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29장. 죽음, 네 번의 방문 — “모두가 들어간 방”

by 진동길

29장. 네 번의 방문 — “모두가 들어간 방”




밀실의 호흡, 양심과 살의의 저울질



새 천 년을 알리는 괘종시계가 탁한 종소리를 열두 번 토해냈다.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백 년 만의 폭설은 해원장 대저택을 완벽한 흰 관(棺)으로 봉해버렸다. 전화선은 끊겼고, 비탈길은 묻혔다. 바깥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안으로만 길이 생겼다. 사람은 원래, 길이 하나만 남으면 거기로 간다.


거실 바닥에 흩뿌려졌던 푼돈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돈은 주워 담아도, 오늘 밤의 공기는 주워 담지 못했다. 공기는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계획, 억울함, 욕심, 겁—그 모든 것들이 섞인 냄새로 눅눅했다.


이 집의 짐승들은 각자의 방에서 안방 문을 노려보았다.


한 손에는 도구가 있고, 다른 손에는 판결문이 있었다. 그 판결문에는 ‘양심’이라고 쓰였기도 했고, ‘공포’라고 쓰였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모두 괴물의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살인마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완벽한 것은 오직 방뿐이었다.





[AM 00:05] 첫 번째 방문자: 십자가를 짊어진 손 (서하)


그날, 최태국이 공식적으로 죽던 밤.


첫 번째 방문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사람이었다. 서하였다.


산 24번지 공터에서 불길을 몸으로 막아낸 뒤였다. 손등은 이미 눌어붙은 붕대와 진물이 엉겨 있었다. 통증은 진통제로도 꺾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하는 안방 문 앞에 섰다. 그를 밀어 올린 건 고통이 아니라, 바깥에서 얼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랫목에 누운 최태국은 잠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눈이었다. 돈을 너무 오래 만진 사람의 눈. 눈동자에 사람 대신 숫자가 앉아 있었다. 서하는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제발 멈춰주세요. 내일 아침 고시가 뜨면… 산 24번지 사람들은 정말 끝입니다. 춘식 아저씨도 지금…”


말끝이 떨렸다. 간청이 아니라, 자책이 섞인 소리였다.


그 순간 태국의 입가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이 올라오는 속도였다. 담배 냄새가 이불 속에서 눅진하게 새어 나왔다.


“그 손… 와 그랬노. 함 보자.”


서하가 손을 올리자, 태국은 이불 속에서 낡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얼굴 앞에 툭 던졌다.


“니가 살리겠다는 그 땅, 니가 책임져라.”


서하가 봉투를 열었다.


몇 줄의 문장. 단순한 문장. 그런데 그 문장은 사람의 인생을 사람처럼 쓰지 않았다. 사람을 담보처럼 썼다. 서하의 동공이 그 문장을 따라가다 멈췄다.


“왜… 이런….”


태국은 숨을 쉬듯 말했다.


“니 형들, 니 엄마… 다 저거 하나 때문에 서로를 물어뜯을 기다. 니가 그 십자가 들어라. 평생.”


구원이 아니었다. 평생을 미끼로 살아야 하는 저주였다.


서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음을 삼키려다가, 결국 울음이 먼저 목을 밀고 나왔다. 그는 문장을 접어 봉투에 도로 넣었다. 마치 그 문장에 손때를 묻히는 것조차 죄인 것처럼.


서하는 고개를 숙인 채, 도망치듯 안방을 빠져나왔다.


복도에 나오자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이 집의 공기는 방 안보다 복도가 더 차가웠다.




[AM 00:40] 두 번째 방문: 망설인 독약 (영숙)


서하가 남긴 울음의 잔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안방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붉은 실크 가운의 이영숙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쌍화차 한 잔이 들려 있었다. 김이 오르는 갈색 물. 그 안에는 신경안정제와 수면제가 녹아 있었다. 하지만 영숙이 떤 건 도덕심이 아니었다. 그건 자기 목줄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떠는 종류의 떨림이었다.


‘내가 정말… 이 늙은이를…?’


영숙은 약을 타다가 멈칫했고, 결국 치사량에 한참 모자란 애매한 양만을 넣었다. 그 애매함이, 영숙의 운명을 결정할 줄도 모르고.


“회장님. 속이 좀 타실 것 같아서요. 차 한 잔 드세요.”


태국은 받았다. 그리고 단숨에 마셨다.


잠시 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숨소리가 탁해졌다. 약효가 돌기 시작했다.


그때 영숙이 움직였다.


그녀는 찻잔이 아니라 방을 마셨다. 서랍을, 장롱을, 이불 밑을. 인감과 열쇠가 있을 만한 곳을, 사람 찾듯 뒤졌다.


“어디 있어… 어디…”


그 순간, 침대에서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니 같은 년이… 찾을 수 있는 데… 안 둔다 캤제.”


태국이 실눈을 떴다.


치사량에 미치지 못한 약은 태국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더 악랄하게 만들었다. 영숙은 숨이 ‘힉’ 하고 꺾였다. 들킨 게 아니라, 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숙은 인감도 구경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첫 번째 살인 시도는, 나약한 망설임 속에서 실패로만 남았다.




[AM 01:25] 세 번째 방문: 짐승의 패륜 (기백)


이번에는 발소리가 달랐다. 조심이 아니라, 무게였다.


기백이 들어왔다.


태국은 약기운에 반쯤 꺼진 채 침을 삼키며 헐떡이고 있었다.


