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단지

라깡: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by 진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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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의 욕망을 따라 기도하십니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두 개의 강력한 장면 앞에 서 있습니다.

한 장면은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을 앞두고 하느님 앞에 담대히 나아간 아브라함의 기도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끈질기게 청하라고 가르치시는 복음의 장면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현대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다음과 같은 도전적인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처음 들으면, 이 말은 마치 “남들이 원하는 걸 나도 원하게 된다”는 식의 단순한 심리 묘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캉은 단지 모방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정체성과 욕망, 더 나아가 인간 존재의 결핍과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묵상하며, 우리는 오늘 **“나는 누구의 욕망을 따라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의 기도: 타자의 시선을 넘은 기도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 앞에 서서 묻습니다.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그는 단지 자기 민족이나 친족만을 위한 기도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마음, 곧 의로움과 자비의 본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하느님의 정의가 세상에 구현되기를 간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진정한 기도는 타자의 욕망을 따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소비적 기도도 아니고,

남들이 “이건 기도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만 좇는 모방적 기도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하느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고요한 진동에 응답한 간청이었습니다.


2️⃣ 라캉의 통찰: 나는 누구의 시선을 욕망하는가


욕망은 결핍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사실 그 대상 자체보다는 **그 대상을 통해 충족될 것 같은 어떤 ‘인정’, ‘존재의 충만함’, 혹은 ‘사랑받음’**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런 완전함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욕망은 끝나지 않습니다.

라캉은 말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저 ‘먹고 싶은 것’이나 ‘갖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누군가의 욕망 속에 내가 포함되길 바라는 깊은 심리적 갈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타자’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인간. 라깡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는 무엇을 욕망할지 혼자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이 근본적으로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구조에 놓여 있다고 봤습니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욕망하는 이유는 단지 그 장난감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다른 아이들이 그걸 좋아하고, 어른들이 그것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사회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캉이 말한 ‘타자(The Other)’는 단순한 이웃이나 타인을 넘어,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고 있는 문화, 규범, 언어, 사회 시스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을 성공했다고 여기며, 어떤 삶이 멋지다고 여기는가—이 모든 것은 바로 이 ‘타자’의 시선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 또한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 부모가 바라는 삶을 따라 하느님께 청하고,

• 사회가 성공이라 말하는 것을 따라 주님께 구하며,

• 타인의 인정과 비교를 따라 욕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령”, 곧 하느님의 숨결,

하느님 뜻 안에 나를 일치시키는 그분 자신을 간청하라고 하십니다.


3️⃣ 예수님의 초대: 너희는 성령을 청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내 욕망의 실현을 위한 주문이나 기술로서의 기도를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약속하신 최고의 응답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 욕망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욕망, 하느님의 시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기 위한 응답입니다.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의 참된 변형(transformation)**입니다.


4️⃣ 헨리 나우웬: "너는 누구냐?" ‘욕망의 중심’에서 ‘존재의 중심’으로


예수회 사제이자 하버드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Henri J.M. Nouwen)은

세상의 모든 인정과 성취를 이뤘음에도 깊은 내적 공허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캐나다 토론토 인근에 있는 라르쉬(L'Arche)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발달장애인 공동체)에서 깊은 영적 변화를 경험합니다. 특히 정체성과 존재의 가치에 대한 내면적 질문 ― “너는 누구냐?” ― 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곳에서 그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는 ‘존재 그 자체로의 수용’을 체험하게 됩니다.


“Who are you?”
I am not what I do.
I am not what I have.
I am not what other people say about me.
I am the beloved child of God.
That is who I am.


“너는 누구냐?”
나는 내가 하는 일로 정의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소유한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그것이 바로 내가 누구인지다.


세상의 기준(성공, 업적, 평판)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여정은, 그가 라르쉬 공동체에서 배운 가장 본질적인 진리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잊을 때, 나는 불안하고 외롭고 비교에 시달린다. 그러나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갈 때, 나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느낀다.”




하느님은 우리가 욕망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내는 누구의 욕망을 따라 살고 있는가?”

“나는 타자의 시선에 휘둘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시선을 살아가는 존재인가?”


세상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더 많이 가져라. 더 많이 인정받아라. 더 성공하라.
그렇게 우리도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끝없는 경쟁에 내몰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아들이다, 너는 나의 사랑받는 딸이다.”
(마태 3,17)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누구의 인정도, 어떤 업적도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기도는 내가 욕망하는 것을 얻는 일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 여정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도는 타인의 욕망을 주님 앞에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욕망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청하라, 찾아라, 두드려라”는 말씀을 실천할 때,

그 간청은 결국 우리 안에서 성령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처럼, 기도합시다.

예수님처럼, 끈질기게 청합시다.

그리고 나우웬처럼, 존재 그 자체로서 사랑받고 있는 나를 다시금 받아들입시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기도란, 하느님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품어가는 신비로운 여정임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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