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음이 잠든 시간에
밤이 깊어지면, 마을은 조용해진다.
가게 셔터는 모두 내려가고, 집집마다 불빛이 하나둘 사라진다.
하지만 오두막 앞 흔들의자엔 여전히 은별이와 윤 노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달빛은 오늘따라 유난히 맑았고, 별들은 그 곁을 맴돌 듯 조용히 떠 있었다.
은별이는 아무 말 없이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멈춰 있는 듯해, 윤 노인은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뒤, 은별이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예전에… 엄마랑 같이 별을 보던 밤이 있었어요.”
윤 노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엄마가 좋아했던 별자리가 뭐였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그날 엄마가 웃었던 얼굴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나요.”
말을 멈춘 은별이는 조용히 담요를 끌어안았다.
“근데 그 웃음이… 자꾸 흐릿해지는 것 같아서 무서워요.”
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흔들의자가 아주 살짝, 은별이의 쪽으로 더 다가갔다.
“그래서요… 어제 바람에 보낸 말, 사실은 엄마한테 보내고 싶었던 말이었어요.”
“나는 잊지 않았어.... 그리고 난... 지금도,...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 말이 다시 떠오르자, 은별이의 눈가가 조금 반짝였다.
윤 노인은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은 언젠가 잊는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은별아, 정말 잊는 건 얼굴이나 목소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내 안에서 웃던 장면’을 놓아버릴 때란다.”
은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윤 노인은 이어서 말했다.
“내가 오늘 들려줄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 기억을 잃어버린 아이에 관한 거야.
하지만 그 아이는… ‘그리움’만은 끝까지 잊지 않았단다.”
어느 깊은 숲마을에, 기억을 잃어버린 아이가 살고 있었단다.
그 아이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를 좋아했는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어.
하지만 아이의 가슴속엔 따뜻하고 낯익은 웃음소리 하나가 늘 떠돌고 있었지.
어느 날, 아이는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연못을 찾아갔단다.
그곳엔 ‘잠든 기억을 가만히 일으켜주는 나무’가 서 있었지.
그 나무는 말을 하지 않고, 매일 밤 아이의 꿈에만 나타났단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장면 하나를 보여주었어.
‘따뜻한 손이 아이의 뺨을 쓰다듬고, 조용한 노래가 들리고… 바람은 창가로 들어왔으며, 아이의 손을 꼭 붙잡는….‘
그 장면을 본 아이는 말했단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슬프지 않았어요.”
나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날 밤 아이는 처음으로 편지를 썼어.
그 편지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연못 위를 건너 바람을 타고 사라졌단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숲 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바람결에 실려 온 그 편지를 받고
아주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고 해.
윤 노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은별이는 담요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 아이… 나랑 조금 닮은 것 같아요.”
윤 노인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별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별들이 하나같이 다정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엄마도… 그 편지를 받았을까요?”
윤 노인은 하늘을 함께 바라보며 말했다.
“저 별들 중 하나가, 너의 마음에 불을 켜고 있다면…
엄마는 분명히, 그걸 알고 웃고 있을 거야.”
그날 밤, 은별이는 처음으로 엄마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았다. 소리 내지 않았지만, 바람은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실어 하늘로 띄워주었다.
그리고
'별 하나가 아주 작게 깜빡였다'라고,
윤 노인은 은별이 몰래 혼잣말처럼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