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9장 — 부서진 것들의 무게

by 진동길

9장 — 부서진 것들의 무게




끼기긱— 쿵.


문이 닫혔다.


두꺼운 참나무가 쇠 문틀에 맞물릴 때 나는 소리는, 단순한 마찰음이라기보다 거대한 무게에 가까웠다. 바깥의 소란이 단번에 잘려 나가고 안의 고독이 단단하게 굳어지는 소리.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영원히 단절되며 겹겹이 접히는 소리였다.


문은 느리고 완전하게 닫혔고—빗장이 걸리는 바로 그 찰나, 이현의 두 무릎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예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파국의 징조는 늘 그의 곁을 서성이고 있었다. 다만 이현이라는 사내는, 그 예고를 활자와 셈법으로만 읽어낼 줄 알았지 제 몸으로 받아낼 줄은 몰랐던 탓이다. 완벽하다고 맹신했던 이성의 껍데기가 증발하자, 육신이 먼저 벼랑 끝임을 알아챘다. 손을 뻗어 거친 회벽을 더듬었으나, 벽의 냉기만 스며들 뿐 몸을 일으켜 세울 힘은 한 줌도 쥐어지지 않았다.


이현은 손님방이 있는 별채 복도 바닥에 속절없이 주저앉았다.


콘크리트 위에 석회를 얇게 바른 바닥은 차갑고 견고했다. 이현은 그 위에 웅크린 채, 두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두 손을 올리고—등을 곧추세우지 못한 비루한 짐승의 꼴로—그냥 있었다.


이현이 ‘그냥 있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현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는 언제나 다음의 세 수를 먼저 생각하는 자였다. 말의 어미를 고르고, 표정의 각도를 설계하며,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해부할지부터 먼저 계산하는 자. 그런데 지금은 단 하나의 공식도 성립하지 않았다. 계산을 딛고 설 바닥 자체가 통째로 꺼져버렸기 때문이다.


수만의 그 끈적한 사투리가 아직도 귓바퀴를 파고들며 쇳소리처럼 웅웅거렸다.


‘도련님이 시작한 그 똑똑한 장난질…… 결국 내 손아귀에 쥐인 이 도장 하나로 끝난 기라예.’


이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감으면 어두워야 할 텐데, 감아도 시퍼렇게 밝았다. 수만의 투박한 손바닥 위에 놓여 있던 상아 도장의 번들거리는 광택이 눈꺼풀 안쪽에 인두 자국처럼 찍혀 있었다. 최태국(崔泰國). 세 글자. 아비가 평생 사람들의 목줄을 쥐어짜던 그 절대 반지가, 자신이 벌레처럼 여기며 살인을 교사했던 하인의 안주머니로 들어갔다.


그것은 단순히 물건 하나가 이동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현이 숭배했던 ‘합리적인 세계’ 전체가, 가장 밑바닥의 진흙탕 속으로 곤두박질치며 산산조각이 난 참사였다.


복도 끝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경당 쪽이었다. 성체등(聖體燈).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에도 홀로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붉은 불. 수도원의 그 불은 자기를 변명하지 않는다. 억울하다고 소리치지도 않는다. 그저 ‘나는 여기 있다’는 무언의 증명만이 남을 뿐이다.


이현은 그 붉은 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참담한 꼴로 주저앉아 헐떡이고 있는지—저 불빛은 낱낱이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치심이 일지 않았다. 부끄러움조차도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있을 때에나 부릴 수 있는 사치라는 것을, 철저히 붕괴된 사내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박, 저박.


발소리는 아주 조용했다.


수도원 사람들이 걷는 특유의 방식이 있었다. 바닥을 끌며 상처 내지 않고, 발바닥을 고스란히 내려놓는 걸음. 발이 닿는 순간마다 아주 미세한 정지와 기도가 섞인 걸음. 그 발소리가 이현 쪽으로 스며들듯 다가오더니 멈췄다.


이현이 핏발 선 눈을 들어 올렸을 때, 서하가 서 있었다.


서하는 제 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복도 바닥에 짐승처럼 웅크린 형을 보고도—서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이러고 있느냐고도, 괜찮으냐고도 묻지 않았다. 함부로 뱉는 섣부른 위로가 때로는 가장 잔인한 폭력이 된다는 것을, 철거촌의 흙바닥에서 이미 뼈저리게 배워온 서하였다.


서하는 그저 말없이 형의 곁에 앉았다.


이현과 똑같이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모은 채,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댔다. 두 사내의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물리적으로 닿지는 않았으나, 피가 섞인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눅진한 온도가 그 좁은 틈새로 흘렀다. 어릴 적, 폭력을 일삼던 아비의 고함 소리를 피해 같은 방 이불속에서 숨을 죽이던 그 옛날의 묵은 온도였다.


