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무덤을 여시는 하느님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무덤을 여시는 하느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들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렬하게 '생명'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라자로를 살리신 복음, 그리고 우리의 무덤을 열고 영을 불어넣으시겠다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벅찬 희망을 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부활'과 '살리심'을 먼 미래의 일로만 미루어두곤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위로하시자, 마르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에게 부활은 세상이 끝나는 날에나 일어날, 지금 당장의 내 슬픔과는 거리가 먼 교리적인 진리였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며 지나간 과거에 대한 아쉬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막연한 기대 사이에 갇혀 있는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현재형으로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일상 속의 무덤을 여시는 분
예수님의 이 선언은 부활이 단지 죽음 이후나 세상 끝날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부활이시기에,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부활의 때가 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리겠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무덤'은 육신이 묻히는 땅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ㅡ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깊은 절망과 우울의 무덤
ㅡ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인간관계의 무덤
ㅡ 번번이 넘어지고 마는 나약함과 죄책감의 무덤
하느님은 우리가 세상 끝날까지 이 차가운 무덤 속에 방치되어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라고 한 것처럼, 하느님은 언제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가장 완벽한 때에 성령을 통해 우리의 무너진 일상을 다시 살려내십니다.
하느님의 때 (카이로스)와 침묵의 의미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을까요? 왜 우리의 기도에는 즉시 응답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무덤 속에 갇혀 고통받는 것처럼 느껴질 때 침묵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시간표와 하느님의 시간표는 다릅니다. 우리는 고통이 즉시 제거되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은 그 고통과 죽음마저도 생명으로 뒤바꾸는 더 큰 영광을 준비하십니다.
하느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그 시간은, 우리를 버려두신 시간이 아니라, 당신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 '우리를 위한 당신의 때'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흘리신 눈물은, 우리의 고통을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돌을 치워라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은 우리가 일상의 죽음에서 벗어나 다시 숨 쉬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기적을 행하시기 전,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돌을 치워라."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닫고 있는 불신의 돌, 체념의 돌, 절망의 돌을 치워야 합니다.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며 내 삶은 이미 늦었다고,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 포기해버린 마르타의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종말의 때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처한 이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반드시 나를 살려내시고 일으켜 세우실 하느님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아무개야, 이리 나와라!" 하실 때, 얽매였던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생명과 빛을 향해 걸어 나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