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장. 새 천 년의 아침 — "텅 빈 금고, 파쇄되는 증거들"
2000년 1월 1일. 새 천 년의 해가 끝내 떠올랐다.
백 년 만의 폭설이 덮고 간 해원은 눈이 부시도록 하얬다. 지붕도, 마당도, 비탈길도, 온 세상이 죄를 사면받은 듯 순백으로 번들거렸다. 그러나 해원장 안채에서 터져 나온 짐승의 비명은 그 깨끗한 아침을 단숨에 찢어 핏빛으로 갈라놓았다.
“아아아악! 회, 회장님이…!!”
가장 먼저 안방 문을 연 것은 영숙이었다.
그 비명은 죽은 지어미를 향한 애통이 아니었다. 밤새 식어버린 괴물의 시신보다, 괴물의 품을 아무리 뒤져도 끝끝내 나오지 않은 ‘인감’과—누군가 이미 손을 댄 듯 활짝 열려버린 ‘텅 빈 금고’를 마주한 자의 순수한 절망이었다.
경찰이 들이닥쳤고, 노란 폴리스 라인이 안방을 둘러쳤다.
기백은 시신을 보지 않았다. 그의 핏발 선 눈은 오직 금고 안만 향했다.
금고 안에는 150억 원어치의 무기명 CD(양도성 예금증서) 다발이 빳빳하게 남아 있었다. 돈은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의 주인을 결정할 유언장, 위임장, 그리고 인감도장이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있었다.
돈은 남았는데, 돈을 움직일 손이 사라졌다.
“어느 놈이고… 어느 새끼가 애비 숨통을 끊고, 서류를 빼돌렸노!!”
기백이 사냥개처럼 울부짖으며 영숙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영숙은 발버둥 치며 기백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 천하의 호로새끼야! 니가 밤새 쥐어짜 죽인 거 아이가! 저 영감 목덜미에 난 시퍼런 손자국이 니 놈 손바닥 아이가!”
어젯밤, 안방을 드나들며 서로 다른 독과 계산을 밀어 넣었던 자들이 날이 밝자 서로를 완벽한 살인마로 지목하며 물어뜯기 시작했다. 바닥에 남은 찻잔의 자국, 흙 묻은 구두 발자국, 뒤집힌 서랍과 풀린 허리끈—모든 흔적이 서로를 향해 징그럽게 얽혀 있었다.
그 방은 이제 살인 현장이 아니라, 완벽하게 설계된 덫의 증거실이었다.
가장 뒤편에서, 수만은 그 아수라장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его 안주머니에는 이 집안의 진짜 목줄이 될 ‘문장(유언장)’이 뱀처럼 똬리를 튼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같은 시각, 해원 군청 군수실.
아침 9시 정각에 ‘산 24번지 용도 변경 고시’ 결재 서류에 도장을 찍으려던 박 군수는, 전화기 너머의 보고에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뭐라꼬? 최 회장이… 변사체로 발견됐다꼬?”
박 군수의 뚱뚱한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젯밤, 안방에서 새어 나오던 기괴한 쇳소리를 모른 척했던 자신의 선택이—이제 목덜미를 잡고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공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비서실장이 사색이 되어 결재판 대신 팩스 한 장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군수님! 대검 쪽에서 공문 내려왔심더. 해원장 명의 CD 전 계좌가 범죄 수익 은닉 혐의로 싹 다 동결 조치됐답니더.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벼르고 있다 캅니다!”
박 군수의 숨이 턱 막혔다.
살인 사건에 검찰 내사까지. 어젯밤까지 달콤하던 150억은, 하룻밤 새에 만지면 뼈까지 녹아내리는 극독(劇毒)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 여기서 자신이 저 서류에 도장을 찍어 기공식을 강행한다면—자신 역시 살인의 배후이자 비자금 게이트의 공범으로 쇠고랑을 찰 것이 뻔했다.
“파쇄기… 파쇄기 가온나! 빨리!!”
박 군수는 책상 위 서류들을 미친 듯이 끌어모아 파쇄기 아가리에 밀어 넣었다.
갈갈갈갈갈—.
3,000억짜리 황금알을 낳을 거라 믿었던 종이들이, 속절없이 국수 가락처럼 찢겨 쏟아졌다.
“오늘부로 산 24번지 기공식은 취소다. 아니, 무기한 잠정 보류다! 군청은 저 썩은 땅이랑 아무 상관없는 기다. 알았나!!”
공권력은 가장 비열하고도 빠른 꼬리 자르기를 감행했다.
오전 11시. 완벽히 세팅된 줄 알았던 무대 위로, 서울에서 이현이 내려왔다.
