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흙의 아들들

28장. 최후의 만찬 — "왕관이 씌워지는 밤"

by 진동길

7편: 밀레니엄의 제물 (1999.12.31 ~ 2000.01.01)


28장. 최후의 만찬 — “왕관이 씌워지는 밤”



[PM 06:00]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눈보라


1999년 마지막 날, 좀처럼 눈 구경하기 힘든 남녘 끝 해원에도 낮부터 눈이 오려는 기척이 있었다.
하늘이 낮게 깔리고 바람이 뺨을 긁었다. 사람들은 그 기척만으로도 무릎을 움찔했고, 장터의 천막은 바람에 들썩였다. 이 동네에서는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눈보라가, 꼭 그만한 흉흉함을 품고 온다는 말을 믿었다.

눈은 해가 기울 무렵에야 조심스레 내리기 시작했는데,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눈은 말의 끝을 끊지 않았다.


눈은 낮게, 오래, 끈질기게 내려앉았다. 해원천 둔덕이 하얗게 바뀌고, 읍내 골목이 하얗게 바뀌고, 사람들의 신발 바닥이 하얗게 젖었다. 눈이 길을 막으면 사람은 더 가까운 데서 서로를 물어뜯는 법이라, 그날 저녁 국밥집은 유난히 일찍부터 김이 났다.


정 할매 국밥집 가마솥에서는 뼈를 오래 고운 국물이 뽀얗게 끓었다. 솥뚜껑 가장자리에서 물방울이 “툭” 떨어질 때마다 김이 더 진해졌다. 숟가락이 그릇을 때리는 소리, 소주병이 탁자에 닿는 소리, 젓가락이 수육을 더듬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채웠다.


국밥집 사람들은 국밥을 먹는 게 아니라, 세상을 먹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인사를 해야 하니 눈을 피하고, 국밥을 떠먹으면서도 귀는 남의 말에 붙어 있었다. IMF가 지나간 뒤 사람들의 귀는 더 예민해졌다. 밥값이 아니라 목숨값이 오르내리던 시절이었다.


“눈 온다. 이 남쪽 바닥에 이래 무섭게 눈이 쏟아지는 건 내 평생 처음 본데이.”

누군가가 한마디 했다. 단순히 날씨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백 년 만에 쏟아지는 이 기괴한 폭설이 필시 무슨 큰일의 징조라는, 짐승 같은 예감이었다.

“백 년 만에 눈이 와도… 내일 아침 고시는 뜬다 카대.”

술기운 섞인 목소리가 툭 던졌다.


그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국밥집 안의 숟가락 소리가 잠깐 느려졌다. 사람들은 “고시(告示)”라는 단어에 늘 한 번 더 숨을 삼킨다. 고시는 밥보다 무겁다. 고시는 사람의 집을 옮기고, 사람의 이름을 지우고, 사람의 땅을 바꾼다.


“뭔 고시고.”


한쪽 구석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던 노인이 툭 내뱉었다. 말끝이 굳었다.


“땅… 그거 산 24번지 그기라.”


산 24번지.
그 말이 나오자 국밥집 안은, 마치 누가 숟가락을 한 번 더 떨어뜨린 듯, ‘또각’ 하는 울림이 지나갔다. 산 24번지는 이 읍내에서 ‘땅’이기 전에 ‘사람’이었다. 그 산비탈 판잣집들, 겨울마다 연탄가스 냄새와 젖은 이불 냄새가 섞여 나오던 곳. 아이들 콧물이 얼어붙고, 장작이 떨어져도 버티는 사람들이 있던 곳. 거기엔 늘 갈 곳 없는 자들이 먼저 모여 살았다. 갈 곳 없는 자들이 먼저 모이면, 돈 냄새 맡은 자들이 나중에 모여든다.


“기공식 한다 카더라.”

누군가가 말했고,

“기공식이 뭔 기공식이고. 군청에서 용도 변경 고시 뜨면 끝이라 카더라.”

누군가가 받았고,

“끝은 누구한테 끝이고. 누구한테 시작이고.”

누군가가 낮게 중얼거렸다.


말이 오가면서도 사람들은 국밥을 떠먹었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제 불행을 말할 때 배가 고프고, 남의 행운을 말할 때 더 배가 고프다. 국밥집에는 한숨이 없지 않았다. 다만 그 한숨은 예전처럼 길게 늘어지지 않았다. 대신 짧아졌다. 짧은 한숨은 곧 계산으로 변한다.


