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5장 — 닭이 울었다

by 진동길

15장 — 닭이 울었다

2000년 3월 15일 새벽 04:35–오전 11:30 / 해원읍 버스터미널 — 정 할매 국밥집 — 해원경찰서 형사과 조사실





해 뜨기 직전의 새벽은 늘 가장 어두웠다.
어둡다는 것은 빛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누구도 제 얼굴을 다 돌려받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사물들은 반쯤 잠긴 것처럼 희미했고, 사람들 마음도 제 모양을 다 드러내지 못한 채 축축하게 엎드려 있었다. 매화는 그런 시간에 더 잘 보였다. 꽃이라기보다 상처처럼. 바람을 이기고 핀 것이 아니라, 바람에 먼저 얻어맞고도 아직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버스터미널 바닥에는 젖은 꽃잎이 붙어 있었다.
매화꽃잎은 밤새 비를 먹고 무게를 얻은 채, 신발 밑창에 눌렸다가 금방 떨어져 나갔다. 남지 않는 것들. 그러나 남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 오래 따라붙었다. 죄도 그렇고, 후회도 그렇고, 사람을 붙드는 기억도 대개 그런 식이었다.


강수만은 포장마차 뒤 그늘에 서 있었다.
서 있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는 언제나 남의 뒤에 서는 사람이었다. 앞장을 서는 법을 배운 적이 없고, 배우고 싶어 한 적도 없었다. 앞에 서는 자는 먼저 맞는다. 먼저 들킨다. 먼저 죽는다. 수만은 그런 세계에서 자랐다. 그래서 늘 어깨 하나 뒤, 기둥 하나 뒤, 문짝 하나 뒤. 남의 등을 보고 사는 인간은 결국 남의 등을 더 잘 읽게 된다.


그의 걸음은 질척거렸다.
진흙을 밟아서가 아니었다. 사람 마음이 오래 어느 한곳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으면, 발도 그렇게 된다. 소리 없이 걷는데도, 지나간 자리에 습기 같은 것이 남는 종류의 걸음. 수만의 발이 그랬다. 오래된 어둠이 사람의 발목부터 먼저 젖게 할 수 있다면, 바로 그런 꼴일 것이다.


버스가 터미널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것은 빛이 아니라 냄새였다. 밤새 달린 기름 냄새, 젖은 의자 천 냄새, 사람들 옷깃에 밴 먼지 냄새. 그 속에 서울 냄새도 섞여 있었다. 서울 냄새는 늘 조금 마르고 각이 서 있는데, 해원에만 내려오면 그것도 금세 젖는다. 흙 냄새와 물비린내, 그리고 오래 눌러앉은 원망이 그런 냄새를 눌러버린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다.
수만은 얼굴보다 어깨를 먼저 보았다. 얼굴은 끝까지 체면을 붙잡지만, 어깨는 잘 못 속인다. 버티는 어깨와 이미 한번 꺾인 어깨는 다르다. 서울에서 내려온 이현의 어깨에는 두 가지가 다 묻어 있었다. 꼿꼿한 척하고 있으나 이미 한번 무너진 자리가 남은 어깨. 무너졌다고 인정하지 못해 더 아픈 어깨.


“도련님.”


수만이 낮게 불렀다.
그 목소리는 다정하지도, 노골적으로 비웃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 축축했다. 애매한 친절은 사람을 더 오래 불편하게 한다.

이현이 돌아보았다.
눈 밑이 꺼져 있었다. 피곤만으로는 생기지 않는 그늘. 밤새 달린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한번 무너진 자리를 애써 덮고 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여기서 뭐 하노.”


목소리는 짧았다.
경계였고, 피곤이었고, 무엇보다 더는 누구하고도 말을 길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버스 늦는다 캐서예.”
수만이 말했다.
“혹시나 싶어 나왔심더.”


이현은 더 묻지 않았다.
수만은 그 더 묻지 않음을 놓치지 않았다. 사람은 힘이 남아 있을 때는 쓸데없는 것도 끝까지 묻는다. 지치면 의심조차 절약한다. 이현은 지금 의심을 절약하는 쪽이었다.


“경찰서 들어가시기 전에… 국밥이라도 한 그릇 하입시더.”


이현이 눈을 좁혔다.
“이 시간에?”

“갈 데가 있습니꺼.”


