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엄마가 남긴 노랫말
밤공기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바다를 타고 흘러왔다.
별빛이 총총히 뜬 하늘 아래, 은별이는 오두막 앞에 서서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개피리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오늘은 굳이 불지 않고 가만히 쥐고만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당을 감도는 달빛과 파도 소리가,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낯선 긴장감을 함께 데려온 듯했다.
“은별아, 무슨 생각이니?”
윤 노인은 흔들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은별이 옆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은별이는 담요자락을 꼭 쥐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가… 여기에 와서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고 했잖아요.
그 노래가 정말로 남아 있다면, 어떤 노래일지 궁금해서요.”
윤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바닷바람이 어깨를 살짝 흔드는 동안,
오두막 처마 밑 고즈넉이 매달린 조롱박 풍경이 은은한 소리를 냈다.
“마지막 노래… 확실한 건 아니지만, 네 엄마가 짧은 노랫말을 남겼다고 들었단다.
아마도 아빠와 너를 위해 지은 가사였겠지.”
윤 노인은 바다를 향해 시선을 둔 채, 아주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낮게 입을 열었다.
은별이가 태어나기 얼마 전,
서린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여전히 작은 수첩을 곁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 수첩에는 그녀가 흥얼거리던 멜로디 조각들이 여기저기 적혀 있었는데,
때론 아빠(이준)가 바다에 나간 새벽에 부스스 일어나 짧은 글귀를 더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노래가 완성되면, 다시 한번 바다 앞에서 부르고 싶어.”
서린이 그렇게 말하곤 했다는 걸, 윤 노인은 아빠(이준)에게서 전해 들었다.
그 수첩은 결국, 서린이 세상을 떠난 뒤 아빠 손에 남겨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마을을 떠나며 그 수첩을 어디론가 가져갔다는 소문이 돌았단다.
아빠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노랫말이 정말 세상에 남아 있는 건지, 아니면 사라졌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네가 찾으려 해도, 당장은 그 노랫말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을 거야.”
윤 노인은 은별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란다.
네 엄마가 수첩 말고도, 또 다른 방식으로 그 노래를 남겼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또 다른 방식… 무언가 기록물을 만들었을 수도 있단 말인가요?”
은별이가 궁금함에 조심스레 물었다.
“응. 아빠가 선물해 준 낡은 카세트 녹음기를 서린이 곁에 두었다고 했어.
정말 마지막까지 노래를 남기려 했었다면,
거기에 직접 목소리를 담아 두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니?”
그 말에 은별이는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엄마의 목소리… 직접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니.’
하지만 곧 스스로 침착함을 찾으려 애썼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카세트라면, 아빠가 가져간 걸까?
아니면 이 오두막 어딘가에 있을까?’
윤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진 말렴.
언젠가 네가 더 준비가 되었을 때,
그 카세트건 수첩이건 무엇이든 네게 나타날 수도 있지 않겠니?”
은별이는 오두막 마루에 조심스레 앉았다.
가슴 한구석이 두근거리면서도,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걸 알았다.
그 녹음기가 설령 남아 있더라도,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으니까.
“그래도… 이제 저는 좀 더 알아보고 싶어요.”
은별이가 희미하게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엄마가 어떤 노래를 불렀고, 아빠는 왜 떠났는지…
그리고 그 노래가 정말 남아 있다면, 그걸 꼭 들어보고 싶어요.”
윤 노인은 흔들의자를 살짝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이 자라나면, 언젠가는 길이 보일 거야.
바다는 언제나 사람들을 이어 주고, 노래는 그 바다의 숨결을 담기도 하거든.”
달빛이 점점 더 환해지면서, 마당과 오두막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파도 소리는 부드러워졌지만, 은별이의 가슴속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때, 바람이 살짝 세차게 불며 마당 한구석에 있던 작은 종이쪽지를 날려 보냈다.
은별이가 얼른 손을 뻗어 잡아 보니,
“나는 잊지 않았어. …그리고 난… 지금도, …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라고 적힌, 오래된 바람 엽서였다.
아주 옛날, 엄마에게 쓰려던 그 말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은별이는 엽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하기 힘들었던 때에 적었던 말인데,
이제는 조금 더 그 목소리에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언젠간 이 마음이 바람 타고 엄마에게, 혹은 아빠에게 닿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날 밤, 은별이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방 안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
불현듯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혹시 엄마가 남긴 마지막 노래를 이미 내가 꿈속에서 들어 본 적이 있는 걸까?’
아직은 모든 게 불투명하고 어쩌면 절망적이기도 했지만,
알 수 없는 희망이 마음 한편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엄마, 정말로 목소리를 남겨 주셨나요?
아직 답을 할 순 없지만… 저, 포기하지 않을래요.”
은별이는 조개피리를 꺼내 들어 작게 훅 불어 보았다.
고요 속에서 울려 퍼지는 바람 소리는,
아직 멜로디가 완성되지 않았지만 왠지 힘이 실려 있는 듯 느껴졌다.
창밖에선 별 하나가 서서히 지평선 근처로 떠밀려 내려가고,
달은 마치 누군가의 마음을 비춰주듯 조용히 오두막 지붕 위에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바다는 노래를 품고 노래는 바다를 잇는다.
그 큰 흐름 속에서 은별이도 서서히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려 하고 있었다.
전보다 더 많은 기대와 용기를 품고
아직 찾지 못한 노랫말과 혹은 엄마의 목소리가 담겼을지 모를 녹음기를 떠올리며,
은별이는 “이제 내가 할 일”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내일 아침에 다시 바닷가에 나가면,
바람은 또 다른 실마리를 전해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은별이는 알고 있었다.
바다와 노래가 이어주는 다리는 어디에나 숨어 있고,
그 마음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찾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렇게, 파란 밤이 파도 소리에 실려 조용히 흘러갔다.
창밖 갈매기 소리가 잠잠해질 무렵,
오두막 안은 한낮의 더위를 잊은 듯 서늘하고 평온한 공기로 채워졌다.
그리고 은별이의 꿈결 속 어딘가에선,
한때 엄마가 흥얼거리던 자장가의 희미한 음정이 다시금 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