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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별들이 지나는 길

14. 수국처럼 맑게 핀, 어느 봄과 여름 사잇길에서

by 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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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마을 골목 곳곳에는 파랗고 분홍빛 수국이 활짝 피어,
한창 초여름으로 접어들기 전의 산뜻한 열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오두막 앞에서 은별이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바람이 한층 부드러워진 덕분인지, 마당 한편에 놓인 수국 화분도 탐스럽게 핀 꽃들을 살랑이며 흔들었다.
창가에 매달린 조롱박 풍경은 바람결에 따라 맑은 소리를 냈다.


“은별아, 도시락 깜빡하지 말고 챙겨 가거라!”
윤 노인이 문간에서 건네주는 도시락통을 받아 들며, 은별이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네, 할아버지. 오늘은 체육도 있고 방과 후에 합창 연습도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아요.”


가방끈을 단단히 맨 은별이는 수국이 줄지어 피어 있는 골목을 지나, 부둣가 길로 걸음을 옮겼다.
학교는 마을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있어서,
보통 부둣가를 따라가다 삼거리에서 도윤이와 만나곤 한다.
아직 해가 높지 않은 덕에 수국 향이 깃든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와,
‘오늘 같은 아침이라면 등굣길도 참 상쾌하네.’ 하고 은별이는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또 어떤 일이 펼쳐질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엄마의 노래’가 떠나지 않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낮 시간만큼은 복잡한 감정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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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만난 따뜻한 풍경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도윤이와 몇몇 친구들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은별아, 어제도 할아버지랑 밤늦게까지 이야기했어?”
도윤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음… 조금만 했어. 요즘 피곤해서 일찍 잤거든.”


밤마다 이어지는 ‘엄마 노래’ 이야기를 깊이 꺼내기에는 아직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복잡한 속내보다는, 그냥 평범한 일상 속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하고 싶었다.


1교시가 시작되자,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자, 오늘 체육 시간엔 바닷가 산책로를 걷는 운동을 해볼 거예요.
날씨가 조금 덥긴 해도 바닷바람이 시원하니, 다들 모자랑 물은 잘 챙겼죠?”


아이들은 느닷없는 야외 수업 소식에 환호했다.
창밖으로는 봄꽃이 지고 초여름 분위기가 더해지는 사이,
수국은 절정으로 한껏 치닫고 있었다.
은별이는 문득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 엄마가 특히 좋아했던 곳인데, 이 계절에도 여전히 예쁜 색을 띠겠지?’
그 생각에, 괜히 가슴이 살짝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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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산책 수업


3교시가 되자, 선생님을 따라나선 아이들은 학교 뒤편 길로 줄 맞춰 걸어갔다.
언덕을 내려서면 해안선이 펼쳐지는데,
길섶에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감이 가득했다.
집집마다 심어놓은 수국들이 파스텔 톤으로 화사하게 피어, ‘수국 길’을 만들어 놓은 풍경도 보였다.


“하하! 바닷바람, 진짜 시원하다!”
아이들은 이내 떠들썩해졌다.
밟는 곳마다 작은 게가 기어 다니거나, 파도에 밀려온 조개껍데기가 굴러다녔기 때문이다.


도윤이는 그 모습을 보며 은별에게 살짝 속삭였다.
“어느새 초여름이네. 겨울부터 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어.”
“응, 벌써 이렇게 선선해지다니… 올해는 꽃도 일찍 피고, 수국도 유난히 많은 것 같아.”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은별은 생각했다.
‘내 마음도 수국처럼 어느 순간 활짝 피어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엄마 노래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나아질까?’


선생님은 걸음을 멈추고, 바닷가 생태나 안전 수칙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봄과 여름 사이 바다는 어종이 변하고,
해수욕 준비나 어민들의 조업 준비도 활발해지는 시기죠.
여러분도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 흐름 속에서 조금씩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체육복 차림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국길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향과,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도윤이와 은별이는 눈을 마주치며 쓱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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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연습


점심시간이 되자, 한껏 들뜬 분위기로 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복도나 운동장으로 흩어졌다.


복도 창가에 서 있던 은별이에게, 다른 반 친구 지연이가 다가왔다.
“은별아, 요즘은 노래 연습 안 해? 전에 합창 대회에서 솔로 맡았다고 들었는데.”


그 말에, 은별이 가슴이 살짝 저려 왔다.
엄마 생각이 함께 겹쳐졌기 때문이다.
“아… 체육부 활동이랑 겹쳐서 아직 확실히 결정을 못 했어.”
지연이는 “아쉽네. 너 노래 잘하잖아.” 하며 환하게 웃고 돌아갔다.


잠깐 스치는 말이었지만, 은별이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엄마처럼 나도 노래를 참 좋아했는데… 이젠 왜 이렇게 망설여질까?’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작은 불씨처럼 희미한 열정이 살아 있었다.
‘그래, 그래도 나는 아직 노래를 버린 게 아니야. 언젠가 다시 제대로 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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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그리고 작은 결심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각자 동아리나 체육부, 학원으로 흩어졌다.
은별은 교실 책상을 정리하다 말고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해가 기울어가는 오후의 바다는 부드럽고 고요해 보였다.
멀리 부둣가 근처에도 수국 군락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햇살에 비친 색감이 더욱더 선명하게 반짝였다.


‘수국이 가득 핀 길처럼, 내 마음도 언젠가 활짝 피어나겠지.’
최근 계속되는 ‘엄마의 노래’에 대한 생각과,
무언가 큰 변화가 올 것만 같은 예감이 은별이의 가슴을 잔잔히 울렸다.


가방을 챙겨 교실 문을 나서려 할 무렵, 옆 반 아이가 다가와 부러운 듯 말했다.
“너 바닷가 근처 사니까 좋겠다! 수국도, 바다도 바로 앞에 있고.”
은별은 웃으며 답했다.
“응, 밤마다 파도 소리 들으면서 잠들 수 있거든. 나중에 한 번 놀러 와.”

은별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요 며칠 새 도무지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의 변화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감출 수 없는 것은 바다와 노래,

그리고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


‘엄마가 좋아하던 멜로디를 내 목소리로 부를 날이 오겠지.

계절이 바뀌고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내 마음도 천천히 자라날 거야.’ 은별이는 스스로 그렇게 다짐한다.

수국이 만개한 길. 진심과 사랑이 재잘거리는 어느 봄과 여름 사잇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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