“그 24번지, 내일 넘어가뿌면… 우리 동네는 이제…”


말끝을 맺지 못한 입술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 대신 국물을 한 숟갈 더 떠먹었다. 뜨거운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도, 가슴 한복판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밖에서는 눈이 더 굵어졌다.
눈은 하얗게 내렸지만, 국밥집 안에 번지는 냄새는 하얗지 않았다. 기름과 술과 욕망의 냄새가, 마치 말의 김처럼, 천장에 달라붙어 있었다.




[PM 09:30] 짐승들의 아가리


읍내의 민심이 펄펄 끓는 국밥 솥결처럼 요동치고 있을 때, 그 모든 파국의 진원지인 해원장 대저택은 거대한 폭설에 갇힌 채 기괴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발목을 훌쩍 넘긴 눈은 해원장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을 끊어놓았고, 거대한 기와집은 하얀 고립 속에서 섬처럼, 혹은 거대한 무덤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눈은 소리 없이 내려앉았는데, 집 안에서는 소리가 지나치게 많았다.


안채 대청마루와 이어진 널찍한 거실.
산 24번지 기공식 전야를 축하한다며 차려진 만찬상 위에는 숯불에 그을린 최상급 쇠고기와 돔배기, 그리고 값비싼 양주병들이 핏빛 융단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기름진 고기 누린내와 독한 알코올 냄새, 사내들이 뻐끔뻐끔 뿜어대는 탁한 담배 연기가 뒤엉켜 방 안 공기는 숨이 턱 막힐 듯 끈적했다.


“크으! 회장님, 마침내 내일 아침이모 그 골칫덩어리 산 24번지가 황금알 낳는 거위가 됩니데이. 참말로 욕보셨심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박 군수가 고기 한 점을 아귀아귀 씹어 삼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옆에 앉은 해원 경찰서장도 기름기 번들거리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라지예. 여태 철거민 그 독한 것들 싹 밀어낸다꼬 우리 기백이 상무가 고생 안 많았습니꺼. 용역 아들 풀어가… 뭐, 지저분한 일은 다 끝났고예. 자, 이 잔은 우리 기백이 상무한테 먼저 올립시더!”


기백은 말없이 잔을 받았다. 유리잔이 손바닥에서 미끄러졌다가 다시 잡혔다. 그는 한 모금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술이 내려가도 속은 타들어갔다.


‘산 24번지.’
그 단어가 입에 오를 때마다 기백의 굵은 목대뼈가 파도처럼 울렁거렸다. 그 땅은 그저 돈이 아니었다. 행방불명된 친어미 윤 씨가 마지막으로 자기 이름을 걸어두었던 자리. 기백에게는 건드리면 피가 솟는 아킬레스건 같은 땅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땅은, 남의 피와 눈물과 불법의 서류로 값이 붙어, 아비의 잔칫상 위에서 가장 번쩍이는 안주가 되어 있었다.


기백이 술을 비워내는 동안, 그 건너편에서 이영숙이 과일을 깎고 있었다. 화려한 공단 한복. 매끈한 머리. 손끝에 쥔 은장도가 사과 껍질을 뱀의 허물처럼 길고 날카롭게 저며냈다. 영숙은 안주인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눈은 안주인의 눈이 아니었다. 사냥감이 되는 자의 눈이었다.


최태국의 옆에 바짝 붙어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영숙은 본능적으로 썩은 내를 맡고 있었다. 영감의 눈빛이 예전 같지 않다. 내일 아침 군청에서 ‘용도 변경 고시’가 뜨고, 그 순간부터 판이 완전히 다른 ‘진짜 권력자들’이 들어오면, 자신은 과거의 꼬리표가 된다. ‘술집 마담 출신 비서’라는 흠집.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흔적.


그들은 겉으로는 최태국의 만수무강과 해원장의 영광을 위해 축배를 들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모두 같은 소리를 내며 굶주린 침을 삼켰다.


— 살아 있든 죽어 있든, 내일 그 ‘서류’를 쥐는 자가 누구냐.


방구석 가장 어두운 곳에서 술병을 들고 대기하던 강수만은, 짐승들의 그 역겨운 아가리를 텅 빈 동공으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수만의 눈에는 축배의 흥도, 부러움도 없었다. 그저, 이 집의 공기가 어디까지 썩어갈지 가늠하는 짐승의 무감한 눈빛만 있었다.