그건 사실이었다.
새벽 네 시 반에, 해원에서 마땅히 갈 곳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집이 있는 사람도 그 시간에는 쉽게 집으로 못 간다. 집은 밝을 때 들어가야 덜 추하다. 어두울 때는 오히려 남의 불빛 아래 앉아 있는 편이 낫다.


수만은 먼저 걷지 않았다.
그는 이현보다 반 보 뒤에서 붙어 걸었다. 늘 그랬듯이. 이현이 한 걸음을 옮기면 그제야 따라 움직이고, 이현이 멈추면 수만도 멈췄다. 따라가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뒤에서 보는 사람. 뒤에서 보는 인간이 제일 오래 기억한다. 누구의 발이 흔들렸는지, 누구의 등줄기가 한번 움찔했는지, 누구의 손이 주머니 속에서 무엇을 더듬었는지.


이현은 걷는 내내 주머니 속 손을 빼지 않았다.
그 손끝에는 아마 묵주가 닿아 있을 것이다. 수만은 몰라도 알 수 있었다. 도련님 같은 사람은 끝까지 믿지는 못하면서, 믿는 사람의 물건은 버리지 못한다. 그런 애매함이야말로 가장 오래가는 목줄이었다.




정 할매 국밥집 안은 바깥보다 따뜻했으나, 그 따뜻함이 사람을 위로하지는 않았다.
솥뚜껑이 낮게 울리고, 국물 김이 허공에 한 겹씩 쌓였다. 김은 얼굴을 흐리게 했다가 다시 또렷하게 만들었다. 흐려졌다 또렷해지는 동안, 사람은 잠깐 자기 표정을 잊는다. 수만은 그런 틈을 좋아했다.


정 할매는 둘을 한 번 보고, 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묻지 않았다. 오래 산 사람들은 누가 지금 무슨 꼴로 들어오는지 묻지 않아도 안다. 모른 척해주는 것이 마지막 예의일 때가 있다.


수만은 이현 맞은편이 아니라 비스듬히, 조금 뒤로 물러난 자리에 앉았다.
정면으로 마주 앉으면 말이 너무 빨리 날카로워진다. 그는 오늘 그걸 원하지 않았다. 수만은 늘 뒤에서 보는 사람이고, 뒤에서 보는 사람은 상대가 먼저 무너지길 기다린다.


“도련님.”


수만이 국을 뜨지 않은 채 불렀다.


“뭐고.”


“너무 똑바로 계시모… 부러집니더.”


그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위로처럼 들리는데 사람을 더 불쾌하게 만드는 말이 있다. 이현은 바로 그 불쾌함을 느꼈다. 불쾌한데, 그 말이 조금 맞는 것 같아서 더 싫었다.


“니 걱정이나 해라.”


이현이 말했다.
차갑게 하려 한 말이었으나, 차갑기보다 지쳐 있었다.


“제 걱정은 늘 하고 있지예.”
수만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라니께 아직 안 죽고 있는 기고.”


그 뒤로 둘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국은 뜨거웠지만, 뜨거운 것이 마음까지 데우지는 못했다. 밖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고, 그 밝음은 아직 사람 얼굴을 살리는 종류의 빛은 아니었다. 가장 어두운 새벽이 지나간 뒤의 빛은, 오히려 더 가혹할 때가 있다. 뭘 숨길 수 없게 만드니까.


수만은 국을 다 비우고도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끝까지 뒤였다.
이현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제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계산대 쪽으로도 먼저 가지 않았다. 정 할매가 아무 말 없이 수만 쪽으로 시선을 한 번 주었고, 수만은 그제야 돈을 내려놓았다. 뒤에 서는 사람은 계산조차 남보다 반 박자 늦다. 늦다는 것이 약함 같지만, 때로는 그 늦음이 사람을 더 깊이 눌러앉게 한다.


국밥집 문을 나설 때, 수만은 아주 잠깐 이현의 등을 보았다.
도련님은 끝까지 못 밀어붙일 사람이다.
그 확인이면 충분했다. 더는 말을 보탤 필요가 없었다. 여자의 거미줄은 이미 제 일을 하고 있었고, 자신은 그저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일 뿐이었다.




해원경찰서 형사과 조사실은 빛이 늦게 들어오는 방이었다.
낡은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온 아침빛이 책상 모서리에 먼저 걸리고, 담배 냄새에 한 번 걸리고, 이현 어깨를 지나서야 바닥에 닿았다. 늦게 닿는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방 한쪽 책상에서는 수사관이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키보드 소리가 꾸준했다. 타닥, 타닥.