한참의 끔찍한 정적이 흐른 뒤에야 이현의 입이 열렸다.


“수만이가…… 왔었어.”


말이 낮게, 바닥의 먼지처럼 기어 나왔다.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들었다.


“아버지가 숨겼던 인감이랑…… 유언장을 쥐고 있더라.”


복도가 다시 조용해졌다. 말은 차가운 공기 속에 위태롭게 떠 있다가, 묵은 기도의 냄새에 걸려 허무하게 내려앉았다. 이현이 다시 쩍쩍 갈라진 입술을 뗐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대. 아버지가 내 서류를 눈치채고 금고에 역으로 가둬놨다는 것도…… 금고가 열리는 타이밍도, 다 알고 있었어.”


이현은 두 손을 들어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손이 얼음장 같았고 이마도 싸늘했다. 차가운 것과 차가운 것이 만나면 왜 이토록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지는지—그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이현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나는 내 잘난 머리로 수만이를 장기말처럼 움직였다고 확신했는데…… 아니었어. 나는 그저 그 새끼가 짜놓은 판 위에 서 있던 멍청한 미끼에 불과했어. 나는 이제…… 그놈한테 목줄이 꽉 잡혀 버렸다.”


서하가 그제야 이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현은 동생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캄캄한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현의 손이 이마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코트 주머니 속을 더듬었다. 서하가 건네주었던 거친 나무 묵주가 손바닥을 날카롭게 긁었다.


“그런데…… 서하야.”


동생의 이름이 복도에서 처연하게 울렸다. 이현은 그 이름 석 자를 너무 오래 잊고 살아온 사람처럼, 한 음절 한 음절을 고통스럽게 굴렸다.


“아버지를 그 단두대 위에 매달도록, 수만이 귓가에 합리적인 청소니 뭐니 하며 독을 부어 넣은 건…… 결국, 나다.”


서하의 맑은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짐승 같은 집구석에서 수만이가 어떤 멸시를 받으며 자라왔는지—나는 평생 단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어. 수만이는 그저 거기 있는 그림자였고, 나는 그걸 당연하게 부려 먹었어. 그리고 내가 내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이 집을 깨끗하게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 분노에 찬 그림자에게 살인의 명분을 쥐여준 거야. 수만이가 완벽하게 내 뜻대로 움직여 줄 거라 오만하게 믿으면서.”


이현이 짧게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폐부 깊은 곳에서 토해내는 참담한 파열음이었다.


“그놈은 내 뜻대로 움직인 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제 억울한 욕망대로 움직일 준비를 끝내고 있었지. 나는…… 그 살의의 방향이 나와 같다고 착각했을 뿐이야.”


서하는 여전히 침묵했다. 그 침묵이 경멸이나 거부가 아니라는 걸 이현은 알았다. 서하는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을 토해내는 자의 무너지는 호흡을 먼저 읽는 사람이었다.


이현은 순간, 울대뼈가 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평생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차가운 이성으로만 살아왔던 자신이, 이렇게 속절없이 목이 멘다는 사실 자체가 소름 끼치도록 낯설었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어, 서하야.”


그 말이 이성의 껍데기를 뚫고 나오는 순간, 머리로 생각할 때보다 너무 무거워서 도리어 숨이 막혔다.


“직접 늙은이 목에 손자국을 낸 건 기백이 형이고, 약을 타 먹인 건 영숙이고, 진짜 목줄을 훔쳐 달아난 건 수만이지만…… 그들이 마음껏 칼춤을 추도록 지옥의 판을 깐 건, 다름 아닌 나야.”


그의 고개가 죄인처럼 아래로 꺾였다.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아무것도 안 한 척, 손이 깨끗한 척 서 있었는데…… 그 방관의 자리가 세상에서 제일 악독하고 비겁한 자리였어. 내가…… 가장 더러운 살인마야.”


서하가 조용히, 얼어붙은 형의 손등 위로 제 따뜻한 손을 포갰다.


“형.”


“……응.”


“형의 그 완벽했던 세상이 깨졌기 때문에…… 비로소 진짜 아픔이 들어갈 틈이 생긴 거야. 자기가 지은 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온몸으로 토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흙을 딛고 일어설 수 있어.”


이현이 핏발 선 눈으로 서하를 보았다.


막내의 눈에는 도덕적 우월감이나 알량한 가르침 따위는 없었다. 비난도 없었다. 다만—같은 어미를 잃고 짐승의 집구석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피 흘리며 살아남은 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깊고 아득한 연민만이 고여 있었다.


이현이 다시 고개를 돌려 성체등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그냥 모른다고 잡아떼면 끝날 일이었어.”


