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24장. 가장 낮은 곳에서 (농성장의 서하)

by 진동길

24장. 가장 낮은 곳에서 (농성장의 서하)


찢겨진 비닐 천막


1999년 11월. 입동(立冬)을 갓 넘긴 해원의 밤바람은 살점을 도려낼 듯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최태국이 150억의 순수 현금을 거머쥔 직후, 산 24번지에 똬리를 틀고 있던 진짜 비극은 마침내 그 흉측한 아가리를 벌렸다. 법의 지루한 유예 따위를 기다릴 위인이 아니었던 최태국은, 수십 년간 그 척박한 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소작을 부치던 무지렁이들을 향해 사냥개들을 풀었다.


야밤을 틈타 들이닥친 용역 깡패들은 얼어붙은 유리창을 쇠파이프로 깨부수고, 시뻘건 연탄난로를 걷어차며 사람들을 혹한의 길바닥으로 내팽개쳤다. 포크레인의 육중한 삽날이 평생의 보금자리를 으스러뜨리던 밤, 쫓겨난 이들은 산 24번지 초입의 얼어붙은 공터에 각목과 비닐을 얽어매어 처절한 ‘철거 반대 농성장’을 세웠다. 매일 밤 용역들의 살의와 세입자들의 단말마가 뒤엉키는, 해원의 가장 밑바닥에 버려진 핏빛 지옥이었다.


3,000억의 탐욕이 부딪히던 해원장의 만찬이 박살 난 늦은 밤. 서하는 값비싼 양복 재킷을 벗어던지고, 구급약이 든 무거운 배낭을 멘 채 숨 가쁘게 비탈길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의 몸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최고급 한우의 기름진 냄새와 프랑스산 양주의 향기는, 농성장 초입부터 훅 끼쳐오는 폐타이어 타는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에 완벽하게 집어삼켜졌다.




죄인의 아들, 피고름을 닦다


칼바람에 미친 듯이 펄럭이는 비닐 천막 안의 풍경은 참혹했다. 낮에 있었던 용역들의 기습 철거 탓에, 흙바닥 위로는 이마가 터지고 팔다리가 꺾인 노인과 아낙들이 짐승처럼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서하는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질척이는 흙바닥에 주저함 없이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서하 도련님이 또 왔능가. 인자 제발 오지 말랑께. 와 이 드런 데서 남의 피고름을 만지고 그라요.” 머리가 잿빛으로 센 노파가, 몽둥이에 맞아 퉁퉁 부어오른 손으로 서하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다.


“할머니, 가만 계세요. 덧납니다.”

서하는 배낭에서 소독약과 붕대를 꺼냈다. 그리고 가장 낮게 엎드려 노파의 터진 이마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성물(聖物)처럼 하얗고 곱던 서하의 손은 어느새 거친 흙먼지와 남의 핏물에 짓물러, 시장통 막노동꾼의 그것보다 더 처참하게 갈라져 있었다.


농성장의 사람들은 서하가 누구의 핏줄인지 다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살점을 뜯어먹고 자란 늙은 악마, 최태국의 막내아들. 처음 서하가 약을 들고 이 빈민굴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시퍼런 증오를 품고 그에게 돌을 던지고 가래침을 뱉었다. “악마 새끼가 어디서 위선을 떨어!*라며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기도 했다.


하지만 서하는 맞으면서도 결코 도망치지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오물과 폭력을 변명 한마디 없이 오롯이 제 몸으로 받아내며, 매일 밤 용역에게 찢긴 그들의 상처를 제 깨끗한 옷자락으로 닦아냈다. 그 처절하고도 미련한 속죄 앞에서, 사람들의 맹렬했던 분노는 결국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원수의 핏줄이 바치는 이 지독한 십자가를 보며, 농성장의 사람들은 이제 서하를 향해 증오 대신 가슴 시린 연민의 눈물을 흘렸다.




밤이 깊어지자, 춘식 철공소의 전(前) 주인이었던 김춘식이 피 묻은 각목을 쥔 채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일식을 앞세우고 평생의 피땀이 서린 공장마저 빼앗긴 후, 춘식은 이 농성장의 가장 선두에서 용역들의 쇠파이프를 온몸으로 막아내는 방패막이가 되어 있었다.


