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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별들이 지나는 길

10. 파도 위에 실린 이야기

by 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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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다는 여느 때처럼 잔잔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파도는 은빛 달빛을 등에 지고 찰랑이며, 마치 바닷가 마을에 사뿐히 노크를 하듯 조용히 밀려왔다 사라졌다.
오두막 앞 흔들의자에 앉은 은별이는, 어느새 익숙해진 동작으로 담요를 살짝 끌어안았다.


윤 노인은 오늘도 그 곁에 앉아 있었다.
다만 오늘 밤, 은별이의 시선은 바다보다는 오두막 안쪽 사진 한 장에 머물러 있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부모님이 나란히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 사진… 엄마가 아빠와 함께 찍은 마지막 여행 사진이라면서요?”
낡은 사진 속 배경은 지금 이 마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맑고 푸른 어느 항구 도시였는지, 뒤편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찍혀 있었다.


윤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사진은 너의 엄마가 아직 건강하고, 아빠도 바다를 좋아하던 시절에 찍은 거란다.
사실, 오늘은 **‘너의 부모님이 함께 바다를 누볐던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


은별이는 잔잔히 숨을 고르며, 사진을 살짝 감싸 쥐었다.
어느새 마음속에 작은 떨림이 일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가 함께 깃든 이야기를,
이 밤에 처음으로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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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실린 두 사람의 약속

언젠가 젊은 시절, 너의 엄마(서린)와 아빠(이준)는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다른 섬마을에서 인연을 맺었단다.
서린은 음악을 좋아해 작은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고,
이준은 어선 일을 도우며 해안 가까운 바다를 자주 오갔지.


두 사람은 우연히 어시장 옆 작은 거리에서 처음 만났다.
서린이 카페 홍보를 위해 자작 노래를 부르던 중,
이준이 그 목소리에 이끌려 걸음을 멈춘 것이 시작이었어.


“노래가 참 맑네요.”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속엔 진심 어린 감동이 묻어 있었다.
서린도 낯선 젊은이의 투박하지만 따뜻한 미소를 보고는,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편안해졌다고 해.


그리고 며칠 뒤, 바닷가 길을 걷던 서린은 이준이 고기를 내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준은 무거운 어구를 들어 옮기면서도, 숨 가쁘지 않은 듯 바다에 시선을 두고 있었지.
“바다는 매일 보아도 질리지 않아요.”
이준은 서린을 보자 그렇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조금 거친 파도지만… 그래도 이 소리가 좋습니다.”


서린은 그 모습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노래를 부를 때 느끼는 감정과, 이준이 바다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
어딘가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어.


그렇게 두 사람은 매일 바닷가에서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언젠가부터는 서로의 하루를 궁금해하는 사이가 되었다.
바닷물 냄새가 스며든 이준의 작업복,
그리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대는 서린의 습관.
둘은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졌고, 함께 걷는 뒷모습이 자연스레 닮아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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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 조용한 등대 아래서

그러던 어느 날 밤, 서린이와 이준은 섬마을 끝자락 등대에 나란히 앉았다.
파도 소리는 잔잔했지만, 머나먼 수평선 위로는 작은 불빛이 아른거렸다.
그건 어선의 불빛이기도 했고, 등대를 향해 다가오는 배의 흔적이기도 했지.


서린은 조용히 등을 기대며,
자신이 만들던 노래 중간 부분을 흥얼거렸다.
이준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문득 물었다.
“그 노래는…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서린은 한 박자 쉬고 대답했다.
“바다에 자기 마음을 실어 보낸 사람의 이야기.
언젠간 그 마음이 닿을 거라 믿으면서, 기다리는 노래예요.”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도, 바다에 내 마음을 자주 보냅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받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은 그렇게, 아무도 없는 등대 옆에서
서로의 마음이 바다를 통해 연결될 수 있음을 조용히 확인했다.
한참 후, 하늘에는 별이 가득 떠 있었고,
등대 불빛은 주기적으로 꺼졌다 켜지며 넓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그날 밤 이후, 서린은 이준을 위해 작은 노랫말을 하나 지었다고 해.
‘파도를 닮은 네 목소리,
별빛을 닮은 내 음색.
우린 언제나 서로를 향해 흐르고 있다.’


이런 문장만 보아도,
그 시절 두 사람이 얼마나 순수하고 뜨겁게 서로를 향해 있었는지 알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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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은별이


윤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뜨며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은 너의 엄마가 없으니, 이렇게밖에 말해 줄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서린과 이준, 두 사람은 마치 바다와 노래처럼
서로를 잇는 다리를 만들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결실이 바로 너였단다, 은별아.”


은별이의 눈가가 살짝 흔들렸다.
왠지 모르게 그토록 그리워했던 엄마의 목소리,
한 번도 제대로 알지 못한 아빠의 모습이
윤 노인의 이야기 속에서 조금 더 구체화되는 듯했다.


“할아버지… 엄마와 아빠는 그렇게 만나서,
함께 바다를 누비고 노래를 만들며 지냈던 거군요.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한꺼번에 여기 마을로 돌아온 건가요?”
은별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연달아 질문을 했다.


윤 노인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이야기는 차차 해줄게.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들려주련다.
아직 네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할아버지도 한꺼번에 다 털어놓으면 옛날 감정에 휩쓸릴 것 같거든.”


은별이는 아쉬운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이해하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지금은, 부모님이 어떤 사람으로 만나 서로를 아꼈는지
그 시작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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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은별이는 방으로 돌아가
조개피리와 함께 사진 한 장을 꺼내놓았다.
엄마와 아빠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문득, 엄마가 좋아했다던 멜로디와,
아빠가 파도 위를 바라보며 했을 법한 말들이
마음속에 잔잔히 녹아드는 듯 느껴졌다.


“엄마, 아빠…
둘이 어떻게 바다와 노래로 이어졌는지,
이제 조금씩은 알 것 같아요.”


은별이는 조개피리에 바람을 살짝 불어넣었다.
아직은 불완전한 소리가 흘렀지만,
왠지 오늘은 부모님이 함께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윤 노인은 밖에서 달빛을 보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어느새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고,
부드러운 바람이 오두막 지붕을 살짝 쓰다듬고 지나갔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바다는 그대로의 리듬으로 파도를 내보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는 사이
은별이의 마음 한편에는
부모님에 대한 지난 기억이 아니라,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가
마치 파도처럼 잔잔히 밀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조금 더 알고 싶어.
그 둘이 이어졌던 바다와 노래의 흔적을 따라가면,
분명 그 목소리가 다시 내게로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창밖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는 여전했지만,
은별이의 마음엔 아늑한 용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부모님의 기억 속에도, 지금의 자기처럼
서로를 향한 따뜻한 바람이 흐르고 있었으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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