아직 이현 진술을 본격적으로 받아 적는 순간은 아니었으나, 곧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소리 하나만으로도 이현은 자기가 이미 문장 속에 들어와 있다는 걸 느꼈다. 문장 안에 들어온 사람은 자기 뜻보다 오래 사는 말을 남기게 마련이다.


강 형사는 정면이 아니라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그는 이현을 기백 다루듯 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바로 그 점이 더 불길했다. 기백 같은 인간은 세게 밀면 흔들린다. 그러나 이현은 세게 밀면 오히려 버티는 부류였다. 강 형사는 그걸 안다. 그래서 그는 범인을 추궁하는 대신, 자기 서사를 붙들고 사는 인간의 안쪽을 벗겨내려 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이현은 그 침묵 속에서 자기 뒷모습을 의식했다. 어깨가 조금 구부러져 있다는 것. 등을 의자에 다 기대지 못하고 있다는 것. 지식인의 꼿꼿함이란 결국 척추와 체면의 합작인데, 체면이 먼저 흔들리면 척추도 쉽게 무너진다.


강 형사가 종이컵을 툭 내려놓았다.

마른 소리가 났다.

방 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는 소리였으나, 이현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방어적인 자세를 풀지 않았다. 강 형사는 그 뻔한 엘리트의 태도에 픽 웃음을 흘렸다.


“그놈의 서울.”

강 형사가 비스듬히 앉은 채 말했다.


“여기 앉은 배운 양반들 레퍼토리는 똑같습니다. 멀어서 몰랐다. 법적으로 내 책임 아니다.”


이현의 턱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강 형사는 그걸 보았으나 모른 척했다.


“이현 씨, 지금 형사법상으로는 걸릴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느리게 말했다.


“기백이처럼 무식하게 아비 목을 조른 것도 아니고, 영숙이처럼 몰래 약을 먹인 것도 아니니까.”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위로처럼 들리는데 사람 안쪽을 가장 깊이 썩게 하는 말이 있다.
법적으로는 괜찮다.
바로 그 사실이, 이현에게는 가장 더러운 면죄부였다.


“형사님 말씀이 불쾌하군요.”


이현이 낮게 말했다.
“마치 제가 범죄를 방조라도 했다는 투로 들립니다.”


“방조?”


강 형사가 불쑥 상체를 내밀었다.

책상 위로 그림자가 한 번 깊게 드리웠다. 큰 움직임이 아니었는데도, 방 안의 공기가 잠깐 바뀌었다.


“당신은 방조한 적 없습니다.”
강 형사가 말했다.
“외면했지. 아주 고상하고 우아하게.”


타닥.

수사관의 키보드 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갈랐다.
문장이 종이가 되는 순간의 소리. 종이는 사람보다 오래 산다.

강 형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수만이가 집안 서류 뒤지고 다닐 때, 이현 씨는 문을 닫았습니다.”
“영숙이가 정체 모를 약병 들여놓을 때, 진흙탕에 엮이기 싫어서 서울로 도망쳤고.”
“아버지가 헛소리를 하며 말라갈 때, 당신은 그 희고 깨끗한 옷에 피 튈까 봐 눈을 감았습니다.”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이현이 책상을 짚으며 거의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소리 낼 줄 몰랐다. 소리치는 건 기백 같은 인간의 방식이라고, 평생 그렇게 생각해 왔으니까. 그런데 사람은 자기보다 더 미워하던 인간의 방식을 가장 먼저 닮아간다. 자기가 닮았다는 걸 들키기 전까지는 모른 채.


“제가 그 상황에서 무얼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현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저라고 괴롭지 않은 줄 아십니까? 증거도 없이 의심만으로 가족을 범죄자 취급하며 싸움판을 벌였어야 합니까!”


반듯한 논리였다.
스스로를 지켜온 문장이었다.
그러나 강 형사는 그 논리와 싸우지 않았다. 싸우면 말이 길어지고, 길어진 말에는 숨을 틈이 생긴다. 그는 틈을 주지 않았다.


말없이 서랍을 열어, 구겨진 투명 비닐봉투 하나를 꺼내 이현 앞에 툭 던졌다.


비닐 안에는 액정이 깨진 낡은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이현의 숨이 턱 막혔다.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무언가가 깨지는 것 같았다. 액정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오래 버텨온 어떤 표면이.


“최태국 씨가 돌아가시기 전날 밤, 굳어가는 손에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겁니다.”


강 형사의 목소리가 낮고 서늘하게 바닥을 기었다.

