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수국 향기에 실린 마음
오전 내내 한낮의 햇살이 따사롭게 마을 골목을 비췄다.
어젯밤,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새롭게 들었던 은별이는
무언가 마음이 복잡하면서도 한결 편안해진 듯한 묘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두막에서 나와 부두 쪽으로 걸어가니, 이미 어부들이 그물과 어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부둣가 밧줄 위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도 소리는 아침빛을 품고 한층 맑아졌고,
바람 역시 수면 가까이 스치는 소리가 고요하고 부드러웠다.
그때, 모퉁이에서 도윤이가 성큼성큼 뛰어오고 있었다.
“은별아, 찾았다!”
도윤이는 헐레벌떡 뛰어와 숨을 고르며 미소를 지었다.
“아침부터 집에 가 봤는데, 벌써 나왔더라. 오늘 수국 길 걷기로 했잖아?”
“아, 맞다. 잊지 않았어. 조금만 더 늦었으면 미안할 뻔했네.”
은별이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부둣가를 등지고, 마을 뒤편 언덕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나란히 걸었다.
골목을 한참 따라 오르다 보면,
마을 바깥쪽으로 작은 언덕을 돌아가는 길이 나오는데,
거기엔 해마다 이른 여름이면 형형색색 수국이 가득 피어 마을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파랗고 연분홍색, 연보랏빛을 띤 수국들이,
햇살을 받아 푸른 잎 사이로 탐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도윤아, 작년엔 비가 많이 와서 수국이 더 커진 것 같다.”
은별이가 꽃송이를 매만지듯 손끝으로 살짝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게. 이 길만 걸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가,
수국이 빽빽하게 피어 있으면서도 각각 다른 색깔을 자랑해서 그런가 봐.”
두 사람은 보도블록이 깔린 길 중간중간에 잠시 멈춰 서서,
향긋한 꽃내음을 맡았다.
바닷가에서 불어온 소금기 있는 바람이,
수국 특유의 싱그러운 향기와 뒤섞이면서
이곳만의 독특하고 청량한 공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길 한편에는 연인이 찍어놓은 듯한 작은 낙서가 있었다.
“가끔 마을 사람들이 사진 찍으려고 오는 길이기도 하지.”
도윤이가 웃으며 말하자, 은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인지 이상하게 옷차림도 신경 쓰게 되고.
근데 오늘 우린 그냥 편한 차림으로 왔네.”
“하하, 뭐 어때. 사진을 찍지 않아도, 우리 마음속에선 오늘 풍경이 오래 남을걸?”
도윤이는 장난스레 윙크를 보냈다.
은별이도 덩달아 웃음이 터졌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낮은 담장 옆 장승같은 표지판 근처에 도착했을 때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멈췄다.
아래쪽으로는 온통 수국 길이 한눈에 보이고,
그 너머론 반짝이는 바다가 확 펼쳐져 있었다.
넓은 하늘 아래에서, 바다와 수국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평온한 그림엽서 속 한 장면 같았다.
“은별아, 요즘 조금 복잡해 보이던데… 괜찮아?”
도윤이는 살짝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제 할아버지께 부모님 얘기를 들었다고 했잖아. 어떤 마음인지 궁금해서.”
은별이는 수국 위로 느릿하게 흐르는 바람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만났고, 왜 여기에 왔는지 조금 알게 됐어.
그걸 알고 나니 슬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때 그분들이 느꼈던 마음이 뭘까 궁금해졌어.
노래와 바다, 두 사람만의 세계가 있었을 테니까.”
도윤이는 은별이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차근차근 알아가면 되지 않을까?
너한테 필요한 만큼, 조금씩.
나는 언제든 네 얘길 들어줄 테니까.”
그 말에 은별이는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일상의 풍경은 이렇게나 평온하고 아름다운데,
자신의 마음속은 여전히 불안함과 호기심, 그리움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도윤이가 옆에 있어 준다면,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수국 꽃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피어 있는 수국이 많아 가는 길 내내 눈도 마음도 즐거웠고,
틈틈이 서로 농담도 주고받았다.
“저 핑크색 수국, 왠지 도윤이 같아.”
“아니, 저 파란색이 더 내 취향이지.”
둘은 그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한낮의 시간을 만끽했다.
길의 끝에 다다르자, 낮게 펼쳐진 바닷가 마을이 다시 눈앞에 들어왔다.
곳곳에서 맛있는 점심 냄새가 솔솔 풍겨오고,
고양이들이 그늘을 찾아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지만,
분명 은별이에게는 조금씩 달라지는 것들이 있었다.
“다음번에 또 올 때는, 우리도 카메라를 가져와 볼까?
이 풍경,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서.”
도윤이가 말했다.
은별이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수국이 시들기 전에 꼭 다시 찍으러 오자.”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마을 골목으로 들어섰다.
바닷바람과 수국 꽃길로 물든 이 순간을 되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