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25장. 대심문관의 밤 (무신론과 유신론의 충돌)

by 진동길

25장. 대심문관의 밤 (무신론과 유신론의 충돌)


빵과 자유, 그리고 3,000억


폐타이어가 타들어 가는 농성장의 매캐한 모닥불 앞.

일렁이는 불빛을 사이에 두고, 이현과 서하는 서로 다른 우주에서 온 이방인처럼 마주 섰다. 최고급 이탈리아제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이현의 몸에서는 서늘하고 매끈한 향수 냄새가 났고, 흙먼지에 구른 서하의 몸에서는 타인의 피고름과 땀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구경하러 왔다.”

이현이 턱짓으로 비닐 천막 안에서 짐승처럼 웅크린 채 잠든 철거민들을 가리켰다.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실체를. 그리고 네가 믿는 그 알량한 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무능한지도.”


이현이 구두코로 얼어붙은 흙바닥을 툭, 툭 쳤다.


“서하야. IMF가 터지고 사람들이 가장의 목에 밧줄을 걸 때, 네가 밤낮으로 부르짖던 신은 어디 있었지? 저 천막 안의 돼지들이 용역들의 쇠파이프에 맞아 대가리가 터질 때, 신은 대체 무슨 기적을 베풀어 주었나? 아무것도 없지. 저들을 구원하는 건 네 기도가 아니라, 내일 아침 내 손에 쥐여질 합의금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다.”


서하의 맑은 눈동자가 아프게 흔들렸지만, 이현은 멈추지 않고 차가운 궤변을 쏟아냈다.


“인간은 빵이라는 자본 앞에서 자유나 존엄 따위를 원하지 않아. 당장 네 목을 물어뜯어서라도 제 입에 빵을 넣어줄 강력한 통제자를 원하지. 나는 모레, 아버지를 제물로 바치고 이 해원의 3,000억짜리 제국을 완벽하게 집어삼킬 거다. 내 발밑에 엎드려 복종하는 대가로, 저들에게 최소한의 빵과 온기를 배급하면서 말이지. 그것이 자본주의의 신이다. 내가 이 지옥의 완벽한 신이 될 거란 뜻이야.”




별의 궤도, 우주의 질서


이현의 그 오만하고 빈틈없는 논리 앞에 서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살을 에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칠흑 같은 겨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형.”


서하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모닥불의 파열음을 뚫고 나올 만큼 또렷하고 단단했다.


“하늘을 봐.”


이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서하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얼어붙은 밤하늘을 수놓은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저 수많은 별들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는 것 같지만, 단 1초의 오차도,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각자의 궤도를 지키며 운행하고 있어. 형의 논리대로 우주가 그저 우연한 폭발과 혼돈뿐이라면, 저 거대한 행성들은 진작에 서로 충돌해서 우주를 가루로 만들어버렸어야 해.”


서하가 다시 시선을 내려 이현의 차가운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누군가 처음 이 거대한 태엽을 감고, 완벽한 질서를 부여했기 때문에 우주가 멸망하지 않는 거야. 우주를 무너지지 않게 붙잡고 있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중력이라면, 인간의 역사가 그 숱한 전쟁과 탐욕 속에서도 짐승의 시대로 추락하지 않게 붙잡아 온 건…… 보이지 않는 ‘선(善)’이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90퍼센트의 그 근원적인 힘을 부정할 수는 없어.”


“하, 헛소리.”


이현이 헛웃음을 쳤다.

“그래서? 저렇게 정교하게 별을 굴리는 위대한 시계공께서, 어째서 저 천막 안의 가난뱅이들이 피를 흘릴 때는 주무시고 계시는 거지?”


“신이 잠든 게 아니야. 인간의 탐욕이 신의 자리를 빼앗았을 뿐이지.”


서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형. 아버지가 저들의 땅을 빼앗을 때, 신이 벼락을 내려 아버지를 죽였다면 세상은 공평해졌을까? 아니.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프로그램된 기계일 뿐이야. 신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우리 집안은 그 자유로 저들의 살점을 뜯어먹는 괴물이 된 거야.”



논리를 허무는 성자(聖者)의 입맞춤


서하가 거친 흙바닥을 디디고 이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의 기적은 하늘에서 금화가 뚝 떨어지는 게 아니야. 우리 아버지에게 평생의 피땀인 공장을 빼앗기고도, 오늘 밤 내가 배를 주릴까 봐 자신의 마지막 남은 찐 감자를 내어준 김춘식 아저씨의 그 비합리적인 사랑…… 형의 경제학으로는 절대 계산해 낼 수 없는 그 바보 같은 마음이, 신이 살아있다는 가장 완벽한 증명이야.”


이현의 안경 너머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완벽한 숫자로 짜인 그의 머릿속에, 서하가 던진 우주의 질서와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는 비논리가 동시에 꽂혀 들어오며 서늘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형의 그 똑똑한 머리를 이길 재주가 없어.”


서하의 눈에서 마침내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 눈빛에는 형을 향한 원망이나 분노가 아니라, 심연을 알 수 없는 ‘지독한 불쌍함’만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형의 완벽한 궤도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어. 그 3,000억의 우주에는 온기가 없잖아. 그래서 나는 저 천막 안에서 피 흘리는 사람들보다, 숫자의 감옥에 영혼을 가둬버린 형이…… 지금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


말을 마친 서하가 피와 흙먼지로 얼룩진 두 팔을 벌려, 이현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현의 최고급 캐시미어 코트 위로 서하의 핏물과 흙먼지가 흉측하게 엉겨 붙었다. 하지만 서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괴물이 되어버린 형의 서늘하고 뻣뻣한 어깨를 부서져라 꽉 안아주었다. 차가운 무신론의 논리를 향해, 영성(靈性)으로 충만한 성자가 건네는 무한한 연민과 슬픔의 입맞춤이었다.




“……무슨 짓이야, 이거 놔.”


이현은 뱀에 물린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하를 거칠게 밀쳐냈다. 늘 기계처럼 완벽하게 통제되던 그의 호흡이 처음으로 거칠게 헐떡이고 있었다. 서하의 체온이 닿았던 가슴팍이 덴 것처럼 불에 타는 듯했다. 그 알 수 없는 뜨거운 온기가 자신의 완벽한 이성의 성벽을 단숨에 녹여버리는 듯한, 지독하게 불쾌한 공포감이 엄습했다.


이현이 코트에 묻은 서하의 핏자국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내며 으르렁거렸다.


“미친 새끼. 이따위 값싼 감상으로 내 죄책감이라도 자극할 생각이었다면 틀렸어. 넌 계속 그렇게 흙바닥에서 진흙탕이나 뒹굴며 살아라.”


이현은 쫓기듯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던 그의 뒷모습이, 어쩐지 처음으로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저박, 저박, 저박.


어둠 속으로 황급히 멀어지는 이현의 구두 발소리를 들으며, 서하는 다시 모닥불 앞에 무릎을 꿇고 얼어붙은 두 손을 모았다. 가장 높은 우주의 별들을 향해, 3,000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아비와 형제들을 살려달라는 서하의 가장 낮은 기도가 밤새도록 해원의 흙바닥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