밖에서는 눈발이 더 굵어졌다.
눈이 집을 가두면, 집 안의 욕망은 더 크게 부풀었다.




[PM 10:15] 문장으로 완성된 살의(殺意)


같은 시각, 백 년 만의 눈발이 흩날리는 서울 강남의 레지던스.
해원장의 끈적하고 역겨운 공기와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차갑고도 무균실 같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이현은 흠잡을 데 없이 다림질된 셔츠 차림으로 가죽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 크리스털 글라스 안의 얼음이 맑은 소리를 내며 녹아가고 있었다. 얼음이 녹는 소리만이 시간을 재고 있었다.


그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오늘 밤이다” 같은 천박한 말은, 스스로 세운 ‘이성의 제국’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현의 폭력성은 언제나 그 얼음장 같은 무심함에서 나왔다. 직접 칼을 들지 않는 대신, 칼이 들리도록 공기를 바꾸는 방식.


이현은 노트북 화면을 잠시 응시했다. 화면에는 산 24번지 개발 관련 자료가 띄워져 있었다.
그는 호출기(삐삐)와 연동된 단말기에 손을 가져갔다. 단 한 줄.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문장.


[내일 해원 산 24번지 용도 변경 고시 예정. 시행권 양도 각서/인감 동선 확인.]


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현은 얼음물을 한 모금 머금으며 천천히 삼켰다. 문장 하나가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손목을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야만은 직접 명령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라, “확인”이라는 단어에서 태어나는 법이었다.




[PM 10:40] 엇갈린 불꽃과 벼려진 칼날


이현의 차가운 문장이 전송될 무렵, 해원장 아래 산 24번지. 낡은 비닐하우스들이 옹기종기 붙어 선 공터 한가운데는 성난 사람들의 열기로 터질 듯 달아올라 있었다.


눈이 시릴 만큼 독한 시너(thinner) 냄새가 훅 끼치는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녹슨 드럼통에서는 버려진 장작들이 매서운 기세로 타오르며 시뻘건 불티를 날리고 있었다. 얼굴에 피딱지가 앉은 철거민 덕배를 위시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쇠파이프와 나무토막을 쥐고, 당장이라도 해원장으로 뛰어갈 듯 광분하고 있었다.


“내 오늘 그 영감탱이 집구석에 불을 싸지르고 다 같이 타 죽을 깁니더! 다 비키소!”
“참으라 안 카나! 이러모 우리 다 징역 산데이!”


흥분한 사내들과 그들을 뜯어말리는 사람들이 드럼통 주위에서 무섭게 엉켜 붙었다. 아수라장이 된 공터 한가운데, 드럼통과 판자 바리케이드 앞을 굳게 막아선 것은 서하였다.


서하는 말이 많지 않았다. 말이 길어지면 불은 더 커진다는 걸, 그는 이미 여러 번 배웠다. 그래서 그는 먼저 사람들의 눈을 보았다. 눈은 늘 말보다 먼저 칼을 꺼낸다.


“도련님은 당장 비키소!”
덕배가 악을 쓰며 서하의 멱살을 잡아채고 밀어붙였다. 서하가 물러서지 않고 덕배를 맞받아 버티는 순간, 두 사람의 몸이 뒤엉키며 불타는 드럼통을 거칠게 들이받았다.


우당탕! 콰아앙!


육중한 드럼통이 크게 휘청이더니, 타오르던 장작개비와 시뻘건 숯덩이들이 두 사람의 몸 위로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아아악!”


짧고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숯덩이가 덕배의 팔뚝과 서하의 소매 위로 엉겨 붙으며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살이 눋는 역겨운 냄새가 매서운 바람을 타고 훅 끼쳤다. 주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달려들어 눈 뭉치와 두꺼운 솜이불로 두 사람을 덮어 내리쳤다.


불길은 금세 꺼졌다. 하지만 서하의 손등과 덕배의 팔뚝은 이미 시커멓게 그을려 진물이 번들거렸다. 덕배는 이를 악물고 신음했고, 서하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고통이 아니라—자기가 만든 장면이 너무 똑똑히 보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살리려다, 누군가를 불 속으로 밀어 넣는 순간.


서하가 덕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손가락 끝이 뜨끔거렸지만, 놓치면 끝이라는 듯 움켜쥐었다.


