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 서울의 언어
2000년 3월 11일 새벽~밤 / 서울
버스는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해원에서 떠난 시간이 새벽 다섯 시를 조금 넘겼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3월의 새벽은, 빛과 어둠이 서로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한데 엉겨 붙은 채로 있었다. 차창 밖 들판은 누렇게 마른 볏짚 그루터기만 성글게 박아 둔 채, 누군가 한 번 훑고 지나간 상처처럼 납작하게 누워 있었다. 흙은 씨앗을 받지 못한 얼굴로, 차갑고도 무심했다.
이현은 맨 뒷줄 창가에 앉아 있었다.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고, 비어 있는 자리들은 가로등 불빛이 스칠 때마다 잠깐씩 얼굴을 얻었다가 곧바로 다시 사라졌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 이현은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사람도, 죄도, 핑계도—처음에는 다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라질 줄 알았던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사람은 달라진다. 아니, 달라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흙은 기억한다.’
어젯밤 복도 바닥이 그 말처럼 느껴졌고, 지금 버스가 지나가는 이 낯선 들판의 흙들도 그 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서울로 가까워질수록 흙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스팔트가 흙을 덮고, 콘크리트 옹벽이 야산을 질러 박고, 불빛들이 늘어날수록 새벽하늘은 오히려 더 탁해졌다. 서울은 기억하기에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쌓이고 허물어지는 도시였다. 기억은 속도가 느린 것인데, 이 도시는 느린 것들을 잘 참지 못했다.
이현은 코트 주머니 속을 무의식적으로 더듬었다.
전원을 꺼둔 휴대폰의 차가운 모서리가 손끝에 먼저 걸렸다.
손가락이 습관처럼 버튼 자리를 더듬는 순간, 나무알의 거친 결이 먼저 손바닥을 긁었다. 묵주였다. 서하가 건넨 것. 손끝이 잠깐 멈추었다. 이현은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꺼내는 순간 마음이 먼저 말을 만들 것 같았다. 말이 만들어지면, 다시 예전처럼 모든 것을 ‘관리’하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지금 그 정리가 두려웠다. 그래서 묵주는 그대로 주머니 속에 남겨두고 손을 뺀 채, 창밖을 다시 보았다.
해원에서 서울로.
흙의 언어에서 법의 언어로.
바람과 소금과 기도의 냄새에서, 숫자와 계약과 형광등의 냄새로.
그 이동을, 버스가 대신 해주고 있었다.
사람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어딘가로 끌려가게 마련이다.
남부터미널은 기억보다 더 컸다.
수도원에 있는 동안 이현은 서울을 자주 떠올렸다. 강남의 아파트, 법과대학 연구실, 회의실, 검찰청 복도—그 공간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늘 단정하게 재배치되어 있었다. 그 재배치된 서울에서는 언제나 이현이 주인이었다. 그러나 막상 터미널이 입을 벌리고 사람들을 삼키는 것을 보는 순간, 기억 속의 서울이 무너졌다. 눈앞의 서울은 그저 서울이었다. 사람들의 얼굴, 짐가방, 타는 담배 냄새, 빠른 발걸음, 안내 방송의 메마른 톤. 그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준비된 도시’가 아니라 ‘나를 상관하지 않는 도시’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증명하고 있었다.
3월의 서울 공기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해원에서 맡던 공기는 차갑지만 살아 있었고, 흙과 바다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서울의 공기는 배기가스와 먼지와 아스팔트와 유리창에서 튀는 햇빛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그 냄새는 감정이 없었다. 감정이 없는 냄새. 그런 냄새가 있다는 것을, 이현은 십여 년을 마시며 살았다. 그런데 며칠 만에 돌아온 지금, 그것이 낯설었다. 낯설다는 것은 자신이 달라졌거나 도시가 달라졌다는 것인데—도시가 달라질 리 없었으므로, 달라진 것은 자신이었다.
택시를 잡았다.
기사의 눈이 룸미러 너머로 이현을 한 번 훑었다가 곧바로 앞으로 돌아갔다. 말이 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현은 말이 싫었다. 말이 많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금은 이상하게 무서웠다. 이현은 두려움을 자주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니—두려움을 두려움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두려움을 ‘리스크’라고 불렀고, 리스크는 계산하면 되는 것이었다. 계산할 수 없는 것이 두려움인데도.
