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4장 — 진노의 날

by 진동길

14장 — 진노의 날

2000년 3월 15일 낮 13:10–16:25 / 창원지방검찰청 조사실
2000년 3월 15일 밤 21:40–23:55 / 창원구치소 독방



1

호송버스는 지하로 들어갔다.
빛은 위에서 끊기고, 냄새가 아래로 모였다. 쇠 냄새, 땀 냄새, 숨통을 조이는 눅눅한 담배 쩐내. 기백은 그 냄새를 맡으면 몸이 먼저 약해졌다. 약해지는 게 싫었는데도, 약해졌다. 힘 있는 데서는 약해져야 산다는 걸 그는 어릴 때부터 배웠다. 그건 가르침이 아니라 습관이었다. 해원장 집안의 마룻바닥에서, 아버지 구두 소리 앞에서.


수갑이 손목을 죄고 포승줄이 허리를 죄었다.
쇠는 늘 정확했다. 정확한 것은 사람을 살리지 않는다. 정확한 것은 사람을 기록한다.


검찰청 지하 구치감은 축축했고, 벽은 말을 삼킨 얼굴처럼 희었다.
기백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앉으면 무릎이 흔들릴까 봐. 흔들리면 보일까 봐. 보이면 더 묻힐까 봐.


“최기백.”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천천히 왔다.
천천히 오는 것이 더 무섭다. 빨리 오면 맞고 끝나는데, 천천히 오면 마음이 먼저 맞는다.


조사실 문이 열리자 형광등이 먼저 얼굴을 때렸다.
밝음은 결백이 아니라, 노출이었다.


검사는 책상 너머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검찰수사관이 앉아 있었다.
수사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얹혀 있었다. 기백은 그 손가락을 보며 침을 삼켰다. 저 손가락이 내 말을 종이로 바꾼다. 종이가 되면 다시 내 것이 아니다.


타닥, 타닥.
아직 아무 말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키보드 소리가 먼저 나왔다.
“시작한다”는 소리였다. 기백은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쪼그라드는 걸 느꼈다. 그는 마음이 쪼그라들면, 남의 말이 들어오는 걸 안다.


검사가 낮고 느리게 말했다.


“최기백 씨, 그날 상황은… 우리도 대충 그림은 있어요.”


‘이미 다 안다’는 말은 칼이 아니다.
칼은 피라도 남기지만, 이 말은 피를 남기지 않고 숨을 뺏는다. 기백은 숨을 들이마시다 멈췄다. 숨이 멈추면 말이 빨라진다. 말이 빨라지면 실수한다.


검사는 종이를 넘기지 않았다. 종이 위를 보지도 않았다.
그저 기백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시선을 내려 키보드 타건 소리에 잠깐 귀를 기울였다.
침묵이 왔다.
침묵은 질문보다 오래 남는 질문이었다.


“…….”


“어디, 본인 입으로 직접 들어봅시다.”


기백은 그 공기를 못 견뎠다.


“제가… 제가 죽인 기는 아입니더.”


수사관의 손이 잠깐 빨라졌다.

타닥타닥.
기백은 자기가 방금 ‘문장’을 내줬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가 아니라 ‘좋다’였다.
앵커를 박았다.


“좋습니다. ‘죽인 건 아니다’… 그럼 어디까지 했습니까.”


선택지로 가두는 문장이었다.
했냐, 안 했냐가 아니라 어디까지 했냐.
기백은 도망갈 문이 줄어드는 걸 느꼈다.


“그날… 들어가가….”
말끝이 흐려졌다.


검사가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명예로운 변명”을 꺼내주었다.
함정처럼.


“화났을 수 있어요. 누구라도 화나죠.”


기백은 그 말에 기대고 싶었다.
화났다고 하면 사나이가 된다. 겁먹었다고 하면 겁쟁이가 된다. 기백은 겁쟁이로 기록되기 싫었다. 기록이 싫었다. 그래서 그는 사나이 쪽으로 기울었다.


“예… 화가 났심더.”


검사는 바로 ‘용어’를 바꿔치기했다.


“격분했군요.”

타닥.
격분.
화보다 무거운 단어가 종이에 박혔다.


검사는 사소한 것부터 묻기 시작했다.
큰 죄를 묻지 않았다. 큰 죄는 피의자가 스스로 말하게 만드는 게 더 오래 간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 뭐 들고 있었죠.”


기백은 당황했다.
손이 어디에 있었는지, 문이 어떻게 열렸는지, 그런 게 지금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상관이 되는 순간이 있다. 조서가 몸을 만든다.


“…아무것도 안 들고….”

기백이 얼른 말했다.


검사는 바로 “이미 다 안다” 프레임을 다시 던졌다.


“안 들고 들어갔다고요. 그럼 손은 비어 있었는데, 목은 왜 만졌습니까.”


