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작은 별들이 지나는 길

17. 그 해 여름

by 진동길


ChatGPT Image 2025년 4월 26일 오전 12_21_48.png


장마가 끝나고 맑은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는 어느 날 아침.
집 앞 마당의 돌틈 사이로 물기 머금은 잡초가 푸릇하게 솟아나 있고,
오두막 지붕 위로는 고양이 한 마리가 졸린 눈을 비비며 지나간다.


은별이는 가벼운 짐을 챙기고 있었다. 바닷가 마을을 떠나,
산속 친인척 댁에서 며칠간 머물러보자는 할아버지의 제안 때문이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도윤이는 당장 “같이 가자!”며 들떴고,
“바다만 보던 우리에게, 산이 주는 또 다른 여름 풍경도 재밌을 거야!” 하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뙤약볕 아래에서 할아버지가 미니버스 시간표를 확인하자,
은별이는 파도 소리를 눈에 익힌 채 천천히 오두막 문을 닫았다.
‘과연 산골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거기도 이렇게 햇볕이 뜨거울까?’
차창 밖 구름 속에 온갖 상상을 품으며, 두 아이와 할아버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ChatGPT Image 2025년 4월 26일 오전 01_10_57.png


산골 마을로 가는 길


버스가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릴 때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뺨을 스쳤다.
평소엔 바닷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은별이와 도윤이었지만,
산 아래 마을을 지나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풍경은 완전히 다른 세계 같았다.


언덕과 능선이 이어지고,
어디는 촘촘한 숲으로 가려져 아침 햇살이 어슴푸레 내려앉아 있었다.
도윤이는 창문에 얼굴을 바싹 붙이며 “우와, 나무가 엄청 많아!” 하고 연실 탄성을 내뱉었다.


“여름이라 그런가, 나뭇잎이 더 짙은 초록색이야. 바다랑 확실히 달라.”
은별이는 산등성이에 걸린 구름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조금 더 가면 공기가 훨씬 청량해질 거다”라며 웃었다.


버스에서 내려 친인척 댁까지 이어지는 길은,
마치 그림책 속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아침 햇살이 풀잎에 맺힌 이슬에 비쳐, 작은 보석처럼 빤짝였다.
도윤이는 “대박!”을 연발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은별이는 꼼꼼히 주변을 살피느라 발걸음이 느려지곤 했다.
“이런 길을 걸어보는 건 처음이야… 마치 세상이 물을 머금은 듯 싱그럽네.” 하고 감탄했다.


ChatGPT Image 2025년 4월 26일 오전 01_12_45.png


골짜기 물가에서


산속 집은 오래된 기와지붕과 넓은 마당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담벼락 옆으로는 호박 덩굴이 잎을 뻗치고 있었고,
마당 가장자리에선 작은 들꽃이 피어 ‘어서 와’라고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두 아이는 대충 짐만 풀고 친인척 할머니가 건네준 수건을 들고 계곡으로 달려갔다.
길가를 살짝 내려가니 시원한 물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한낮 뙤약볕 아래라도, 이 골짜기 물가는 마치 천연 에어컨처럼 공기가 서늘했다.


“은별아, 여기서 물장구 치면 진짜 시원하겠다!”
도윤이는 바지를 걷어 올리고 계곡물 안으로 풍덩 들어갔다.
은별이도 망설이다가 발을 담그고는, 맑고 차가운 물에 깜짝 놀랐다.
온몸의 더위가 싹 가시는 느낌에, 두 아이는 금세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던 찰나,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처음 보는 애들이네. 혹시 방학이라 놀러 온 거야?”
갸웃하며 다가온 아이는 재훈이라는 동갑내기 소년이었다.
웃는 얼굴이 환해, 마치 햇살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우린 바닷가 마을에서 왔어. 여름방학이라 몇 날 며칠만 여기 지내려고!”
도윤이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재훈이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바닷가? 우와, 나 평생 산골에만 살아서 바다는 TV로나 봤는데… 진짜 끝없는 물이 펼쳐진대매?”
은별이는 재훈의 반응이 신기하고 귀여워서,
“응, 정말로 수평선이 보이고, 파도가 쉴 새 없이 몰려온단다.” 하고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세 아이는 금세 친해졌다.
한창 웃다 보니 오솔길 이야기가 나왔고, 재훈이는 “내가 길을 안내해 줄게!”라며 앞장섰다.
그날 오후, 산속 너른 오솔길을 탐험하며 꽃무릇이나 물푸레나무 같은 생소한 식물을 발견했고,
작은 다람쥐가 나무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다 함께 “와!” 하고 환호했다.