“아저씨.”


덕배가 피딱지 앉은 눈으로 서하를 노려봤다. 서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를 더 낮췄다. 낮은 목소리는 칼을 누그러뜨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먼저 죽어요.”
“불 지르면, 그 사람은 안 죽을 수도 있어요. 대신 우리는 확실히 끝나고요.”


덕배의 입가가 비웃음처럼 일그러졌다.


“끝이라… 인자 우린 진즉 끝났데이.”
“아니요.”


서하가 고개를 저었다. 단호하게, 그러나 애원하듯.


“끝난 게 아니에요. 끝나게 만들지 마세요.”
“춘식 아저씨도… 맞아서 쓰러졌잖아요. 지금 병원에 누워 있어요.”
“아저씨까지 여기서 타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누가 지켜요.”


덕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흔들리는 눈동자 한가운데, 분노 말고 다른 게 잠깐 고개를 들었다. 오래된 두려움이었다.


서하는 덕배의 팔뚝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았다. 타는 살 냄새. 사람을 사람에서 떼어내는 냄새. 그 냄새 앞에서 서하는 순간 말끝이 무너졌다.


“제발… 제발 좀… 그만합시다.”


덕배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니는… 니는 그 영감 새끼 아들 아이가!”


“맞아요.”


서하가 숨을 한 번 삼켰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이 자리에서 그가 가진 마지막 무기였다.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빼앗은 건 집이에요.”
“목숨까지 빼앗게 두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 닮아가는 겁니다.”


말이 너무 곧으면, 도리어 칼이 된다. 서하는 제 말이 칼이 되지 않게 하려고, 마지막 문장을 짧게 끊었다.


“살아서… 욕하세요.”

“살아서 끝까지 버티세요.”


그때, 서하의 눈물이 한 줄기 떨어져 그을음 묻은 뺨을 타고 흘렀다. 그 눈물은 뜨거운 불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서하 자신에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살아야지예….”


덕배가 멈칫했다. 사람들의 쇠파이프도, 나무토막도, 잠깐 허공에서 힘을 잃었다. 눈발이 더 굵어졌다. 불씨 위로 하얀 눈이 내려앉았다. 드럼통 속 장작은 여전히 탔지만, 공터의 소란은 한 호흡 늦어졌다.


서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덕배의 손에서 파이프를 뺏지 않았다. 뺏으면 다시 싸움이 된다. 대신 덕배의 팔뚝에서 흐르는 진물을 손바닥으로 눌러 막았다. 살이 타들어가도, 사람은 손을 붙잡아야 멈춘다.


불은 꺼졌다.
정확히는, 불이 꺼진 척 했다.


드럼통 속 장작은 여전히 타올랐고, 사람들 속의 분노도 여전히 끓었다. 다만 눈이 더 굵어져서, 불티가 날아갈 길이 잠깐 막혔을 뿐이었다. 서하는 덕배의 팔뚝에 번지는 진물을 손바닥으로 눌러 막았다. 살이 타는 냄새가 손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냄새는 이상하게도—
‘살아야 한다’는 말보다 먼저, 인간을 흔들었다.


서하가 몸을 더 낮췄다. 울먹이는 소리는 삼키고, 숨으로만 부탁했다.


그 순간, 공터 위로 내려앉던 눈발이 한 번 크게 휘돌며, 모든 소리를 두툼하게 덮어버렸다. 소란이 사라지자 남는 건 하나뿐이었다.


기계처럼 규칙적인 무엇.
심장 박동기 같은.




그와 같은 시각.
진주 시내의 한 대학병원 중환자실.


여기에는 눈도, 불도 없었다.
대신 소독약 냄새가 있었다. 살을 태우는 냄새가 아니라, 살을 ‘지워버리는’ 냄새였다. 고요 속에서 기계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삐—. 삐—. 삐—.


유라는 병상 옆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춘식은 산소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었다. 눈꺼풀은 움직이지 않았고, 손가락은 마치 오래된 쇳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기백의 용역들에게 얻어맞아 남은 보라색 멍이 팔과 목, 옆구리까지 얼룩져 있었다.


유라는 그 멍을 보면서도 눈을 찌푸리지 않았다.
손수건으로 아버지의 손등을 천천히 닦았다. 닦는 속도가 일정했다. 울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울음이 이미 지나가버린 얼굴이었다.


그때 유라의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짧게 울렸다.


