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작은 별들이 지나는 길

12. 바람이 데려온 약속

by 진동길
ChatGPT Image 2025년 4월 24일 오후 11_12_39.png


언제부턴가 해 질 녘마다 파도가 한결 세차게 부딪치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늘은 저녁 내내 파도 소리가 조금 더 굵직하게 울렸다.
언뜻 보면 고요해 보이던 밤바다도, 가까이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파도들이 서로 부딪히는 리듬이 조금씩 달라져 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두막 마당에서 윤 노인은 오늘도 은별이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해가 진 뒤엔 바람이 다시 선선해졌고, 그 바람은 어제보다 조금 더 거칠게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은별이는 어젯밤에 들었던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윤이에게 살짝 얘기를 꺼내볼까 하다가도, 아직은 스스로 곱씹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할아버지, 어제 말했던 그… 엄마랑 아빠가 이 마을로 갑자기 오게 된 계기, 오늘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은별이 스스로도 이 이야기를 더 듣고 나면,
이제껏 외면했던 감정들이 또 한 번 마음을 흔들어 놓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윤 노인은 파도 소리를 잠시 음미하듯 듣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ChatGPT Image 2025년 4월 24일 오후 11_15_31.png


바다와 노래가 이어준 두 사람


서린과 이준이 젊은 시절 함께 지냈던 그 섬마을은,
겉보기엔 그리 넉넉하지 못했어.
바닷일은 언제나 변수가 많았고, 날이 좋지 않으면 며칠씩 조업을 못하는 일도 흔했지.
하지만 서린과 이준은 여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 주며 살았다.

서린은 여전히 음악을 사랑했고, 노래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어 했어.

이준은 바다에서 얻은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늘 새벽같이 일어나 파도와 대화하는 걸 좋아했지.


마을 사람들은 둘을 보며 “노래하는 소녀와 바다의 청년”이라고 불렀단다.
둘은 그런 별명이 쑥스럽면서도 마을에 조금이라도 밝은 기운을 줄 수 있다면 기쁘다고 말했다고 해.


그러던 어느 날, 이준에게 조금 더 먼바다로 나가 보는 기회가 찾아왔다.
원양어선까지는 아니지만, 기존에 다니던 어선보다 큰 배를 탈 수 있는 일이 생긴 거야.
“더 큰 배에서 일하면 돈도 좀 더 벌고, 아마 지경을 넓힐 수 있을 거야.”
이준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서린을 두고 떠나기 망설여졌다.
“바다에서 오래 머물게 될 텐데, 네 노래를 못 들으면 어떡하지?” 하고 농담 섞인 걱정을 했다고 한다.


서린은 이준에게 작은 인형 하나를 건네주며, 노랫말이 적힌 조각 종이를 함께 줬어.
“배가 멀리 나가면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겠지만,
이걸 보면 내가 계속 노래하고 있다고 생각해 줘.
나도 매일 바닷가에 서서, 네가 무사히 돌아오길 노래 부를 테니까.”


이런 식으로 서로를 응원하던 두 사람에게,
시간은 꿈결처럼 지나갔다.
정말 며칠씩 연락이 끊기기도 했고,
다시 돌아온 이준이 파도에 부딪혀 상처를 입고 오기도 했지만,
서린은 그를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고 해.


마치 두 사람 사이를 바다가 갈라놓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바다가 그들의 마음을 더욱 단단히 이어 주는 다리처럼 작용한 거지.


ChatGPT Image 2025년 4월 24일 오후 11_17_25.png


갑작스러운 변화, 바람이 데려온 소식


하지만 어느 해 봄, 갑자기 서린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졌어.
자세한 내막은 할아버지가 말을 아끼듯 했지만,
서린이 예전처럼 노래를 부르기 어려워질 정도로 기력이 쇠했다는 거야.


