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작은 별들이 지나는 길

3. 바람에게 엽서를 보내는 법

by 진동길
ChatGPT Image 2025년 4월 22일 오후 10_23_58.png


저녁 무렵, 은별이는 도윤이와 함께 부두 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바닷물은 발끝 아래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은별이는 손에 꼭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펴지도 못한 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그 종이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쓰기 위해 꺼낸 것이었지만, 아무 말도 적히지 못한 채였다.


도윤이는 곁눈질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을 떼려다 멈추는 숨결, 종이 위에서 맴도는 손끝. 무언가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그는 오래전부터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거… 편지 쓰는 거야?”

“응… 근데… 잘 모르겠어.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은별이의 목소리는 파도보다 더 작고 조심스러웠다.

도윤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바다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은별아… 네가 정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냥 바람에 띄워보는 건 어때?”


은별이는 도윤이 쪽을 바라보았다. 놀라거나 웃지는 않았지만, 금세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 말이 이상하게, 지금 가장 필요한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날 밤, 바람은 평소보다 조금 더 서늘하게 불었다.
오두막 앞, 윤 노인의 흔들의자는 달빛을 등에 지고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은별이는 담요를 품에 안고 그의 곁에 앉았다.

입을 떼려다 말고, 한참을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떤 하루였니?”


윤 노인의 물음에, 은별이는 조용히 말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요…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계속 들어서요.”

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오늘은 바람에게 마음을 띄운 아이의 이야기를 해줄까?”




말을 실어 보낸 바람의 이야기


아주 먼 바닷가 마을에 하임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단다.
하임은 말수가 적었지만, 마음속엔 늘 전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어.
그중엔 사과하고 싶은 말, 감사하고 싶은 말, 아직도 좋아한다는 말 같은 것들이었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말일수록 더 꺼내기 어려웠어.

그날도 하임은 언덕 끝자락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단다.
그때, 어디선가 낯선 소년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넸지.


“말을 전하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이걸 써봐.

이건 바람을 모으는 종이야. 마음을 담아 적으면, 언젠가 닿게 될 거야.”


소년은 더 말없이 미소만 남긴 채 바람 속으로 사라졌단다.

하임은 그 종이를 꺼내어, 처음으로 가슴속 깊은 말을 적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 말을 너무 늦게 전하게 되어서...”


종이를 반으로 접고, 두 손으로 바람결에 띄워 보냈단다.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그날 밤은 왠지 더 쉽게 잠들 수 있었지.


며칠 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누군가의 미소가 피어났다.
하임의 엽서는 아주 먼 마을, 아주 오래 기다려온 사람의 손에 닿았단다.

짧은 문장 한 줄.
그 한 줄이 오래된 겨울 같은 마음에 봄처럼 스며들었지.


그날 이후, 하임은 마음속 말을 바람에 하나씩 띄워 보내기 시작했어.
그 말들이 어디로 닿을지 몰랐지만,


“닿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떨림이라도 남기면 좋겠어.”


그런 마음이 있었단다.

윤 노인은 이야기를 마치고, 은별이의 손에 작은 봉투를 하나 쥐여주었다.
은별이는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새하얀 종이 한 장과 바람 모양이 그려진 도장이 들어 있었다.


“이건…?”

“마음속 말을 바람에 띄우는 법이란다.

지금 하지 못해도 괜찮아. 언젠가는, 그 말이 닿을 수 있도록.”


은별이는 종이를 무릎에 펴고, 펜을 들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손끝이 종이 위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잊지 않았어.... 그리고 난... 지금도,...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윤 노인은 별빛 아래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별이의 엽서는 아직 날아오르지 않았지만, 그 말은 이미 바람보다 먼저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있었으니까.


그날 밤, 바다는 바람의 노래를 품은 채 부드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래 기다려온 엽서 한 장이 누군가의 마음에 도착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작은 별들이 지나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