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 재(灰)와 문(門)
문은 대개 바깥으로 난다. 집을 나가면 세상이 있고, 세상에서 돌아오면 다시 집이 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닫는 일은 도망과 귀환 사이에서만 쓰이는 줄 알았다.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배운다. 떠나면 자유롭고, 돌아오면 안도한다고.
그러나 어떤 문은—밖으로 나가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으로 들여보낸다.
그 문은 세상에서 멀어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세상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숨길 곳을 주는 대신, 숨긴 것을 스스로 드러내게 한다. 바깥의 소란을 잠재우는 대신, 마음속 소란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문이 조용할수록 사람의 속은 더 크게 울린다. 그 울림이야말로, 수도원의 첫 공부다.
사순의 첫날, 재를 받는 날.
이마에 얹히는 것은 타다 남은 가루 한 줌이지만, 그 가루가 묻는 것은 한 생의 태도다.
“너는 흙이다.”
흙이라는 말은 위로처럼 들리기도 하고, 협박처럼 들리기도 한다. 흙은 낮고, 흙은 무겁고, 흙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은 그 말 앞에서 두 번 흔들린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서 흔들리고,
그래도 누군가의 고통을 품어야 해서 흔들린다.
수도원으로 향하는 마음은 복잡하다.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온다. 부모의 목소리, 친구의 웃음, 내가 살던 거리의 냄새, 내 이름을 불러주던 모든 사람들. 그 인연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싶다. 그 마음을 말하기가 부끄러워서, 사람은 흔히 거룩한 말로 덮어버린다. 그러나 부끄러움이 있다고 해서 없는 마음은 아니다. 마음은 늘 거룩한 결심 옆에 비겁한 숨구멍을 하나씩 달고 산다.
그렇다고 그 숨구멍만으로 문턱을 넘을 수는 없다.
넘는 순간, 알게 된다.
이건 도피가 아니라 입문이라는 것을.
세상은 ‘속된 것’이 아니다. 세상은 창조된 것이고, 선한 것으로 지어졌다. 속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쓰는 우리의 손이다. 손이 돈을 쥐면 사람을 값으로 바꾸고, 손이 권력을 쥐면 죄를 문장으로 포장하고, 손이 신앙을 쥐면 하느님을 자기 자존심의 방패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수도원은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자리다. 세상에서 눈을 감는 자리가 아니라, 세상에서 흘러나온 죄의 냄새를 더 맑은 공기 속에서 분별하는 자리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생긴다.
그 책임감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오만이 숨어 있기도 하다. 내가 누군가를 건져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내가 더 큰 가치를 위해 자신을 바친다는 자부심. 사람의 선한 마음은 자주 자기 자신을 섞는다. 그러니 재의 수요일은 잔인하게 정확하다. 한 줌 재로 사람의 큰소리를 내려놓게 한다. 내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사실부터. 구원은 하느님의 일이고, 인간은 다만 그 구원 쪽으로 발을 옮기는 존재라는 사실부터.
문은 떨리는 손을 보고도 열린다.
문이 원하는 것은 완벽한 사람의 결심이 아니라, 결심을 붙잡고 끝까지 남아있을 용기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그 문 앞에서 시작한다.
아들들의 죄와 벌은 칼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한 줌 재와, 한 줄 문장과, 한 번의 ‘허락’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허락이 누구에게 내려졌는지—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부터, 벌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