기백은 아비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장롱 맨 밑칸부터 미친 듯 파헤쳤다. 종이 냄새, 잉크 냄새, 오래된 가죽 냄새. 그 모든 냄새를 걷어내면 결국 하나였다. 소유권 냄새.


“내 거… 내 거 어디 있노.”


기백이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은 ‘땅’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어머니’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태국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늙은 몸이 인형처럼 덜렁거렸다.


“말해. 윤 씨… 그 땅… 그 문서….”


태국의 입에서 헛소리가 흘러나왔다.


‘도망친 년’ 같은, 친어미를 씹어뱉는 말.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기백의 눈이 뒤집혔다. 그의 손이 목으로 갔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면, 뼈가 먼저 울릴 터였다.


그런데—기백은 갑자기 손을 풀었다.


양심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이대로 죽이면 너무 쉽다." 그 계산이, 기백의 손을 놓게 했다.


‘살려두고… 내일 아침. 눈 뜨고 있을 때 다 뺏는다.’


기백은 태국을 차가운 바닥에 버려둔 채,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서 기이한 숨소리가 났다. 숨이 아니라, 쇠가 긁히는 소리 같은 숨.




[AM 02:40] 침묵하는 공권력, 그리고 돌아온 맹독 (영숙의 회귀)


태국이 목을 긁어대는 소리가 방 밖으로 새어 나왔다.


“컥… 커윽….”


사랑채 쪽에서 담배를 피우던 박 군수와 경찰서장은 그 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들었다. 그런데 둘은 서로의 얼굴만 봤다. 누가 먼저 움직이는지 보려는 눈빛. 움직이면 책임이 생기니까. 책임이 생기면, 내일 도장이 더러워지니까.


그들은 담배 연기를 길게 뱉고, 소리를 외면했다.


공권력의 외면은 대개, 이렇게 조용하다.


그리고 십 분 뒤.


복도 끝에서, 영숙이 머리를 쥐어뜯듯 서 있었다. 방금 전 ‘애매함’이 그녀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저 늙은이가 내일 아침을 맞이하면… 내가 약을 탔다는 걸 알면… 나는 끝이다.’


공포가 분노를 밀어 올렸다. 영숙의 이성이 툭, 끊어졌다.


영숙은 다시 안방 문을 열어젖혔다.


바닥을 기며 헐떡이는 최태국. 그 꼴을 보자, 영숙 안에서 “망설임”이 죽고 “살의”가 살아났다. 그녀는 품속에 숨겨둔 가루를 꺼냈다. 이번엔 모자라지 않았다. 이번엔 애매하지 않았다. 그 하얀 가루는 영숙의 손에서 결심의 색이었다. 영숙은 태국의 턱을 억센 손으로 벌리고, 남은 가루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죽어. 죽어라.”


욕이 아니었다. 주문이었다.


태국의 몸이 몇 번 크게 요동치더니, 탁한 숨통이 기괴한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살의는 이렇게 완성된다.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마지막에는 과하게.


방 안이 고요해졌다. 고요해진 뒤에야, 영숙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AM 03:41] 네 번째 방문: 세상에서 지워진 유언장 (수만)


모든 것이 끝난 고요한 새벽. 가장 서늘한 그림자가 문고리를 잡았다.


수만이었다.


오래된 문이 열리며 시퍼런 새벽빛이 방 안을 베었다.


최태국은 엎어진 채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있었다. 입가에는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목덜미에는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의 망설임과 누군가의 분노와 누군가의 계산이, 한 몸에 겹겹이 눌어붙어 있었다.


수만은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오래전부터 외워 둔 순서처럼, 시신 곁에 조용히 쭈그리고 앉았다. 태국의 품속 깊은 데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옷감이 젖어 미끈했고, 몸의 냉기가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수만은 이 집에서만큼은 길을 잃지 않았다. 욕심의 길도, 서류가 숨는 길도, 사람 목숨이 값으로 바뀌는 길도.


이현이 원했던 백지 위임장. 그리고—서하가 봤던 그 서류 봉투.


수만이 봉투를 뜯어 문장을 확인한 순간, 입꼬리가 아주 조금 비틀렸다. 웃음도, 분노도 아니었다. 확인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이 늙은이는 죽어서도 사람을 움직이는구나.’


그 문장은 유언장이 아니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묶어두는 사후(死後)의 장치였다. 태국은 자신이 죽으면 남은 짐승들이 돈을 차지하기는커녕, 서로의 목을 물어뜯다 자멸하도록 덫을 세팅해 두었다.


살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살아있는 인감이었고, 인감보다 더 무서운 것은 괴물이 남긴 사후의 문장이었다.


수만은 서류를 두 번 접었다.


그리고 자신의 안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이현의 명령조차 모르는 척, 아주 깔끔하게.


그 순간, 150억의 행방을 결정지을 유언장은 세상에서 증발했다.


그 내용을 아는 것은 이제 셋뿐이었다. 죽은 최태국, 울며 돌아간 서하, 그리고 서류를 품은 수만. 하지만 ‘어디에 숨었는지’까지 아는 것은—이제 수만 하나였다.


수만은 방안을 천천히 훑어봤다. 자기가 남겨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과, 누군가에게 일부러 보이게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그는 다 알고 있었다.


약봉지 조각, 발자국, 숨이 끊긴 침대, 구겨진 이불. 그는 일부러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았다. 대신 정리될 방향만 남겨두었다.


수만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전처럼 복도 끝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날이 밝으면 사람들은 텅 빈 금고를 보고 울부짖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공포는 금고가 아니라, 오늘 밤 누군가의 안주머니로 사라진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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