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여름으로 가는 숲길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날씨인데도
바닷바람은 여전히 선선하다.
은별이는 오두막 마당에 나와 부둣가 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소금기를 머금어 코끝을 시원하게 식혀 준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울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엄마가 노래와 녹음기를 남겼을까?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러쿵저러쿵 상상하다 보면, 마음이 두근대면서
마치 다른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윤 노인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은별아, 우리 산책 갈까?”
할아버지의 제안에 은별이는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두막 뒤편에는 울창한 숲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길이 있었다.
바닷가 마을이지만, 뒤쪽으로는 푸른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윤 노인은 오래전부터 그곳을 산책 코스로 즐겨 찾곤 했다.
“숲이 꽤 울창해졌어요, 할아버지.”
은별이는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기며 마치 처음 보는 풍경인양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초록 잎과, 길섶에 고개를 내민 작은 들꽃들이
‘빨간 머리 앤’이 뛰어들어 풍경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할 만큼 싱그럽게 보였다.
‘지금 이 순간이 참 좋다.’ 은별이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만약 네가 이 길에 이름을 붙인다면 뭐라고 할래?”
윤 노인이 물었다.
은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음… 초록 안개길?” 하고 조그맣게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냥 ‘오두막 숲길’로 부르지만,
오늘따라 햇살 사이로 비치는 빛이 은은한 안개처럼 보여 그런 이름이 떠올랐다.
“허허허. 그래. 좋구나. 초록 안개길. 빨간 머리 앤도 주변 풍경에 특별한 이름 붙이길 좋아했다더구나.”
윤 노인은 미소 지으며, 언덕 너머로 살짝 보이는 작은 물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둘이 걸음을 옮기자, 바위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오는 작은 개울이 나타났다.
물소리는 조용한 숲에서 한층 두드러져, 묘한 청량감을 전해 주었다.
개울 가장자리에선 발목 정도를 담글 수 있을 만큼 수심이 얕았다.
“여긴 이름이 뭐예요?”
은별이가 묻자, 윤 노인은 “글쎄, 보통은 ‘물도랑’이라 부르는데...” 하고 웃었다.
“그럼 우리 식으로 새 이름을 붙여볼까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제안하는 은별이를 보고, 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투명 바다로 이어지는 소리' 같은 건 어떠니?
여기 물이 개울을 따라 흘러 내려가면 결국 바다로 이어진다고 하더구나.”
“와, 뭔가 길긴 하지만 근사해요!”
은별이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이 물이 바다까지 흘러가며 노래를 만드는 느낌이랄까…
마치 앤이 풍경에 상상을 덧입히는 것처럼, 나도 그 마음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참 동안 개울가에서 발을 담그고, 물속에 비친 그림자를 유심히 살피던 두 사람은
물가 옆 낡은 통나무에 나란히 앉았다.
“은별아, 요즘 엄마가 남긴 노랫말이나 녹음기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것 같더라.”
윤 노인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정말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을지 궁금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하겠지?”
은별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말씀대로 엄마가 뭔가 남긴 건 확실한데,
막상 그걸 직접 확인할 준비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가만히 있자니 또 초조하고…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만 같고요.”
마치 분위기가 가라앉는 듯하자, 은별이는 발로 물장구를 살짝 쳤다.
맑은 물 위로 잔잔한 파문이 원을 그리며 번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 노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사람 마음도 물결 같아서 언젠간 잦아들지만,
한순간 파문이 일면 움직이고 싶어 지잖니.
그렇다고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단다.
네 엄마와 아빠가 걸었던 길을 너도 천천히 걸어 보면 되겠지.”
그러다 윤 노인은 은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
“빨간 머리 앤 같았으면 ‘내가 원하는 답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거야!’ 하고
멋지게 몸을 휙 돌려 외쳤을지도 모르지 않니?”
은별이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앤이라면, 어디 이름 모를 곳으로 모험을 떠나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발견을 할 거예요!’라며 활기차게 선언했을 것만 같았다.
“당장은 그렇게 못하더라도, 조금씩 답을 찾아 가 보고 싶어요.
엄마의 노래도, 아빠의 마음도… 꼭 알고 싶거든요.”
결심하듯 말하는 은별이를 보며, 윤 노인은 ‘그래, 이미 너는 잘 가고 있어’라고 말하듯
믿음 어린 눈빛으로 응원해 주었다.
개울가를 뒤로하고, 둘은 ‘초록 안개길’이라 부르기로 한 숲길을 통해 오두막 쪽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나오는 길목에는 해 질 무렵이면 반딧불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전해져,
은별이는 다음엔 꼭 이곳에 해 질 녘을 보러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할아버지, 오늘 산책 정말 고마웠어요.
이 길에 이름 붙이고, 이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은별이가 말하자, 윤 노인은 “나야말로 고맙지. 덕분에 오늘 풍경이 훨씬 특별해졌어.”라며 웃었다.
오후가 깊어가며 바닷가 마을은 다시 잔잔한 저녁 공기에 잠겼다.
오두막에 도착한 은별이는 시원한 물 한 잔으로 갈증을 달래며,
아직 남아 있는 햇살을 창가로 느꼈다.
‘언젠가 엄마가 남긴 노래를 듣게 된다면, 오늘처럼 숲길과 개울을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몰라.’
빨간 머리 앤이 사랑한 자연 풍경이 결국 그녀를 표현해 준 무대가 되었듯이,
이 작은 산책로와 개울의 추억도 언젠가는 엄마의 노래와 맞닿게 될 것만 같았다.
마치 마음속 상상과 현실이 조금씩 이어지는 듯한 기분에,
은별이는 마음은 한층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