위잉—.


휴대폰 화면에는 단 세 줄이 떴다. 보낸 사람은 이름이 아니라 직책으로 저장돼 있었다.


[하 차장 라인 / 수사관]


[내일 09:00, 최태국 및 해원장 명의 CD·무기명 채권 일괄 조회 완료.]
[동일 시각, 번호 기반 동결 처리 진행.]
[이의제기 불가. 내부 결재 완료.]


유라는 휴대폰 화면을 다시 보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전원을 껐다. 아니, 껐다는 말도 맞지 않았다. 화면을 뒤집어 놓았다. 빛을 숨기는 쪽으로.


검은 유리 위에 형광등이 한 줄로 누웠다. 그 빛이 마치 차가운 칼날 같았다.
유라는 그 칼날을 손바닥으로 덮어 눌렀다.


“이제는… 움직이지 않아.”


그 말은 돈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작았다.
작아서 더 분명했다.


딸깍.


그때였다.
병실 바깥 복도의 끝, 간호사 스테이션 TV에서 새해 특집 광고 음악이 아주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세상이 축하를 준비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유라는 축하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띵.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 유라의 머릿속에서 한 문장이 마지막으로 정리됐다.


‘해원장은 오늘 밤, 돈 때문에가 아니라… ‘허락’ 때문에 무너진다.’



[PM 11:30] 살아있는 인감


밤 11시 반.
취기가 오른 박 군수와 경찰서장이 비틀거리며 사랑채 객실로 물러가자, 거실은 갑자기 넓어졌다. 넓어진 만큼 공기가 비었다. 눈보라가 기와 끝을 핥는 소리만 ‘스읍’ 하고 들렸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최태국이 남아 있었다.
등 뒤로는 굳게 닫힌 안방 문. 그 문 안에 금고가 있고, 금고 안에 종이들이 있고, 그 종이들 위로 이 읍내 사람들의 숨이 눌려 있었다.


태국은 말없이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기도 전에—담배 끝이 손가락 사이에서 한 번 떨렸다. 늙은 손이 아니라, 늙은 욕망이 떨리는 것 같았다. 태국은 라이터를 켜 담배 끝을 물었다.


딸깍.
불꽃이 잠깐 살아났다.

그 순간, 기백과 영숙의 눈동자도 같이 번쩍였다. 불빛은 늘 사람의 속을 비춘다. 태국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는 연기를 천천히 들이마신 뒤, 길게 뿜었다.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가다가, 샹들리에 유리 조각들에 부딪혀 깨진 빛처럼 흩어졌다. 거실은 잠깐—무균실처럼 고요했다.


“……다들 눈깔에 힘 빼라.”


태국이 낮고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끝에 술이 아니라 쇳가루 같은 게 묻어 있었다.


“살기(殺氣)가 아주 뚝뚝 떨어지는구만.”


그는 품속을 뒤적이더니, 불룩한 서류 봉투 하나를 거실 바닥으로 툭 던졌다.


툭.
봉투 입이 살짝 벌어지며 만 원권 지폐 다발이 핏빛 융단 위로 촤르륵 흩어졌다. 빳빳한 종이들이 마치 생선 비늘처럼 번들거렸다. 기백의 턱 근육이 움찔했고, 영숙의 숨이 한 번 끊겼다.


태국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
그리고 불꽃이 달아오른 담배 끝으로, 바닥에 흩어진 지폐 위를 툭—툭— 가볍게 쳤다. 재가 떨어져 지폐 위에 내려앉았다. 한 장 한 장이 재를 뒤집어쓰듯 더러워졌다.


“와. 150억이 이딴 종이 쪼가리일 줄 알았나?”


태국이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이빨이었다.


“주워라. 개새끼 모양으로 꼬리 치면서 주워봐라.”


그는 지폐 더미를 구둣발로 한 번 밟았다.
지폐가 구겨지며 납작하게 울었다. 돈이 사람의 체면을 벗기는 소리였다.


“니들 눈깔에 지금 뭐가 뵈노. 내가 뒤지면 저 안방 금고가 니들 차지 될 줄 아나?”


태국은 담배를 문 채, 왼쪽 가슴팍 안주머니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두 번. 세 번.
마치 그 안에 심장이 아니라 도장이 박동하는 것처럼.