“…….”


“모른 척하면, 법도 나를 어쩌지 못해. 세상 사람들도 내가 결백하다고 믿어. 나는 그 비열하게 빠져나가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아. 그냥 내 서류가 털렸을 뿐이라고, 나는 억울한 피해자라고 우기면 되는 거였어. 어제 조사실에서도 그 변명이 턱끝까지 올라왔었으니까.”


이현이 가쁘게 숨을 삼켰다.


“근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솔바람이 불었는데, 그 바람결에 묻어온 비린내가 꼭 내 속에서 썩어가는 냄새 같아서. 내 입으로 내 죄를 모른다고 거짓말할 수가 없었어.”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서하식의 가장 깊은 경청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앉아 있었다. 복도는 조용했고, 수도원의 맵찬 밤공기가 두 형제 사이에 차갑게 깔렸다. 멀리서 언덕을 타고 바다 소리가 들려왔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꼭 밤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같았다. 가까우면 심장을 옥죄는 공포가 되고, 멀면 위태로운 자장가가 되는 소리. 지금 이현이 서 있는 벼랑 끝은 그 중간 어디쯤이었다.


“서하야.”


“응?”


“너는…… 왜 이런 쓸쓸한 수도자의 길을 선택했어.”


서하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대답을 꾸며내기 위함이 아니라, 가슴 밑바닥에서 대답을 길어 올리기 위한 시간이었다.


“도망이었어요. 처음엔.”


서하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시고…… 형이 벼랑 끝에 몰리고, 기백이 형도 폭주하고. 그 모든 피비린내를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눈을 감고 숨을 데가 필요했죠.”


그가 한 번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근데 도망쳐 들어와 보니까…… 여기는 숨는 데가 아니더라고요.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크고 소름 끼치게 들려요. 내가 세상에서 뭘 피하려 했는지, 내 안에 웅크린 두려움이 어떤 모양인지. 형도 그걸 느꼈기 때문에, 오늘 무너진 거예요.”


이현은 동생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어릴 적 서하의 눈에는 타인의 고통이 너무 많이 쏟아져 들어와 늘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 눈빛은 여전히 슬픔을 가득 담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 떠내려가지 않는 굳건한 닻을 내리고 있었다. 가장 유약해 보였던 막내가, 실은 이 집안에서 가장 무거운 것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던 진짜 거인이었다.


“형.” 서하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오늘 밤은…… 아무 생각 말고 여기서 주무세요.”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것이 거절이 아니라는 것을, 서하도 알았다.




이현이 손님방으로 돌아온 것은 자정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창문을 열자, 3월의 해풍이 폐부를 밀치고 들어왔다. 이현은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았다. 해풍의 짠 냄새.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 아래 짙게 깔린, 젖은 흙의 냄새.


수도원 뒤편 텃밭의 검은 흙. 며칠 전 이현이 주저앉아 손으로 집어 올렸던 그 흙이었다. 흙은 무거웠고 차가웠고, 손금 사이로 기어이 끼어들었다. 아무리 털어내도 씻기지 않는 흙은 인간의 기억을, 그리고 지은 죄를 닮아 있었다.


그는 어둠 속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생 엘리트의 펜대와 문서를 쥐고 살아온 매끄러운 손. 아비의 제국을 도륙 낼 완벽한 올가미를 짰고, ‘확인’이라는 버튼을 눌러 살인마 수만을 움직였던 그 오만한 손.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이현은 그 지긋지긋한 떨림을 멈추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영혼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참담한 진동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아무리 거짓으로 합리화를 해도, 몸은 지은 죄를 기억하고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새벽 네 시.


정적을 깨고 코트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신경질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위이잉— 위이잉—.


길고 불길한 진동. 이현은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았으므로 첫 번째 진동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액정에 뜬 것은 저장되지 않은 서울의 지역번호였다.


“……여보세요.”


“최이현 이사님 맞으십니까.”


건너편의 사내는 이름이나 소속을 먼저 밝히지 않았다. 차갑고 고요했다. 감정을 철저히 거세한 목소리. 아니, 애초에 감정이 들어갈 자리조차 만들지 않은 쇳소리였다. 이현은 그 억양을 너무나 잘 알았다. 타인의 삶을 서류로 재단하며 살아가는 서울 법조계의 언어.


“누구십니까.”


“이민호 변호사입니다.”


이현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무릎이 꺾이지 않았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새벽 네 시의 살인적인 냉기가 오히려 그의 정신을 시퍼렇게 깨웠다.


“무슨 일입니까.”


“형님이신 최기백 씨가…… 오늘 새벽 보완 조서 과정에서 최 이사님 성함을 직접 거론했습니다.”