차창 밖으로 한강이 스쳤다.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한강이 회색으로 보이는 것은 물이 회색이라서가 아니라, 하늘이 회색이고 빌딩이 회색이고 강변 도로가 회색이어서, 그 모든 것이 강에 겹쳐 내려앉았기 때문이었다. 흐르는 것들은 판단하지 않는다. 흐르는 것들은 그저 지나간다. 판단하는 것들은 대개 멈춰 있다. 이현은 그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수도원에서 닷새를 있는 동안, 그의 생각이 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생각이 목표를 향해 직진했다. 지금은 생각이 어딘가에 걸려 멈추었다가, 다시 흘렀다. 그 걸림이 비효율이라는 것을 이현은 알았다. 그런데 걸림이 없으면 그냥 흘러가버리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알았다.
강남으로 들어서자 유리와 간판과 자동차들이 빛을 튕기며 지나갔다.
서울은 사람의 눈을 쉬게 하지 않았다. 쉬는 순간, 뒤처진다. 뒤처지는 순간, 먹힌다. 이현은 그 질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여기에 다시 익숙해지는 순간, 수도원의 복도 바닥에 꺾였던 무릎이 ‘없던 일’이 될까 봐.
이민호 법률사무소는 테헤란로 중간쯤의 고층 빌딩 스물두 번째 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이현의 얼굴은, 서울의 빛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해원의 바람이 아직 붙어 있는 코트, 사흘 밤을 지낸 얼굴, 눈 밑의 그늘. 그는 이런 꼴로 이곳에 들어오는 것이 불편했다. 그러나 불편하다는 감각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대리석 바닥은 사람의 감각을 매끄럽게 눌러 버린다. 차갑지만 차갑다고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차가움. 표면이 반질반질해서 미끄럽고, 그 미끄러움이 도리어 사람을 안심시킨다. 이현은 이런 공간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었다. 여기서는 무릎이 꺾이지 않는다. 무릎이 꺾이면 안 되기 때문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새가 없기 때문이다.
회의실 문이 열렸을 때, 이민호는 이미 앉아 있었다.
오십 대 중반. 흰머리가 섞인 깔끔한 차림. 금테 안경 너머의 눈빛이 차가웠다기보다 투명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사안으로 보는 눈. 이현은 그 눈을 싫어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눈이 필요했다. 감정으로 사건을 보는 변호사는 이 상황에서 쓸모가 없다.
“앉으시죠.”
인사도 안부도 없이, 그 한마디로 시작했다. 이민호는 파일을 열어 책상 위에 펼쳤다. 종이 냄새가 방 안을 먼저 채웠다. 종이 냄새는 이상하게도 피 냄새와 닮은 데가 있었다. 직접 흘러나오지 않아도 사람을 움찔하게 만드는 냄새.
“기백 씨 측에서 어제 오후에 보완 진술이 들어갔습니다.”
이민호의 목소리는 보고서를 읽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최 이현 이사가 자산 포괄양수도 계약서를 작성했고, 강수만에게 ‘해원장 문제를 정리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현은 파일을 바라보았다.
파일 안에 자기 삶이 들어 있었다. 아니—자기 삶 중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만 깔끔하게 잘려 들어 있었다. 삶은 법보다 크지만, 법 앞에서는 삶이 아니라 증거만 남는다. 증거로 환원된 삶은 어떤 표정을 하는가. 이현은 잠깐 그 생각을 했다.
“근거로 제출한 건 두 가지입니다. 통화 녹음, 문서 사본.”
이민호가 종이를 넘겼다. 넘기는 소리가 짧고 마른 소리였다.
“녹음 내용 자체는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통화 시점이 사건 전날이라는 점, 그리고 이사님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점이 검찰이 활용할 여지를 줍니다.”
이현은 숨을 들이마시지 않았다.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
수만이 말했다. 녹음이 있다고.
그 말이 서울의 깨끗한 회의실 한복판에서도 끈적하게 살아 움직였다. 바닥에서 자란 말은 유리와 대리석 위에서도 죽지 않는다.
이민호가 눈을 들었다.
“현재 상황을 정리하겠습니다. 기백 씨 진술이 확장되면서, 공동정범 방향으로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현 단계에서 직접 증거는 없습니다. 이사님이 물리적 행위에 가담했다는 증거도, ‘해를 가하라’는 직접 지시도 없어요.”
