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허나 만일"
오염된 이성(理性)
이현은 쫓기듯 비탈길을 내려와 자신의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히터를 최고 온도로 틀었지만, 최고급 캐시미어 코트에 묻은 서하의 핏물과 흙먼지는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정작 지워지지 않는 것은 코트에 묻은 시각적 얼룩이 아니라, 서하가 제 몸을 끌어안았을 때 가슴팍에 남기고 간 그 끔찍하리만치 뜨거운 ‘온기’였다.
핸들을 움켜쥔 이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3,000억의 자본, 인허가 장부, 적대적 M&A. 자신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그 완벽하고 투명한 얼음의 제국에, 서하가 흘린 ‘연민’이라는 비합리적인 불순물이 툭 떨어져 시퍼런 균열을 내고 있었다. 늘 통제 불능의 변수를 혐오해 온 이현에게, 그 낯선 감각은 지독한 모멸감이자 공포였다.
‘숫자의 감옥에 갇힌 형이 제일 불쌍해.’
서하의 젖은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 이현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이 알량하고 나약한 감상주의를 완벽하게 박살 내려면, 자신의 차가운 무신론적 궤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하루빨리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낡고 냄새나는 해원장의 늙은 수컷, 최태국이라는 거대한 암덩어리를 당장 도려내야 했다.
이현의 차가운 세단이 짐승의 아가리 같은 해원의 짙은 어둠을 찢으며, 곧장 해원장의 뒷문을 향해 미끄러져 갔다.
고장 난 살의(殺意)
새벽 3시. 해원장 뒤란의 캄캄한 감나무 아래.
살을 에는 칼바람 속에서도 강수만은 얇은 러닝셔츠 차림으로 장작을 패고 있었다.
쩍! 쩍!
어둠을 찢는 날카로운 파열음. 시퍼런 도끼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수만의 팔뚝 위로 굵은 핏대가 뱀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수많은 날을 이 어두운 뒤채에서 그림자처럼, 혹은 벌레처럼 숨죽여 살아왔다. 1979년 겨울, 식모였던 어머니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각혈을 하며 죽어갈 때, 아비 최태국은 안방 문턱조차 넘지 않고 주판알만 튕기고 있었다. 그 얼음장 같은 무관심을 목격한 날, 수만의 심장에는 시퍼런 독기가 맺혔고, 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의 목줄을 기어이 제 손으로 끊어놓으리라 피눈물로 다짐했었다.
그러나 최근, 수만의 그 날카롭던 살의는 기묘한 고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며칠 전 3,000억의 밥상머리에서, 장남 기백에게 멱살을 잡혀 바들바들 떨던 늙은 아비의 비참하고 쭈그러든 목덜미. 절대 권력자인 줄 알았던 최태국이 그저 한낱 숨 막힌 노인네로 전락하던 그 순간, 수만의 가슴 깊은 곳에 징그럽게 봉인되어 있던 기괴한 감정이 터져 나왔다.
‘연민(憐憫)’이었다.
당장이라도 안방 문을 박차고 들어가 그 늙은 목줄을 찍어버리고 싶다는 천박한 살의가 핏속에서 펄펄 끓어오르다가도, 간질 발작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측은함과 서글픔이 수만의 목을 조르며 살의를 다독였다. 미칠 노릇이었다. 아비를 죽여야만 내가 사는데, 이 빌어먹을 핏줄의 연민이 도끼를 쥔 손아귀의 힘을 번번이 빼놓고 있었다.
“여전히 엉뚱한 곳에 힘을 낭비하고 있군.”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서늘한 목소리에, 수만의 도끼가 허공에서 멈칫했다.
장작더미 옆, 완벽한 슈트 차림의 이현이 어둠과 한 몸이 된 채 수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면죄부의 탄생
수만이 거친 숨을 고르며 도끼를 내려놓았다.
“……이 새벽에 어쩐 일입니꺼, 둘째 도련님.”
“방금 서하를 보고 오는 길이다.”
이현이 구두코로 쪼개진 장작 토막을 툭 건드리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멍청한 녀석은 아직도 하늘에 대고 기도를 하더군. 아버지가 지은 죄를 신(神)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혹은 신께서 아버지를 심판해 주시기를.”
이현이 수만의 텅 빈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하며 찔러 들어왔다.
“수만아. 넌 어떠냐. 네 어머니가 병들어 숨이 넘어갈 때, 아버지가 따뜻한 눈길 한 번, 물 한 모금 주던가? 서하가 밤낮으로 부르짖는 그 알량한 신은, 네 어머니가 짐승처럼 죽어갈 때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지?”
수만의 턱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썩어 문드러진 아킬레스건을 후벼 파는 이현의 말에, 억눌려 있던 분노가 다시금 꿈틀거렸다.