이현의 호흡이 순간 탁, 멎었다.


“단순한 정황 언급이 아닙니다. 이사님께서 사전에 범행과 자금 유출에 깊이 관여했다는 쪽으로…… 진술의 방향이 급격히 확장됐습니다.”


사과의 말 따위는 없었다. 사과할 이유가 없는 냉혹한 팩트의 전달. 이현은 창가로 걸어가 성에가 낀 유리에 손바닥을 짚었다. 유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안뜰에 내려앉은 달빛은 무자비할 만큼 하얗게 빛났다.


“분위기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내일 아침—아니, 오늘 오전 열 시 전까지 무조건 서울지검으로 출두하셔야 합니다.”


“지금 새벽 네 시입니다.”


“잘 압니다.”


이민호 변호사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경찰이 들이닥쳐 수갑 차고 불려가는 것과, 제 발로 출두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먼저 나서시는 편이 유리합니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뚜— 하는 기계음과 함께 액정 화면이 까맣게 죽었다. 이현은 검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파리한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기백이 조서에 자신의 이름을 팔아넘겼다.


하지만 이현은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며 분노하지 않았다. 배신은 서로에 대한 충성과 신뢰가 전제되었을 때 성립하는 단어다. 짐승들의 집구석에서 자란 기백과 이현 사이에 형제애 따위가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그들은 오직 각자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고 공모했을 뿐이다. 계산의 셈법이 달라지면 공모는 끝이 난다. 기백의 셈이 달라진 것뿐이다. 그것은 배신이 아니라, 사실 처음부터 예정된 결말이었다.


이현은 미련 없이 가방의 지퍼를 올리며 짐을 꾸렸다.

애초에 꺼내놓은 짐도 없었기에 챙길 것도 없었다. 지퍼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빈 가방을 닫는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이현은 간밤에 속절없이 허물어졌던 제 밑바닥의 시간들을 억지로 쑤셔 넣고 다시금 차가운 이성의 갑옷을 여미려 애썼다. 도망쳐 온 곳에서 아무런 구원도 얻지 못한 채, 그는 다시 숫자와 법이 얽힌 짐승들의 전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현은 건조한 숨을 한 번 삼키고는, 끝내 지퍼를 닫아걸고 방을 나섰다.


피정 구역(손님방)의 복도로 나왔다.


몇 시간 전, 자신의 오만이 박살 나며 무릎을 꿇었던 그 바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차갑고 단단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흙은 기억한다. 무엇을 심었는지, 무엇이 썩었는지.'


어릴 적 들었던 그 묵은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흙이 이현이 주저앉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서하 옆에서 방어를 내려놓았던 순간을 기억한다면—이 발걸음이 비겁한 도망인지, 죗값을 치르러 가는 감당인지도 흙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이현 자신은 아직 모를지라도.


이현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복도 끝에 굳게 닫힌 두꺼운 나무 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문 너머는 수도자들만이 머무는 봉쇄 구역(封鎖區域)이었다. 세속의 발걸음이 엄격히 금지된, 기도로만 지어 올린 영적인 영토. 서하는 지금 저 견고한 경계 너머의 작은 방에서, 몇 시간 뒤 제단 앞에 엎드리기 위해 고단한 선잠을 자고 있을 터였다.


이현은 그 경계를 넘어갈 수 없었다.


물리적인 문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짊어진 죄의 냄새가 그 거룩한 구역의 공기를 훼손할 것만 같았다.


그는 닫힌 봉쇄 구역의 문을 향해 아주 낮게, 소리 없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서하야. 나 간다.’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 굳건한 단절의 벽 너머에 서하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차가운 작별 인사가 허공을 건너 가닿는 순간이 있었다.


이현은 몸을 돌려 수도원의 무거운 쇠 대문을 양손으로 밀었다.


끼기긱—.


쇳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울렸다. 어젯밤처럼 요란하지는 않았다. 아니, 똑같이 컸을지도 모르나 이현이 그것을 듣는 방식이 달라진 것일 수도 있었다.


문을 나서자, 3월 해원의 매서운 새벽 공기가 이현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차가웠다. 매연과 매끄러운 빌딩 숲으로 가득 찬 서울의 공기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코끝으로 축축한 흙냄새가 밀려왔다. 아직 씨앗이 들어가지 않은, 모든 것을 품을 준비를 마친 생경한 논바닥의 냄새였다.


이현은 그 비릿하고 묵직한 고향의 흙냄새를 폐부 깊숙이 한 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코트 깃을 세운 채, 뚜벅뚜벅 어둠 속을 걷기 시작했다.


자신을 심판대 위에 세울, 서울행 첫 버스를 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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