그는 손가락으로 문서의 한 줄을 짚었다.
“문제는 이 문서와 맥락입니다. 이사님이 작성한 자산 포괄양수도 계약서—그게 실행됐다면 최태국 씨는 법적으로 무일푼이 됩니다. 검찰은 이걸 ‘피해자를 경제적으로 무력화시킨 선행 행위’로 해석할 수 있어요. 살인의 동기를 마련한 구조적 행위로.”
구조적 행위.
그 말이 이현의 가슴에 박혔다. 수도원 복도에서 혼잣말처럼 뱉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판을 만든 건 나야.
양심이 쓰는 말과 법이 쓰는 말은, 종종 같은 자리에 다른 이름으로 서 있었다.
“전략은요.”
이현이 물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세 가지입니다.”
이민호는 잠깐도 망설이지 않았다.
“첫째, 문서 작성은 정당한 사업적 행위였고, 이후 발생한 폭행·독살과 인과관계가 없다는 논리. 둘째, 기백 씨 폭행과 영숙 씨의 독 투입은 독립적으로 실행된 행위임을 강조. 셋째—강수만이 인감과 유언장을 탈취한 행위가 사건의 실질적 중심이라는 점을 부각합니다. 이사님이 아니라 강수만이 목줄을 가로챘고, 이사님은 사후에 알았다는 구도로.”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민호의 전략은 정확했다.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이었다. 이현은 그 전략이 유효하다는 것도 알았고, 그 전략이 ‘전부의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이현에게는, 지금 ‘이기는 것’과 ‘말을 멈추는 것’이 같은 방향이라는 사실이 더 참담했다.
“영숙 씨는요.”
이현이 물었다.
“독성 분석이 확정되면 기소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현재 소재 파악이 안 되고 있어요.”
이민호가 고개를 들었다.
“이사님, 영숙 씨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짧고 확실하게 나왔다.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현은 자기 입에서 나온 그 ‘모릅니다’가, 이상하게 가벼운 말처럼 느껴졌다. 가볍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오래 ‘모르기로’ 해온 것들 앞에서 사람의 말이 가벼워진다는 뜻이었다. 이현은 영숙을 몰랐다. 아니, 영숙을 알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 여자는 아버지의 선택이었고 아버지의 것이었으니까. 그 ‘아버지의 것’이라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비겁함이 들어 있었는지—이현은 지금에서야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났을 때는 점심을 넘긴 시간이었고, 이현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몸이 허기를 느끼기 전에, 마음이 먼저 고장 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동안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현은 잠깐 멈칫했다. 새벽 네 시, 수도원에서 걸려온 전화가 떠올랐다. 모르는 번호에서, 삶이 바뀌는 말이 오는 밤. 그는 그 기억이 싫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최이현 씨 되십니까.”
낮고 건조한 목소리. 해원경찰서. 강 형사였다.
이현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복도 창가 쪽으로 걸어가 섰다.
유리창 너머로 테헤란로가 내려다보였다. 차들은 쉬지 않고 지나가고, 사람들은 빠르게 건너고, 빌딩들은 서로의 하늘을 잘라먹고 있었다.
“예, 저입니다.”
“어제 조사 이후 연락이 안 되어서요. 서울 올라가셨습니까.”
“예.”
“언제 다시 내려오실 예정입니까.”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전화 너머로 잠깐 침묵이 있었다.
수도원의 침묵은 기다리는 침묵이었는데, 이 침묵은 재는 침묵이었다. 이현이 말하지 않은 것의 무게를, 침묵으로 달아보는 침묵.
“최이현 씨.”
“예.”
“그 집에 오래 있던 여자—알죠.”
질문 부호가 없었다. 물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이현의 발이 멈췄다. 아니, 이미 멈춰 있었다. 다만 그 멈춤이 이제 몸까지 내려왔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목소리를 관리하려는 습관이 먼저 나왔다. 습관은 위험할 때 더 빨리 움직인다.
“이영숙 씨. 후처.”
“알죠.”
짧게 말했다. 말이 짧을수록 여백이 생기고, 여백은 상대가 들어오는 문이 된다. 강 형사는 그 여백을 놓치지 않았다.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습니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구치소 들어가기 전에 만나셨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묻는 겁니까.”