“네 엄마는 원래부터 몸이 아주 약했단다.
거기다 바닷바람도 세고, 오랜 생활 고된 일을 함께하다 보니 그런 거겠지.”
윤 노인은 은별이를 슬쩍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즈음 이준이도 바다 일로 좀 지쳐 있었고,
결국 ‘좀 더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거야.”


그때 마침, 너의 아빠 쪽 친척이 이 마을에 살고 있었어.
내가 그분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우연히 여러 인연으로 얽혀서
네 부모님이 이 마을로 와 볼 생각을 하게 되었지.
결국, 의지할 곳도 있고, 조용한 환경에서 요양도 할 겸,
두 사람이 이 오두막에서 지내게 되었단다.


“그럼, 제가 태어날 무렵쯤에 이 마을로 온 거예요?”
은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물었다.
지금 막연히 듣고 있는 이야기가,
곧 자기 자신의 탄생 이야기와도 맞물린다는 걸 몸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 노인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가 태어날 무렵, 엄마는 몸이 안 좋았지만 네 아빠와 함께 최선을 다해 너를 맞이할 준비를 했어.
이 오두막에서 너의 울음소리가 처음 울려 퍼졌을 때,
두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을 받은 기분이라 했단다.”


ChatGPT Image 2025년 4월 24일 오후 11_21_57.png


은별이의 마음이 물결치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은별이는 눈가가 살짝 뜨거워졌다.
지금껏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과거와 현재가 바다처럼 밀려와 서로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엄마가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바다를 좋아했을 줄은 몰랐어.”

“아빠도 어디선가 바다를 보고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물결처럼 마음속을 맴돌았다.
윤 노인은 가만히 은별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로 해 두자.
너무 마음이 급하면,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칠 수도 있단다.
네가 궁금해하는 걸 하나씩 묻고, 또 차근차근 들을 수 있도록 시간을 두렴.”


은별이는 담요 속으로 한껏 몸을 파묻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은 궁금한 것도 많고, 심장이 쿵쾅대지만,
할아버지 말대로 모든 걸 한 번에 몰아 들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도…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요?”
“그럼. 할아버지가 답해 줄 수 있으면 하마.”


은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사진 속 엄마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물었다.
“엄마가… 이 마을에 와서도, 아빠를 위해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나요?
몸이 안 좋았다면서도, 혹시… 그때도 바다를 보며 노래를 만들고 불렀나 해서.”


윤 노인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있었단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인진 지금 당장 말해주기 어렵지만…
네 엄마가 남긴 마지막 노래가 사실 여기 마을에서 완성된 거야.
바다와 아빠, 그리고 너를 위해 부른 노래였지.”


그 말에 은별이는 살짝 놀라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언젠가는 그 노래를 꼭 듣고 싶어요.”
윤 노인은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ChatGPT Image 2025년 4월 24일 오후 11_26_45.png


달빛은 서서히 바닷가 너머로 기울어가고,
한때 거칠게 울리던 파도 소리도 다시 온화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은별이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 조개피리 곁에 사진을 놓아두었다.
오늘 듣게 된 부모님의 이야기가 마치 바람결에 실려,
사진 속 장면이 한층 더 생생해진 것 같았다.


“엄마, 아빠…
끝내 못다 한 노래가 여기에 남아 있었나 봐요.
그 노래를 듣게 된다면,
정말로 당신들의 목소리가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겠어요.”


윤 노인은 흔들의자에서 살짝 몸을 일으켜,
오두막 지붕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달이 지고 나면 곧 새벽이 올 테고,
새벽바람은 늘 새로운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아마 은별이가 그 노래를 마주할 순간도
언젠간 오롯이 이 바닷바람 속에서 찾아올 것이리라.


그렇게 밤은 잔잔한 설렘과 함께 저물어 갔다.
그리고, 파도 소리는 여전히 바위에 부딪히며
어딘가로 먼 길을 떠나는 조수(潮水)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작은 별들이 지나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