“……지 같은 놈한테 애초에 신 같은 기 어딨습니꺼. 서하 도련님한테나 자비로운 신이 있겠지예. 내한테는예, 돈이 신이고, 내 밥줄 쥐고 있는 아부지가 신입니더.”
“맞아. 넌 짐승처럼 밑바닥을 구르며 자본이라는 진짜 신의 생리를 아주 뼛속까지 배웠지.”
이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내 그의 목소리가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명심해라. 아버지는 신이 아니야. 그냥 수명이 다 되어 죽어가는 늙은 포유류일 뿐이지. 네가 그 늙은이에게 느끼는 알량한 연민이나 두려움 따위는 개나 줘버려. 그리고 똑똑히 들어라.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천벌을 내릴 진짜 ‘신’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현이 수만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캐시미어 코트에서 풍기는 서늘한 향수 냄새가 수만의 폐부를 찔렀다.
“세상은 그저 자본과 역학 관계로 굴러가는 거대한 기계일 뿐이야. 만약 신이 없다면, 사후 세계도, 천국도, 지옥도 없다. 그것은 곧, 인간의 어떤 행동도 내세에서 처벌받지 않는다는 뜻이지. 수만아, 신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용된다.”
수만의 동공이 지진이 난 듯 거칠게 흔들렸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 짧고도 서늘한 문장이, 수만의 영혼을 옭아매고 있던 천륜의 족쇄와 그를 나약하게 만들던 병적인 '연민'을 단숨에 툭, 끊어내고 있었다.
“그러니 아비를 죽이는 것을 ‘패륜’이라 부르며 주저할 필요 없어.”
이현의 악마 같은 속삭임이 이어졌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인이라는 건 그저 현상일 뿐이야. 썩어빠진 구시대의 암덩어리를 철거하고, 3,000억짜리 새로운 제국을 세우기 위한 합리적인 ‘위생 처리’. 네가 그 도끼로 내리쳐야 할 건 장작이 아니라, 바로 그 늙은 병균이다.”
이현이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어, 수만의 굳은살 박인 어깨를 툭툭 쳤다.
“머지않아 산 24번지의 기공식이 열리는 날. 그날 밤이 청소하기 가장 좋은 날이다. 알겠지?”
이현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아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수만에게 살인의 완벽한 당위성을 주입했다는 오만함이 그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고 있었다.
짐승의 셈법, 지옥의 딜레마
홀로 남은 해원장의 뒤란.
수만은 흙바닥에 꽂힌 도끼 자루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켜쥐었다. 이현이 들이부은 차가운 이성의 독이 핏줄을 타고 흐르며, 고장 났던 살의가 다시 시퍼렇게 날을 세웠다.
“그래……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기라. 살인은 죄가 아이다. 청소일 뿐이다.”
수만의 입술 사이로 기괴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이현의 완벽한 궤변은 수만의 뇌리를 핥고 지나가며 그를 순수한 살인마로 완벽하게 세팅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
수만의 뒤통수를 서늘하게 후려치는 짐승 같은 직감이 번뜩였다. 수만의 시커먼 동공이 이현이 사라진 어둠을 향해 기민하고도 날카롭게 좁아졌다.
‘잠깐만. 신이 없응께 내보고 늙은이를 죽이라꼬?’
이현은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오직 말 몇 마디로 서자인 자신을 ‘살인 기계(칼잡이)’로 써먹으려 하고 있었다. 이현의 말대로 아비가 죽고 나면, 그 3,000억의 제국은 대학원을 나온 엘리트 이현의 독차지가 될 터였다. 그렇다면 피를 뒤집어쓴 자신은?
수만의 꽉 쥔 주먹에서 뼈가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가 이현의 그 고상한 철학을 비웃으며 무섭게 소용돌이쳤다.
‘……만에 하나. 백 번, 천 번 양보해가, 만에 하나라도 진짜 신(神)이라는 기 존재한다면? 신이 아이라도, 대한민국 경찰이라는 기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내가 와 저 뱀 같은 둘째 놈을 위해 혼자 독박을 써야 하는 깁니꺼?’
수만의 입가에 처음으로 섬뜩하고 교활한 미소가 번졌다.
이현은 수만을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믿었겠지만, 오산이었다. 밑바닥에서 짓밟히며 살아남은 짐승의 셈법은, 책상물림의 경제학보다 훨씬 치열하고 잔혹했다.
수만은 시퍼런 도끼를 들어 허공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아비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결코 혼자 지옥불에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기백이든, 이현이든, 이영숙이든. 이 저주받은 3,000억의 성벽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을 자신과 똑같은 ‘살인마의 공범’으로 옭아맬 완벽한 덫을 놓아야만 했다.
1999년 11월의 마지막 날. 해원장에 몰아칠 진짜 피바람은, 이현의 오만한 설계도를 찢어발기며 수만의 시퍼런 도끼날 위에서 가장 기괴한 형태로 벼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