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장마와 파전
한여름 장마가 이어지고, 바닷가 마을에도 온종일 비가 내렸다.
오두막 지붕 위로 빗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구름에 가려진 하늘은 종일 흐린 빛을 띠었다.
짙은 안개가 마을 골목마다 스며들어, 바다를 향해 난 길도 축축한 기운이 가득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숨까지 눅눅해지는 기분이네.”
윤 노인이 현관문을 살짝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밖은 툭하면 퍼붓는 소나기에, 어느새 마당 한쪽엔 웅덩이가 생겨났다.
은별이는 창가에 기대어 빗줄기가 내리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이 비에 잠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자, 바람에 흔들리는 수국들이 비중에 이리저리 휘어지고 있었다.
쏴아— 하는 빗소리가 한창일 때, 대문 밖에서 누군가가 “은별아!” 하고 불렀다.
은별이가 나가 보니, 도윤이가 우산을 쓰고 영차영차 달려온 참이었다.
“다 젖었잖아!” 은별이가 놀라며 맞이하자,
도윤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어차피 장마 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비를 맞아 보겠어?”
두 사람은 오두막 마루에 걸터앉아, 젖은 옷을 털며 한숨을 돌렸다.
윤 노인은 수건을 건네주며, “얼른 갈아입을 옷이라도 좀 가져올 걸 그랬지.” 하고 혀를 찼다.
“근데, 갑자기 왜 왔어? 비도 이렇게 많이 오는데.”
은별이가 묻자, 도윤이는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대답했다.
“너랑 장마 소나기 구경하려고. 집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보단, 같이 얘기하면서 비를 보는 게 훨씬 재밌잖아.”
비가 쉬이 그칠 기색이 없다. 세 사람은 오두막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윤 노인은 커다란 주전자에 물을 끓여 따뜻한 보리차를 내왔고,
은별이는 “장마 때엔 파전이 제격이라는데…” 하며 농담을 건넸다.
“아, 파전 좋지!”
도윤이가 동그랗게 눈을 빛내자, 윤 노인은 피식 웃었다.
“마침 재료도 있으니, 한번 만들어 볼까. 빗소리를 들으며 먹으면 운치 있지.”
그래서 마룻바닥 근처 작은 부엌에서 세 사람은 부침가루와 야채들을 준비했다.
도윤이는 부침 반죽을 섞으며 “이렇게 비 오는 날엔, 우리 엄마도 가끔 파전을 부쳐줬어.” 하고 떠올렸다.
은별이는 도마에 대파를 손질하며, 뜨거운 철판 위로 반죽이 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기름에 지글지글 튀겨지는 냄새가 정말 좋다… 비 오는 날만의 특권이네.’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두툼한 파전이 완성되자, 셋은 오두막 앞 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둘러앉았다.
바깥엔 여전히 비가 내려 우산을 받쳐도 속수무책으로 젖을 것 같았지만,
마루 위로 들어오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윤 노인은 차를 따라 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장마가 길어지면 농사짓는 분들은 힘들겠지만,
또 이 빗소리에 위로받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나도 젊었을 땐 비 내리는 날이면 마음이 꽤 차분해지곤 했지.”
도윤이는 바닷가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해안선이 잘 안 보이네. 이 정도 비면, 파도도 거칠어지려나?” 하고 중얼거렸다.
은별이는 마당에 고인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비구름 너머에 여전히 하늘이 있고, 그 하늘 아래 바다가 이어지듯…
내 마음속 복잡한 생각들도 언젠간 맑게 걷히겠지.’ 하고 생각했다.
한참 퍼붓던 비가 잠시 멈추자, 은별이와 도윤이는 기다렸다는 듯 우산을 챙겼다.
“이때다! 바닷가에 가서 파도라도 구경할까?”
도윤이가 활기차게 외치자, 윤 노인은 “조심해서 다녀오렴.” 하고 손을 흔들었다.
부둣가로 가는 길목에는 빗물에 잠긴 자잘한 돌들이 번들거렸고,
수국들은 잎마다 물방울을 한가득 머금은 채 축 처져 있었다.
어디는 작은 계곡처럼 도랑을 이루어 물이 흐르고,
어디는 진흙탕이 되어 발이 푹푹 빠지기도 했다.
“장화 신고 올 걸 그랬나 봐!”
은별이가 투덜대듯 말하자, 도윤이가 자기 장화를 벗어 건네주었다.
“바꿔 신자. 난 좀 젖어도 괜찮아. 남자니까.”
은별이는 멋쩍게 웃는 도윤이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부둣가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여전히 무거운 구름을 머금고 있었지만
비가 멈춘 덕에 바다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닷물은 잿빛으로 어두워 보였고, 파도는 평소보다 훨씬 거세게 밀려왔다.
“우와, 파도가 엄청 세!”
도윤이가 감탄하자, 은별이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거센 물보라 사이로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은별이는 문득 ‘엄마랑 아빠도 둘이 이렇게 폭풍우 뒤의 바다를 지켜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마음 한구석에서 묘하게 보고 싶은 그리움이 일렁이자,
은별이는 도윤이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작게 숨을 고르며
검푸르게 물결치는 바다 너머 점점 커지는 파란 하늘께로 눈길을 돌렸다.
소나기가 멈춘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 사이로 살짝 파란 하늘이 비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퍼붓던 장대비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부둣가 주변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여기저기 생겼다.
“해가 조금씩 나오려나 봐.”
도윤이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은별이는, 오두막 마당에 두고 온 파전 생각이 다시 떠올라, 피식 혼자 웃음을 지었다.
장마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반짝 맑게 개인 순간에 친구와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것은,
장마 때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다.
두 아이가 오두막으로 돌아오자,
윤 노인은 그사이 마당의 물을 빗자루로 쓸어내고 있었다.
“소나기가 멈추니 이젠 좀 살 만하군.” 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은별이는 도윤이와 장마 사이 잠시 찾아온 맑은 바다 풍경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파도가 엄청 높았어요! 근데 또 맑은 하늘이 살짝 보여서 신기했죠.”
그러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다시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이쿠, 또 오네!” 도윤이가 우산을 펴며 투덜댔지만,
사실 두 사람 다 알았다.
언젠가는 함께한 이 시간이 소중하게 기억될 것이고 그리워질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