그는 수만이 빼돌린 위임장으로 자신이 이 피 묻은 제국의 새 주인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원장 거실에서 이현이 마주한 것은, 수만이 내민 텅 빈 손이었다.
“서류는.”
“없심더. 늙은 영감이 죽기 전에 싹 다 삼켜버렸는지… 증발해버렸심더.”
이현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진짜 절망은 그다음에 왔다. 수사과장으로 빙의한 경찰서장이 굽신거리며 다가와 속삭였다.
“도련님… 박 군수가 아침에 용도 변경 고시를 전면 백지화해삤답니다. 최 회장 명의 계좌도 서울 검찰에서 싹 동결 걸어놨다 카고예.”
“……뭐라고요?”
이현의 완벽했던 이성이 쩍, 하고 금이 갔다.
용도 변경이 취소되었다—그 말은, 형 기백이 피를 묻혀 사람들을 내쫓고, 자신이 우아한 문장으로 아비를 죽이면서까지 쟁취하려 했던 산 24번지가, 다시는 아파트 한 채도 올릴 수 없는 똥값의 ‘자연녹지’로 영원히 묶여버렸다는 뜻이었다.
기백은 주먹으로, 이현은 문장으로, 영숙은 독으로—밤새 서로를 밀어 넣어 만든 탐욕의 세상이, 아침에 떨어진 행정 결재 한 장으로 허망하게 꺼져버렸다.
문장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믿었던 오만한 도련님은, 자신이 쥔 종이보다 더 거대하고 무자비한 행정 마비의 늪에 빠져 완벽한 헛발질을 한 셈이었다.
그 시각, 진주의 중환자실.
유라 역시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최태국의 피살과 산 24번지 개발 중단 소식을 접했다. 그녀의 손에서 깎고 있던 차가운 사과가 툭 떨어졌다.
복수는 성공했다. 돈줄은 묶였고 제국은 무너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카타르시스는 없었다. 자신이 법의 칼을 빼기도 전에, 짐승들은 제들끼리 독을 먹이고 목을 조르다 먼저 쓰러져 있었다. 그녀가 뼈를 깎으며 벼려온 칼날은, 정작 베어야 할 목이 스스로 부러져 내리는 바람에 허공만 가른 꼴이 되어버렸다.
유라는 텅 빈 병실에서 바람 빠진 헛웃음을 흘렸다.
누구도 이기지 못했다. 똑똑한 자도, 무식한 자도, 칼을 간 자도—모두 자기 꾀에 빠져 허우적대는, 지독한 블랙 코미디였다.
그런데—역설적이게도 이 거대한 코미디가 살려낸 생명들이 있었다.
오후 1시. 눈 쌓인 산 24번지 공터.
밤새 죽창을 들고 화염병을 끌어안은 채 불도저가 밀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던 덕배와 철거민들이, 멍한 얼굴로 텅 빈 비탈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째… 조용하노. 기공식 한다고 용역 아들이 쳐들어와야 할 시간 아이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불도저도, 포크레인도, 쇠파이프를 든 용역 깡패도 오지 않았다.
아비가 죽고, 군수가 문서를 갈아버렸고, 계좌가 묶였다. 땅이 아파트를 지을 수 없는 똥값으로 곤두박질치자—굳이 피를 묻히며 빈민들을 내쫓을 이유마저 모조리 증발해버린 것이다.
땅이 황금일 때는 짐승들이 몰려와 사람을 물어뜯었으나, 땅이 똥값이 되자 짐승들은 미련 없이 떠났다.
비로소 가난한 사람들은 그 척박한 비탈에 발을 붙이고 살아남았다.
행정의 유기가 만들어낸, 가장 슬프고도 기적 같은 방치(放置)였다.
그때, 저 멀리 눈 덮인 비탈길을 걸어 올라오는 사내가 있었다. 서하였다.
그의 가슴속에는 그날 밤, 그가 눈으로 보고도 삼켜버린 ‘저주의 유언장’이 흉터처럼 눌어붙어 있었다. 이 땅의 껍데기뿐인 합법적 주인이자, 평생 짐승 같은 형제들의 사냥감이 되어야 할 십자가.
그러나 서하의 붉어진 눈이, 낡은 판잣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와 덕배의 살아있는 숨결에 닿는 순간—
화상 입은 그의 상처 위로 뜨거운 눈물이 툭, 떨어졌다.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짓지 못하고, 아무것도 빼앗지 못했기에—
사람의 목숨만은 이 시린 겨울의 끝에서, 기적처럼 버텨내어 하얀 눈과 함께 숨을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