ChatGPT Image 2025년 4월 26일 오전 01_19_29.png


언덕 위 작은 정자


며칠 동안 산골 마을과 계곡을 누비며 재훈이와 시간을 보낸 두 아이는,
정자가 있다는 언덕 위 명소에도 오르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무더위가 한창인 오후, 언덕길은 경사가 있긴 했지만,
나무 그늘 덕분에 땀을 그렇게 많이 흘리지 않고도 올라갈 수 있었다.


정자에 도착하자, 예상보다 훨씬 탁 트인 풍경이 나타났다.
밑으로 내려다보니 푸른 숲과 논밭이 조각보처럼 펼쳐지고,
조금 멀리에는 아이들이 물장구치던 계곡이 은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엄청 높다! 우리 아까 저길 걸어서 온 거구나.”
도윤이가 손가락으로 계곡 방향을 가리키며 신기해했다.
은별이는 정자 난간에 기대어 머리칼을 정리하며 살짝 심호흡을 했다.
산바람이 솔솔 불어오는데, 한낮의 열기가 순식간에 식는 느낌이었다.


“나 언젠가 너희 마을에도 놀러 갈 수 있으면 좋겠어.
바다를 직접 보면 얼마나 놀랄지, 지금부터도 기대돼.”
재훈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고백처럼 말했다.
도윤이는 활짝 웃으며 “꼭 초대해 줄게!” 하고 약속했다.
은별이도 “우리 마을로 초대하면, 갈매기도 있고 모래사장도 있으니 엄청 신날 거야.” 하고 덧붙였다.


세 아이는 정자 아래 그늘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마을 자랑을 실컷 했다.
“재훈아, 바다에서 물고기 직접 잡으면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
“우린 계곡에서 밖에 못 잡아봤어. 작은 물고기 조금, 가재 정도?”
아이들의 수다가 끊이지 않았고, 그 사이로 산들바람이 잠시 시원한 침묵을 남겨 주었다.


ChatGPT Image 2025년 4월 26일 오전 01_17_33.png


짧았던 머무름, 그리고 헤어짐


밤이 되면, 산골 마당은 별과 달빛으로 가득 찼다.
도윤이는 “여긴 너무 조용해서 잘 때 뭔가 어색해!”라며 웃었지만,
정작 잠들기 전엔 시원한 바람에 취해 금세 곯아떨어졌다.
은별이는 모닥불처럼 붉은 노을이 사라진 뒤,
별빛 사이를 헤매는 자기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걸 느꼈다.


며칠 뒤, 할아버지는 “마을로 돌아가야지.
오두막이랑 부두 일도 챙길 거고, 은별이 너희 학교도 준비해야지.” 하고 말했다.
재훈이와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는 소식에,
두 아이와 재훈이는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꼭 편지 써! 우리 바닷가에 오면 물고기 잡는 법 제대로 알려줄게!”
도윤이가 손을 흔들자, 재훈이는 “알았어!
그 대신 계곡에서 노는 법도 잊지 마. 가을이나 겨울에 또 와!” 하고 받아쳤다.


마지막 날 저녁, 은별이는 야외 마당에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산속 밤하늘에도 수많은 별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바다랑 산이 이렇게나 다르지만, 결국 하늘 아래 함께 있구나.’
그 생각이 은별이를 묘하게 편안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아이들은 짐을 싸서 떠났다.
버스 창밖으로 재훈이와 그의 할머니가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제 곧 돌아가는 길이네. 새로운 친구도 만나고,
새로운 풍경도 봤으니 이 여름이 더 풍성해진 느낌이야.’


은별이는 바닷가 마을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언젠가 재훈이와 함께 바다 위에서 갈매기를 구경하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서도, 엄마와 아빠 이야기, 아직 풀리지 않은 마음속 숙제를 떠올리며
살짝 가슴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언젠간 만나게 되겠지. 산과 바다처럼, 분명 이어지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
그 생각과 함께, 은별이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작은 별들이 지나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