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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별들이 지나는 길

6. 잃어버린 노래를 부르는 바람

by 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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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달빛이 바다 위를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마당 너머로 번져오면서, 마치 누군가의 낮은 노랫소리 같았다.
오두막 앞 흔들의자에 앉은 윤 노인과 은별이는 오늘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은별이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가 자주 불러주던 자장가가 있었는데, 가사도 멜로디도 거의 다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 노래를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또 슬퍼지기도 해요.”


윤 노인은 그런 은별이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난다는 건, 노래를 전부 외우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 노래가 네 마음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일지도 몰라.”


은별이는 담요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정말 그럴까요? 엄마의 목소리… 더 희미해지면 어떡하죠?”


윤 노인은 바다 건너 달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노래나 목소리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때론 바람처럼 다른 길을 찾아 떠날 뿐이란다.
원한다면, 오늘은 ‘잃어버린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까?”


은별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파도 너머에서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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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바람 속에 잠들어 있던 노래


어느 깊은 바닷가 마을에, 나린이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어.
나린이는 어릴 적부터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를 무척 좋아했지.
그 노랫말은 별빛을 닮은 따뜻함이 있었고,
멜로디는 조용한 바람에 실려 어디까지든 퍼져나갈 것처럼 포근했단다.


하지만 어느 날, 나린이의 엄마가 먼 길을 떠난 뒤로,
나린이는 그 노래를 더 이상 듣지 못했어.
시간이 지날수록 가사도 멜로디도 점점 흐릿해졌고,
결국 노래를 잊어버렸다는 생각에 매일 밤 슬퍼했지.


어느 저녁, 나린이는 해변가에 홀로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어.
바람이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여태껏 엄마가 불러주던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
그러다 문득, 누군가 낮게 부르는 음성이 파도 위로 번지는 듯 느껴졌단다.


“음—, 음—”
낮은 허밍 소리였지만, 이상하게 나린이의 가슴 깊은 곳이 따뜻해졌어.
그 목소리를 따라 해변을 걷던 나린이는,
조그만 바위 틈 사이에서 낡은 조개피리를 발견했단다.
피리엔 별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이 맴돌았어.


나린이는 호기심에 피리를 불어보았어.
그러자 바람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주변을 맴돌더니,
아주 짧고 낮은 멜로디를 실어 와 줬단다.
그 소리는 어쩐지 엄마의 자장가를 닮아 있었어.


“잃어버린 노래는 어디로 갔을까?”
나린이가 속삭이자,
바람은 나린이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어.
“사라진 게 아니라, 네 마음속에서 길을 잃었을 뿐이란다.
불어오는 바람에 귀 기울여 봐.
네가 간절히 원하면, 그 노래는 다시 떠오를 거야.”


그날 밤, 나린이는 바람결에 실려 오는
작고 부드러운 멜로디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어.
피리를 불며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니,
잊어버렸던 엄마의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지만 한 구절씩 떠올랐지.


“라… 라…”
짧은 소절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환해지는 걸 느꼈어.
바람은 나린이 곁에서 작게 회오리를 일으키다,
밤하늘로 다정하게 퍼져나갔단다.


그리고 며칠 뒤, 나린이는 그 노래를 절반 정도는 되찾을 수 있었어.
엄마의 숨결처럼 따뜻한 멜로디.
비록 완전한 가사는 아니지만, 노래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지.
그 소리는 바다를 건너 먼 곳까지 퍼져갔고,
누군가의 마음속 별빛을 살며시 일깨워 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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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노인은 이야기를 마치고, 담요 안에 몸을 웅크린 은별이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비치는 은별이의 두 눈엔 희미한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어딘가 편안한 그리움이 피어난 것 같은 빛이었다.


“정말… 노래가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있다면,
언젠가 다시 떠오를 수 있겠죠?”
은별이가 조용히 물었다.


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그리고 그 노래는 네가 바라듯,
엄마의 목소리로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거야.
설령 지금은 전부 떠오르지 않아도,
바람이 분다면 조금씩 이어 붙일 수 있단다.”


은별이는 어젯밤 적어둔 바람 엽서를 떠올렸다.
거기 적힌 말들과 함께 엄마가 불러주던 멜로디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흥얼거려 보고 싶어졌다.


“할아버지, 내일도 바닷가에 가서 조개피리를 찾아볼래요.
정말로 있다면, 저도 그 피리에 노래를 담아보고 싶어요.”


윤 노인은 미소 지으며 흔들의자를 살짝 흔들었다.
달빛이 파도에 부딪혀 은빛으로 부서지는 소리가,
마치 잃어버린 노래의 전주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은별이는 엄마의 자장가 중 딱 한 마디만 기억해 내도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자장가의 기억이 조금씩 맺혀갈 때,
바람은 부드럽게 은별이의 목소리를 품어 밤하늘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바다는 숨죽인 듯 고요했지만,
사실 그 물결 아래와 하늘 위에선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언젠가 은별이의 목소리가 다시 맑게 퍼질 순간을 기다리며,
잃어버린 노래도 새벽하늘 한편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고,
달빛과 바람은 곁에서 은별이의 마음을 다정하게 지켜주었다.
언젠가 이 노래가 완성될 날을 기다리듯,
별빛도 깜빡이며 밤하늘에서 작은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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