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별바람이 건네준 안부
밤바다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출렁이고 있었다.
작은 파도들이 모였다 흩어지며, 은빛 달빛을 따라 조용히 춤을 추었다.
오두막 앞 흔들의자에는 윤 노인과 은별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제보다 바람이 조금 따뜻하게 불었고, 달빛 속에서 은별이의 옅은 미소가 살짝 번졌다.
“할아버지… 엄마 이름을 불러본 뒤로, 가슴 한켠이 이상하게 편안해졌어요.
슬픔이 없는 건 아닌데… 그래도, 조금 덜 무서워요.”
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별이의 손을 살짝 감싸주었다.
“그게 ‘기억’이 우리에게 주는 힘이란다.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아도, 누군가가 다시 불러주면 그 기억은 따스하게 돌아오지.”
은별이는 조심스럽게 담요를 꼭 쥐었다.
오늘은 무언가 더 듣고 싶다는 듯,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 거예요?”
그 물음에 윤 노인은 조금 멀리, 바닷가 수평선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은, 별바람이 건네준 안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까 한다.
아주 먼바다에, 사람들이 한때 ‘별섬’이라고 불렀던 곳이 있었단다.”
그리고 윤 노인은 낮게 웃으며, 아주 오래된 이야기 하나를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주 먼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이 떠 있었어.
바닷길도 험하고 안개가 자주 끼는 탓에 사람들은 그 섬을 좀처럼 찾지 못했지.
하지만 바람만은 달랐어.
바람은 언제나 자유롭게 불어오며, 섬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주곤 했단다.
그 섬에는 해솔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어.
해솔이는 늘 섬 꼭대기에 올라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봤어.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지.
“안녕, 거기 누구 있니?
… 날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어.”
낯선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해솔이의 가슴속에 따뜻함이 번졌단다.
아마도 그 목소리는 “누군가의 안부”였을 거라고, 해솔이는 생각했어.
매일 밤, 섬에 부는 바람이 조금씩 그 목소리를 가져왔어.
그리고 해솔이는 별을 보며 작게 대답했단다.
“나 여기 있어.
너는 어디에 있어도 괜찮아.
내가 네 안부를 기억할게.”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결에 실린 목소리는 점점 맑아졌고,
어느 날 밤에는 마치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어.
“고마워.
네가 내 안부를 물어줘서,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해솔이는 그날 밤, 처음으로 알 수 없는 따뜻한 눈물을 흘렸단다.
그러자 별들이 섬 주위를 한층 더 환하게 비춰주었고,
바람은 해솔이의 마음에 오래 기다렸던 위로를 건네주듯,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흔들어주었어.
그리고 멀리, 다른 어느 항구 마을.
한 아이가 바닷가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을 머금은 채, 입술 사이로 작은 기도가 새어 나왔지.
“나는 잊혔을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아줄까?”
그때, 바람이 은은하게 불어오며 속삭이는 듯했어.
“괜찮아. 누군가 너를 기억하고 있어.”
아이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살짝 누그러지는 걸 느꼈지.
비록 서로 만나지 못했어도, 두 마음은 분명 어디선가 이어져 있었어.
그 다리가 바로, ‘별바람’이 되어 준 것이었단다.
윤 노인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은별이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그 섬에 사는 해솔이처럼, 엄마가 내 안부를 들을 수 있을까요?”
윤 노인은 은별이의 물음에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분명히.
바람은 아주 먼 길도 이어주고,
별빛은 사람들의 마음속 기억을 부드럽게 비춰주거든.
서로가 서로를 잊지 않는 한, 그 안부는 결국 닿고야 말지.”
은별이는 담요를 살짝 끌어안으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용한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마치 작게 작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다녀왔어?’ 하고 묻는 듯한, 아주 다정한 눈빛으로.
“할아버지, 저도 언젠가 해솔이처럼 누군가의 안부가 되어주고 싶어요.”
“너라면 이미 그러고 있을 거다. 도윤이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그리고 엄마에게도.”
윤 노인의 목소리는 바다처럼 깊었고, 달빛처럼 따뜻했다.
그날 밤, 바람은 전날보다 더 부드럽게 불어오며
오두막 지붕과 마당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그 바람은, 은별이 마음에서 흘러나온 안부를 몰래 실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늘 한가운데서 별 하나가 살짝 깜빡였다.
마치 먼바다의 ‘별섬’에서 전해진 희미한 눈인사처럼,
또 누군가의 어두운 하늘에 환하게 작은 등불을 켜주려는 듯했다.
밤은 더욱 깊어갔고, 흔들의자는 평온한 소리를 내며 조금씩 멈춰 섰다.
그 틈에서 은별이는 눈꺼풀이 무겁게 감기는 걸 느꼈다.
마치 마음속 긴장이 스르륵 풀린 듯,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잘 자거라, 은별아.”
윤 노인이 등을 살짝 쓰다듬어주자,
은별이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 별바람도, 엄마도… 나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 노인은 대답 대신, 은별이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파도 소리와 달빛이 그들을 감싸고,
별들은 바람과 함께 은별이의 소중한 마음을 머나먼 곳까지 은은히 옮겨 주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밤의 이야기들이 은별이에게 하나의 ‘안부’처럼 다시 돌아올 것임을,
윤 노인은 조용히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