강 형사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사건 이후에 자취를 감췄습니다. 해원에도 안 계시고, 연락처도 없습니다. 호적에 등록된 번호도 없고요.”
“저도 모릅니다.”
“최이현 씨.”
“예.”
침묵이 다시 왔다.
그 침묵이 이현의 귀 안에서 천천히 질문으로 자라났다. 말로 하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는데, 침묵으로 하면 구멍이 없다.
“그 여자가—이 사건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
강 형사가 말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그 여자가 혼자 결정한 건지, 아닌지입니다.”
이현은 유리창에 손을 짚었다.
유리는 차가웠다. 수도원에서 이마를 붙였던 유리의 차가움과는 달랐다. 수도원의 차가움이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었다면, 서울의 차가움은 사람을 더 고립시켰다. 낮의 차가움은 밤의 차가움보다 더 외롭다.
“저는 영숙 씨와 개인적인 접촉이 없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강 형사가 너무 빨리 대답했다.
그 ‘알고 있습니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현은 판단할 수 없었다. 정말 알고 있다는 것인지, 거짓을 알고 있다는 것인지. 서울의 언어는 빠르고, 해원의 언어는 느린데—지금 이 짧은 문장 하나는 두 언어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강 형사가 이어서 툭, 마지막 말을 얹었다. 마치 ‘추가 질문’이 아니라 ‘추가 사실’이라는 투로.
“그리고 한 가지 더요. 그날 영숙 씨가 타 넣은 ‘수면제’가, 약국에서 파는 약이 아니었습니다.”
이현의 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강 형사의 목소리는 끝끝내 낮았다. 낮은 목소리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사람을 끌고 들어가는 힘이 있다.
“아카시아 배당체를 정제해서 만든 겁니다. 사제 맹독이에요. 누군가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말끝이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말끝이 더 또렷해졌다.
오랫동안. 그 시간의 길이가, 숫자로 적힌 날짜보다 더 무서운 의미로 이현의 목 안쪽에 걸렸다.
아카시아 배당체.
시장통이나 약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약이 아니었다. 독초의 뿌리를 캐어, 시간을 끓이고, 시간을 걸러내고, 시간을 다시 말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결정체. 살의가 시간이 되어 굳은 것. 그게 한 번 사람 몸에 들어가면, 사람의 숨은 아주 조용히 끊어진다. 살인은 칼처럼 요란할 필요가 없다. 진짜 살인은 조용하다.
이현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 여자가—그 집에서 ‘오래 있던 여자’가—그토록 긴 시간을 살의로 버텼다는 뜻이었다. 최태국의 침대 머리맡에서, 첩년이라는 수모를 견디며, 단순히 하루하루가 아니라 계절을 견디며, 조용히 독을 달여 모았다는 뜻이었다.
만약 영숙이 그토록 철저하게, 오랜 시간 최태국의 죽음을 준비해 온 것이라면—
그녀가 준비한 계획은 단순히 아비를 죽이는 것 하나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아비가 죽은 뒤 150억의 돈다발이 어떻게 흩어지고, 장남 기백이 어떻게 미쳐 날뛰고, 금고 안의 서류가 어떻게 움직일지, 누가 인감을 쥐고 누가 유언장을 움켜쥘지까지. 그 모든 혼돈을 자기 발밑에 두고 조종하려는 더 끔찍한 차원의 설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현이 종이 위에서 그려 보았던 설계도 따위는, 그 ‘오랜 시간’ 앞에서 한낱 얇은 종잇장으로 찢겨나갈 수도 있었다.
오전 내내 법의 언어로 이현을 무장시키려 했던 이민호는, 영숙의 존재를 기백과 분리해 ‘독립된 실행자’로 정리하려 했다.
그것은 이현을 살리기 위한 가장 효율적이고 합법적인 꼬리 자르기였다. 법의 언어는 늘 그렇게 사건을 정돈한다. 단정하게 분리하고, 분리한 것을 책임으로 묶는다.
그러나 강 형사는 달랐다.
강 형사는 이현이 듣기 편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이현이 오만하게 외면해 왔던 거대한 맹점을 향해, 피할 수 없는 질문의 칼날을 꽂았다. 질문은 늘 사실보다 오래 남는다.
“다음에 내려오시면 한 번 더 뵙고 싶습니다.”
강 형사가 말했다.