기백의 눈이 잠깐 들렸다.
목.
그 단어는 기백이 숨기고 싶던 곳을 정확히 찔렀다.


“목…?”

기백이 되물었다.


검사는 선택지 둘로 가뒀다.


“아버지 목을 잡은 겁니까, 멱살을 잡은 겁니까.”


둘 다 아니다를 말하려면 설명이 길어진다.
길어지면 늪이다.


기백은 입술이 말라붙었다.

그날 밤—아버지는 약기운에 반쯤 꺼져 있었고, 숨이 쇠 긁는 소리처럼 났다. 기백은 아비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장롱 맨 밑칸부터 파헤쳤다. 종이 냄새, 잉크 냄새, 오래된 가죽 냄새. 그 모든 냄새를 걷어내면 결국 하나였다. 소유권 냄새.


그 냄새가 지금 조사실에서도 올라왔다.
종이 냄새는 늘 사람을 과거로 끌고 간다.


기백이 낮게 중얼거렸다.

“내 거… 내 거 어딨노….”


수사관의 손이 다시 빨라졌다.
타닥타닥타닥.
검사는 그 문장을 놓치지 않고 앵커로 박았다.


“좋습니다. ‘내 거’. 그 ‘내 거’가 산 27번지입니까, 아니면 인감입니까.”


또 선택지.
기백은 산 27번지라는 말이 나오자 목젖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 윤 씨.
도망간 엄마가 남긴 마지막 매듭.
기백은 그 매듭을 ‘선물’이라 부르지 못했다. 선물은 따뜻해야 하는데, 그 땅은 차갑고 단단했다. 차갑고 단단한 것은 목줄이 되기 좋다.


“…산 이십칠….”

기백의 사투리가 더 거칠어졌다.


검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리하죠. 그날 밤 당신은 ‘마침표를 찍으러’ 들어간 게 아니라, ‘찾으러’ 들어갔네요. 맞습니까.”


기백은 그 문장이 너무 ‘그럴듯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럴듯한 문장이 사람을 잡는다.


“예… 찾으러….”

타닥.


‘찾으러’라는 말이 종이가 되었다.


검사는 다시 ‘시간표’로 조였다.


“01:25. 세 번째 방문. 그때는 찾러 간 게 아니라, 뺏으러 간 거 아닙니까. 왜 그 시간에 또 들어갔습니까.”


기백은 그 5분을 떠올렸다.
아비의 숨.
장롱 밑칸.
그리고 멱살을 움켜쥐던 순간.
그때 아비가 헛소리를 뱉었다. ‘도망친 년’ 같은, 친어미를 씹어뱉는 말.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기백의 눈이 뒤집혔다.


그는 목으로 손이 갔다.
힘이 들어가면 뼈가 먼저 울릴 터였다.


그런데—그는 풀었다.
양심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이대로 죽이면 너무 쉽다.
살려두고… 내일 아침. 눈 뜨고 있을 때 다 뺏는다.


기백은 그 계산을 지금도 숨기고 싶었다.
계산은 패륜보다 더 추하다. 패륜은 순간이지만, 계산은 오래 산다.


검사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때 손을 풀었죠.”


기백은 고개를 들었다.
검사의 목소리는 세지 않았다.
세지 않은데도 ‘아는 것’ 같았다.
‘이미 다 안다’는 공포가 다시 목덜미를 눌렀다.


“제가….”


기백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힘 있는 자 앞에서 약해지는 습관.

검사는 결론을 밀어 넣지 않았다.
대신, ‘거짓말을 쉬운 길로’ 만들어줬다.


“술이 들어갔으면 기억이 흐릴 수 있고요.”


기백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은 시퍼런 맨정신이었다.
그런데도 그 변명을 잡고 싶었다. 잡으면 편하니까. 편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술은….”


기백이 더듬었다.

검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좋습니다. 술 얘기는 빼죠. 그럼 이 얘기만 합시다.”

검사는 숨을 한번 고르고, 더 낮게 말했다.


“최기백 씨. 아까 ‘혼자 한 게 아니다’라고 했죠. 그 진술, 조서에 그대로 남깁니다. 변함없습니까.”


기백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혼자라고 하면 내가 다 뒤집어쓴다.
혼자 아니라고 하면 누군가를 끌고 들어온다.

기백은 남을 끌고 들어오는 쪽이 더 익숙했다.
힘 없는 자 앞에서 강한 방식.
살아남는 방식.


“…제가… 혼자 한 기 아입니더.”


앵커가 박혔다.
검사가 바로 그 문장을 기준점으로 삼았다.


“좋습니다. ‘혼자 한 게 아니다’… 그럼 같이 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죠.”


기백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를 말하려다, 더 깊이 들어갈 것을 알았다.
검사는 침묵을 한 박자 주었다.
공기를 비웠다.
기백은 그 공기를 못 견뎠다.

검사가 아주 조용히 물었다.


