시’라는 말과 함께 불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시인은 손에 들고 있던 깃펜을 아래로 내려놓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노래가 멜로디라면,
시는 마음의 소리로 지은 집 같은 거야.
어떤 고통이나 기쁨도, 시가 되어 언어의 집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곤 하지.”


아이는 지난날 ‘진실을 적는 서기’가 건네준 투명한 잉크를 떠올렸다.
그때처럼, 뭔가를 적고 기록한다는 행위가
마음을 들여다 보고 그 소리를 듣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다시금 느꼈다.


마음의 소리를 잃어버린 이유

시인은 아이가 지니고 있는 등잔과 별 조각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은 점점 더 작고 맑은 음을 내고 있었고,
등잔 속 불빛도 그 리듬에 맞춰 흔들렸다.
마치 서로를 깨우고 부르는듯한 모습이었다.


“그 별 조각들, 아직 다 이어지진 않았지만
너를 어디론가 이끄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그런데 왜… 네 마음의 소리는 들리지 않은 걸까?”


아이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정말이지, 자신은 한동안
‘나는 과연 누구인지’라는 질문에만 몰두해 왔다.
그러다 정작 내 안에 있는 마음의 소리를
잃은 듯했다.


“제가… 마음의 소리를 잃은 걸까요?”

아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시인은 잔잔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잃었다기보다 문을 닫아 둔 것에 가깝겠지.
스스로 말하지 않는 진실, 부름 받지 못한 이름,
그리고 잊고 싶었던 기억들이
네 마음속 소리를 막고 있을지도 모르거든.”



마음속 소리를 찾아가는 시(詩)의 언어

시인은 부드러운 손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서 너만의 시를 지어보겠니?
꼭 운율이 맞을 필요도, 아름다운 말이 아니어도 돼.
네 마음의 소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걸 있는 그대로 적어보는 거야.”


아이는 망설였지만,
‘진실을 적는 서기’에게 배웠던 용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침묵을 걷던 순례자의 내면을 지나,
등불지기와 물의 순례자에게서 스스로의 빛과 그림자를 배운 기억들도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았다.

조용히 바닥에 앉은 아이는,
시인이 내민 낡은 종잇조각과 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얼마간의 어지러운 생각들
한 줄, 두 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나를 부를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이 길 위에서 부딪힌 별 조각들이
어느새 내 가슴 한구석에서 희미한 노래를 만든다.
두려움과 설렘, 외로움과 희망이
서로를 껴안으면 그게 바로 나의 소리가 되지 않을까?’

글자가 하나씩 적힐 때마다,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이 기분 좋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아이는 몇 마디 되지 않는 이 문장조차
가슴을 뻥 뚫어주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시(詩)가 여는 문, 그리고 또 다른 걸음

아이가 펜을 놓자, 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이제 네 소리는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어.
시라는 건 거창한 기교가 아니라,
자기 소리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과정이니까.”


주머니 속 별 조각들은,
마치 환희에 찬 듯 더 맑은 소리를 냈다.
하나하나의 파편이 조금씩 이어지고 있다는 실감
아이의 전신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시인은 종이를 살짝 접어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건 네 진심이 담긴 첫 시(詩)야.
언젠가 네가 정말로 자기 이름을 찾을 때,
이것도 작은 증인이 되어줄 거라 믿어.”


아이는 작은 책갈피처럼 접힌 그 종이를
별 조각들과 함께 품에 넣었다.
이제 다시 길을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도시는 여전히 고요했지만,
아이의 마음속 등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언젠가… 제 이름을 부르는 시를 완성해서
다시 인사드릴게요.”

아이의 인사말에 시인은 부드럽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별을 줍는 아이는

잃어버린 마음속 소리를 되찾아가는 길 위에서
시(詩)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났다.
언젠가 이 모든 만남이
“내가 누구인지”를 부르는 완전한 노래가 되리라는 걸
어렴풋이 기대하며,
아이는 또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뒤로, 밤의 광장에 서 있던 시인의 실루엣은
달빛 아래 작은 그림자를 남기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듯
조용히 아이의 등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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