이현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람은 총보다 더 작은 물건 앞에서 자주 무너진다. 일상적인 것들이 마지막 순간의 진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기백이가 난동을 피우고, 영숙이가 약을 타 먹이던 그 밤에.”
강 형사가 말을 끊지 않고 이어갔다.
“늙은 아비가 구급차도, 경찰도 아니고… 당신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현의 주머니 속 손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묵주를 더듬으려다 멎었다.
기도할 수 없는 손, 그러나 버리지도 못하는 손.
그 손이 지금 자기 자신 같았다. 믿지 않으면서, 완전히 떠나지도 못하는 인간.

강 형사가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던졌다.


“세 번이나.”


세 번.
그 숫자가 이현의 귓속을 서늘하게 후벼 팠다.

허공을 가르는 닭 울음소리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여오던 길고 긴 밤이 일거에 무너져 내리고, 변명할 데 없는 아침이 시퍼렇게 밝아버렸다.

숨겨져 있던 밤이 갑자기 끝나고, 자기가 외면해 온 세 순간이 한꺼번에 겹쳐지는 느낌.


윤 씨가 떠날 때.
소피아가 갇힐 때.
영숙이 스며들 때.
그리고 최태국이 죽어가던 그 밤.


세 번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죄를 셀 때, 꼭 자기가 견딜 수 있는 숫자로 줄여놓는다.


“바쁘셨습니까.”
강 형사가 물었다.
한 박자 쉬었다.

“아니면… 뻔한 피비린내에 발 담그기 싫어서 모른 척하셨습니까.”


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이 없다는 것이 대답일 때가 있다.


그는 그날 밤 휴대전화 화면을 한 번 본 기억이 있었다.

최태국.
그 이름이 뜬 걸 봤다.
보고도 받지 않았다.
받지 않은 것이야말로 자기 죄의 가장 정확한 형태라는 걸, 이제야 안다.


손에 피를 묻힌 적은 없다.
그래서 늘 자기는 다르다고 믿었다.
그런데 피가 흐르는 동안 전화를 받지 않은 인간은, 과연 무죄인가.


강 형사는 그를 범인으로 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이현을 더 무너뜨렸다.
‘법적으로 걸릴 게 없다’는 말은 곧, 이제부터는 네가 네 자신을 심판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법이 못 잡는 죄는 결국 사람 안에 오래 남는다.


이현이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목소리가 얇았다.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자기 모습을 입 밖에 꺼낼 때는 늘 그렇게 된다.


“보고도….”


그가 숨을 삼켰다.


“안 받았습니다.”


타닥.

수사관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작은 소리였는데, 이상하게도 무거웠다.
한 줄의 조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체면이 종이 위에서 늙어가는 소리 같았다.


강 형사는 한참 말이 없었다.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온 빛이 조금 움직였다.
빛은 움직이고, 이현은 그대로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쪽이 더 늦게 무너진다.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이현 씨.”


강 형사가 말했다.

“손에 피 묻힌 사람은 자기가 뭘 했는지라도 압니다.”
“근데 당신 같은 사람은… 평생 자기가 깨끗했다고 믿을 수 있거든요.”
“그 믿음이 사람 하나를 더 오래 죽입니다.”


그 말 앞에서, 이현은 더는 주머니 속을 더듬지 못했다. 묵주알을 쥐려던 손가락이 먼저 제 죄를 알고 뻣뻣하게 곱아들어 버린 탓이었다.

기도할 수 없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손.
그것이 지금 자기 자신 같았다. 혐오하면서도 끝내 닮아버린 인간. 아버지의 삶을 그렇게 증오했는데도, 더 세련되고 더 합법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계승해버린 인간.


그의 뒷모습은 더 구부러졌고, 블라인드 틈의 빛이 그 어깨를 비껴갔다.
큰 소리로는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에서는, 이런 낮은 목소리 하나가 사람을 오래 벗긴다.


밖에서는 하얗게 질린 매화가 속절없이 시꺼먼 흙바닥으로 처박혔을 것이다.
젖은 꽃잎은 깊이 박힌다.
깊이 박힌 것은 쉽게 뽑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현은 이제 안다.
기백이 세속의 욕망 때문에 먼저 무너졌다면, 자기는 더 깊은 자리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는 자기 위안이야말로, 가장 더러운 흰옷이었음을.


그 흰옷이 벗겨지는 순간부터—
벌은 시작된다.

작가의 이전글죄와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