“누구입니까.”


기백의 혀끝에 먼저 떠오른 건 영숙이었다.
살결의 온도가 먼저 떠올랐다.
그 온도를 떠올리는 순간, 기백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분노해야 할 자리에서 온도를 떠올리는 건 목줄이었다.


“…영숙이… 그 년이….”


그 말이 나오자마자, 기백은 자기 말이 너무 ‘편하다’는 걸 느꼈다.
여자를 약하게 부르면 내가 강해지는 착각.
검사는 그 착각을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더 큰 문으로 이끌었다.


“영숙 씨가 ‘뭘’ 했습니까.”


기백은 말이 막혔다.
독?
그런 건 그는 모른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그 대신 기백이 아는 방식으로 말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문서….”


기백이 낮게 말했다.
“…윤 씨 땅… 그 문서…”


검사가 단어를 바꿔치기했다.

“소유권 문서.”


타닥.
소유권.
종이에 박히는 순간, 기백의 욕망이 법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검사가 마지막으로, 아주 조용히 회유를 던졌다.


“오늘은 ‘정리’만 합시다. 최기백 씨가 불리하지 않게.”


불리하지 않게.
기백은 그 말에 기대고 싶었다.
신앙 없는 사람은 현세에 매달린다. 손에 쥔 것, 눈에 보이는 것에 목숨을 건다. 기백에게 ‘불리하지 않게’는 구원의 말처럼 들렸다.

그가 결국, 낮게 덧붙였다.


“…이현이도… 알았을 낍니더.”


타닥타닥.
종이는 자라났다.

검사는 소리치지 않았다.
그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서류를 한 번 정리하고,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 말이 끝이었다.
끝이라기보다, 시작이었다.
조서가 남는 순간부터 벌은 시작되니까.




2

구치소로 돌아온 밤, 독방 문이 닫히는 소리는 낮보다 더 무거웠다.
낮에는 검사와 수사관이 있었다.
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 밤이 더 무서웠다. 죄가 사람 없이도 숨을 쉬기 때문이다.


기백은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손목 자국이 욱신거렸다. 쇠가 남긴 흔적은 선명했다. 선명한 고통은 견딜 수 있다.
문장으로 남은 죄는 견딜 수 없다.

기백은 낮에 자기가 뱉은 말을 되씹었다.


혼자 한 게 아니다.
그 문장은 살 길 같았고, 동시에 목줄 같았다.

기백은 눈을 감았다.
감으면 어두워야 하는데, 감아도 조사실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가 귀 안에서 계속 났다.


“내가….”


기백이 혼잣말을 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데도, 말은 나왔다.
말은 늘 어둠에서 더 잘 나온다.


그는 스스로를 학대하듯,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힘 없는 자 앞에서 강해지는 습관.
자기 자신은 힘이 없으니까, 마음껏 때릴 수 있었다.


“내가 뭘 했노….”


그날 밤을 다시 꺼냈다.
때리려 들어간 게 아니었다.
때릴 위인이 아니었다. 기백은 평생 아버지를 저주하고 무서워했다.
그 저주와 무서움이 그날 밤에 사라진 게 아니라—그 저주와 무서움 위에 더 큰 욕망이 올라탄 것이다.


내 거.
땅.
문서.
엄마가 준 것. 엄마가 버리고 간 것.


아비의 멱살을 움켜쥔 건 용기가 아니었다.
분노도 아니었다.
‘내 것을 찾아야 한다’는 짐승 같은 집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목을 조르다 놓았다.
양심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이대로 죽이면 너무 쉽다.
그 계산이 더 추했다.

기백은 그 추함을 견디지 못해, 다시 남을 떠올렸다.


영숙.
이현.
누구라도 좋았다.
내 죄를 나눠질 사람이 필요했다.


신앙 없는 사람은 하늘을 부르지 않는다.
대신 사람을 부른다.
사람을 붙잡는다.
붙잡을 것이 없으면 땅을 붙잡는다.
땅도 없으면 문장을 붙잡는다.
문장이 사람을 죽인다는 걸 알면서도.

기백은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엄마는… 어데 갔노.”


대답은 없었다.
대답 없음이 기백의 종교였다.
대답이 없으니 더 붙잡았다.
붙잡을수록 더 가라앉았다.

독방 어둠 속에서, 낮의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누구입니까.'

기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을 하면 살 것 같았다.
대답을 하면 더 죽을 것 같았다.


그 밤, 기백은 잠들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는 건 벌이었다.
벌은 판결문보다 먼저 온다.
그가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몸이 먼저 인정했다.
몸이 먼저 흔들리고, 숨이 먼저 막히고, 밤이 먼저 길어졌다.

그리고 길어진 밤은—
내일 낮, 다시 ‘문장’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타닥.
타닥.
아직 쓰이지 않은 조서가, 기백의 귀 안에서 먼저 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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