“영숙 씨 관련해서 기억나는 게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작은 것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이현의 대답은 자동처럼 나왔다.
전화가 끊겼다.
끊긴 전화는 빈 공기를 남겼고, 빈 공기 속에서 아카시아 배당체라는 단어만, 독처럼 남았다.
집으로 돌아온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냉장고는 비어 있었고, 이현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곧 닫았다. 먹고 싶은 마음이 오지 않았다. 허기는 몸의 일이지만, 마음이 무너지면 몸도 같이 무너진다. 그는 소파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창가에 섰다.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 움직였고, 움직이는데도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영숙.
아버지의 후처. 이현이 중학생이던 시절 해원장에 들어온 여자. 소피아 어머니가 끌려 나가던 날, 문턱 가장자리에 서서 입꼬리를 비죽이 올리던 여자. 짙은 화장, 셈이 빠른 눈빛. 그때 이현은 영숙을 미워했다기보다, ‘미워할 가치도 없는 것’처럼 취급했다. 무시는 가장 편한 폭력이다. 미워하면 상대가 커지는데, 무시하면 상대가 사라진다. 사라진 상대는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사라진 척할 뿐이다.
강 형사는 영숙을 “오래 있던 여자”라고 불렀다.
오래 있었다는 것은 많이 보았다는 것이고, 많이 보았다는 것은 많이 알았다는 것이다. 이현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영숙은 그 집에서 오래 보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돈이 움직이는 방식, 자식들의 욕망이 들끓는 방식, 하인들의 공포가 끓는 방식. 그리고—독이 준비되는 방식.
수만이 말한 문장이, 이현의 머릿속에서 조용히 되살아났다.
'이 일은예, 겉만 보모 안 됩니더. 속이 한 겹 더 있심더.'
그 ‘층’이 영숙이라는 이름으로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법의 언어는 사람을 한 장면으로 자르고, 사건을 몇 개의 죄명으로 정리한다. 그러나 집안의 언어는 층이 많다. 층이 많아서, 한 번 무너지면 어디까지 무너지는지 끝을 알 수 없다.
도망과 은신은 다르다.
도망은 쫓기는 것이고, 은신은 기다리는 것이다.
영숙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이현은 생각했다. 그 여자가 정말 두려워서 사라졌는지, 아니면 다음을 기다리기 위해 사라졌는지. 그 차이는, 한 인간의 죄보다 더 큰 어떤 구조를 가리킬 수도 있었다.
저녁이 되자 서울의 불이 켜졌다.
수백 개, 수천 개. 밤이 오면 켜지고, 날이 밝으면 꺼지는 불. 켜져야 할 이유가 있어서 켜지는 불이 아니라, 그냥 켜지는 불. 이현은 수도원의 빨간 불을 생각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도 꺼지지 않던 성체등. 변명 없이 타고 있던 불. 그 불이 아직 눈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이상했다. 서울에 돌아오면 다 지워질 줄 알았는데, 지워지지 않았다.
이현은 무의식적으로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거칠고 투박한 나무 알갱이가 손바닥을 찔러왔다. 서하가 건넨 낡은 묵주. 그는 주머니 속에서 그 감촉을 꽉 움켜쥐었다가, 이내 손가락의 힘을 서서히 풀었다.
이것을 주머니 밖으로 꺼내 쥐고 눈물을 쏟는 순간, 무언가를 결단하고 시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해야만 할 것 같은 참회’가 지금 이현에게는 가장 끔찍한 공포였다. 그 나약한 마음은 결국 제 목에 밧줄을 걸게 만들고, 종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자신을 몰아넣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래서 그는 끝내 묵주를 꺼내지 않았다.
기도를 시작하지도, 그렇다고 구원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지도 못한 채. 그는 어두운 주머니 속에서 차갑게 식은 손끝으로 단 하나의 나무알만 꽉 움켜쥐고서, 위태로운 밤의 창가에 서 있을 뿐이었다.
강 형사가 수화기 너머로 던졌던 묵직한 돌덩이가 다시금 가슴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
'혼자 결정한 건지, 아닌지.'
그리고 그 말 뒤에 붙어 있던, 시간의 독.
'아카시아 배당체. 오랫동안 준비한 것.'
그 물음이, 서울의 밤 안에서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다.
마치 수도원의 성체등처럼.
아무도 보지 않아도, 그냥 거기 있는 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