“진짜 3,000억은 금고 안이 아니라… 내 품에 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영숙의 손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
기백은 고개를 숙였는데도, 목 뒤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태국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연기가 기백과 영숙 사이로 흘러가며, 두 사람의 얼굴을 잠깐 가렸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태국의 말이 더 또렷해졌다.


“내일 아침, 군수 도장 찍히기 전에 이 애비 ‘인감’이 안 찍히면… 저 금고 안의 서류들은 다 휴지 쪼가리 되는 기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문질러 껐다.
지익—
불이 죽는 소리.
그 소리에, 기백과 영숙의 속에서도 뭔가가 같이 죽었다.


“그 전까지는… 이 집구석 반경 십 리 안에 있는 모든 게 내 허락 없이는 숨도 못 쉰다. 알았나.”


태국은 한 번도 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칼로 찌르는 게 아니라, 숨통을 조이는 법을 아는 자의 말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안방 문으로 갔다. 문고리를 잡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눈 올 때는… 피도 소리 안 난다. 잘들 자라.”


그리고 문이 닫혔다.


철컥.
철컥.
철컥.


자물쇠가 세 번 연속 잠기는 소리가 거실에 박혔다.
마치 “이제부터는, 사람 말이 아니라 쇠가 말한다”는 선언 같았다.


거실에 남겨진 기백과 영숙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보면—자기 눈 속에 있는 것을 상대가 볼까 봐.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태국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내일 아침 ‘살아있는 인감’을 누가 먼저 손에 쥐느냐. 그게 왕관이었다.




[AM 12:00]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시간


띡, 톡

띡, 톡

띡, 톡


새 천 년을 알리는 TV 속 카운트다운이 사랑채 어딘가에서 흐릿하게 새어 나왔다. “열… 아홉… 여덟…”
그 숫자들은 축제가 아니라 장례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거실의 시계추가 흔들렸다.
틱, 톡.
틱, 톡.
그 소리가 눈보라 소리와 섞여, 마치 큰 짐승의 이빨이 부딪히는 것처럼 들렸다.


기백이 먼저 움직였다.
지폐가 흩어진 바닥을 밟지 않으려고 한 걸음 옆으로 비켜 갔다. 그러나 그게 자존심인지—미신인지—그 자신도 몰랐다. 발끝이 융단을 스쳤고, 그때 바닥의 지폐 한 장이 바람에 살짝 들렸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마치 누군가의 혀가 잠깐 내밀렸다 들어간 것처럼.


영숙은 지폐를 주워 담지 않았다.
대신 손톱으로 제 손바닥을 한 번 긁었다. 살이 얇게 일어섰다. 아프지 않았다. 아픈 건 이미 다른 데 있었다.


수만은 거실 한구석에서 병을 정리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병이 아니라 문을 보았다. 안방 문. 그리고 그 문 너머의 금고. 그리고 금고 너머의 종이. 종이 너머의 사람 목숨들. 수만의 동공은 텅 비어 있었는데, 그 텅 빈자리에 가장 날카로운 계산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들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질 때, 복도는 이상하게 길어 보였다.
폭설 때문에 저택이 더 고립될수록, 복도는 더 깊어졌다. 마치 집이 아니라 짐승의 뱃속처럼—어디로 가도 바깥이 없는.


방 문들이 하나씩 닫혔다.


누가 먼저 스위치에 손을 뻗었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다만 불이 꺼지는 순간, 거실 한가운데 흩어진 지폐들이 마지막으로 번들거렸다가—물속처럼 어두워졌다. 그때부터 이 집의 숨은, 전부 문 뒤로 숨어버렸다.


그 찰나, 현관 쪽에서 바람이 한 번 밀려들어와, 눈가루가 문틈으로 가늘게 흘러 들어왔다. 그 하얀 가루가 거실 바닥에 떨어지자, 누군가의 구두가 그 위를 밟고 지나가며 검은 발자국을 남겼다. 사건은 그 발자국을 따라, 조용히 시작됐다.


사각.
사각.
사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눈 내리는 밤에 너무 또렷했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사이로—어디선가 아주 작은 소리가 섞였다.


딸깍.


라이터 불 켜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약병 뚜껑을 여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서랍 안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집에서 자정은 새해가 아니라, 첫 번째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새 천 년의 첫 분(分).
해원장 대저택은 숨을 죽였다.
눈이 쌓이는 속도만큼—누군가의 결심도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용함이, 곧 참사가 될 것이었다.
소란 없이.
아주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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