춘식이 한숨을 푹 쉬며 흙 묻은 작업복 품에서 식어빠진 찐 감자 몇 알을 꺼내 서하 앞에 밀어 놓았다.

“서하야. 저녁도 못 묵었제. 식기 전에 이거라도 좀 들어라.”

“감사합니다, 아재.”


서하는 피 묻은 손을 대충 바지에 문질러 닦고는 식은 감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아비의 대청마루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최고급 산해진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초라하고 퍽퍽한 음식. 그러나 서하의 목구멍을 긁으며 넘어가는 그 거친 감자의 온기는, 3,000억짜리 피 묻은 만찬보다 천 배는 더 거룩하고 따뜻했다.


“니가 이래 똥물 뒤집어쓰고 우리 발 닦아준다고, 내일 아침에 저 썩을 놈의 포크레인이 멈출 것 같나. 니 형들이 그 150억 앞에서 이빨을 거둘 것 같냐 말이다.”


춘식이 찌그러진 양은잔에 막걸리를 콸콸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눈시울에는 서하를 향한 짙은 연민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서하는 묵묵히 감자를 씹어 넘기며, 천막 구석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웅크려 잠든 철거민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서하의 맑은 동공에는 세상을 향한 분노 대신, 감당하기 벅찬 깊은 슬픔이 호수처럼 고여 있었다.


“알아요, 아재. 제가 이분들의 피고름을 닦아준다고 해서 우리 아버지가 속죄하거나, 내일 아침 들이닥칠 용역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

서하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형, 이현이는 늘 제게 말했어요. 알량한 동정심은 쥐뿔도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구조를 뒤엎고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장악해야만 이 빈곤을 박살 낼 수 있다고.”


“그라모, 니는 와 이 뻘짓을 사서 하노.”


“이현이 형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세상의 시스템이 합리적으로 완벽하게 구원받을 때까지, 지금 당장 이 얼어붙은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내일 덮쳐올 쇠파이프가 무서워 벌벌 떠는 저 아이들의 오늘 밤은, 도대체 누가 안아줍니까.


서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이 무자비한 자본의 지옥을 향해 던지는, 서하의 유일하고도 결연한 신앙고백이었다.


“누군가는, 이 더럽고 냄새나는 흙바닥에 같이 뒹굴며 함께 맞아주고 울어주어야 해요. 거창하게 세상을 통째로 구원하지는 못해도, 오늘 밤 이 사람들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것. 저는 그것이 절망의 끝자락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신(神)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집안이 지은 이 끔찍한 죄를, 제 온몸이 찢겨나갈 때까지 이렇게라도 닦아내야만 합니다.”


춘식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홱 돌렸다. 주름진 그의 뺨 위로 굵고 뜨거운 눈물이 툭 떨어졌다. 짐승의 핏줄에서 태어난 이 맑은 청년은, 짐승의 목을 베는 대신 친히 제물이 되어 이 지옥의 십자가를 홀로 짊어지려 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냉소의 발소리


새벽 두 시. 고통 속에 신음하던 농성장의 사람들도 지쳐 까무러치듯 잠든 시간. 천막 밖에서 구두 굽이 얼어붙은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박, 저박, 저박. 일정하고도 차가운 금속성의 리듬. 비루한 진흙탕과 쓰레기가 뒹구는 이 철거촌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이고도 오만한 발소리였다.


서하가 비닐 문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섰다. 폐타이어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불길 너머,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형체를 드러낸 사내가 서 있었다. 짙은 네이비색 최고급 캐시미어 코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이현이었다.


얼음장 같은 겨울바람에 이현의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불길을 머금은 그의 안경알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가장 높은 곳에서 3,000억의 시스템을 지배하려는 무신론의 이성과,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의 피고름을 닦으려는 유신론의 사랑이, 그 처참한 철거촌의 흙바닥 위에서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여전하구나, 서하 넌.”

이현의 입가에 칼날처럼 얇고 건조한 조소가 걸렸다. “버려진 돼지들의 피고름이나 핥아주며, 스스로 십자가를 진 성자(聖者)라도 된 양 취해 있는 꼴이라니. 역겹도록 낭만적이군.”


현대판 대심문관(大審問官)과 다름없는 이현의 차가운 눈빛이 서하의 심장을 정조준하며, 길고 참혹한 밤의 철학적 살육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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