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6장 — 살아 있는 자들의 방

by 진동길

2000년 3월 16일 새벽–낮 / 가르멜 수도원 — 진주 요양병원 — 해원읍 모처




1

가르멜의 밤은 세속의 밤과 달랐다.


세속의 밤이 인간의 욕망과 죄악 속에서 짙어진다면, 수도원의 밤은 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무거운 노동 속에서 하얗게 타들어 갔다. 아직 수련기도 시작하지 않은, 갓 입회한 지원자의 몸으로 그 맑고 서늘한 고요 안에 머물던 서하에게, 봉쇄 담장 너머 세속의 소음은 완전히 차단된 피안(彼岸)이었다. 지원자는 함부로 세속의 소식을 들을 수도, 허락 없이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디딜 수도 없었다. 그것이 십자가를 쥐려는 자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형벌이자 축복이었다.


그러나 세속의 핏자국은 그 육중한 봉쇄 담장마저 기어이 넘어왔다.


전날 밤, 침묵의 시간을 깨고 원장 수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 소피아가 갇혀 있는 진주 요양병원에서 온 것이었다. 보호자 동의와 퇴원 수속에 관한, 서늘하고 건조한 통보. 그 이면에는 소피아의 숨통을 완전히 조여버리려는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서하는 낡은 나무 책상 너머로 원장 수사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가면… 자네 안의 고요가 무참히 다칠 텐데."


백발이 성성한 원장 수사의 목소리는 메말랐으나 깊었다. 규율 상 직계 가족의 생사가 달린 일이라 할지라도, 갓 입회한 지원자를 세속으로 내보내는 것은 영혼을 진흙탕에 던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허나 삶이란 것은 언제나 규율보다 먼저 도착했다.


"다치더라도… 제 손으로 거둬야 할 핏줄의 빚입니다."


서하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원장 수사는 오래도록 서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신을 찾으러 온 자의 등 위에 세속의 끈적한 피비린내가 아직 엉겨 붙어 있음을, 노수사는 본능적으로 읽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젊은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영혼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도.


"다녀오게. 허나 명심하게. 자네가 짊어져야 할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자네 자신의 십자가라는 것을."


원장 수사의 특별 허락이 떨어지고, 수도원의 육중한 목재 대문이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서하는 새벽안갯속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숨이 턱 막혔다. 바다에서 치받고 올라와 살결을 긁어대는 해원의 짠바람, 그 속에 진득하게 녹아 있는 탐욕의 냄새. 서하는 입회 이후 줄곧 입고 있던 낡은 사복 차림의 제 어깨가, 이미 씻을 수 없는 것들로 젖어 들고 있음을 느꼈다. 담장 안의 고요와 담장 밖의 소란 사이에, 서하는 잠깐 멎었다.


그리고 걸었다.




2

진주 요양병원 복도 끝, 쇠창살이 덧대어진 402호 병실 문 앞.


서하의 손끝이 차가운 문고리에 닿기 전에 허공에서 잠시 굳었다. 수도원의 문을 나설 때 굳게 다잡았던 마음이, 이 지독한 크레졸 냄새와 사람이 세상에서 잊혀가며 삭아드는 냄새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냄새는 정직하다. 어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여기 갇혀 있었는지를, 말보다 먼저 전했다.


끼익.

마른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잿빛이었다. 사람의 온기가 완전히 말라붙어 빛마저 빨아들이는 공간의 구석, 벽을 보고 웅크린 마른 여자가 있었다.

소피아였다.


"어머니."


서하의 목소리가 젖은 흙처럼 무겁게 떨어졌다.

여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듬성듬성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앙상하게 굽은 등은, 세월이 짐승처럼 파먹고 남긴 흔적이었다. 서하가 다가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냉기가 정강이를 타고 뼛속까지 기어올랐다. 그는 제 체온보다 서늘한 여자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뼈였다. 살이 아니라 뼈가 잡혔다.


"어머니… 서하가 왔습니다. 이제, 이 지독한 곳에서 나가실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벽만 향해 있던 소피아의 고개가, 마치 오래 녹슨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초점이 풀려 흐리멍덩하던 여자의 눈동자가 서하의 얼굴에 닿는 찰나, 소름 끼치도록 시퍼런 이성의 불꽃으로 확 타올랐다.


미친 여자의 눈이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의 문장을 뱉어내기 위해, 지독한 약물과 고문 같은 시간 속에서 십오 년을 악착같이 버텨낸 짐승의 눈이었다. 삶이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나서도 끝끝내 빼앗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눈빛이다. 소피아의 눈빛이 그것이었다.


소피아가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서하의 손목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도망… 가라."


사포로 긁어대는 듯한 쇳소리가 쩍쩍 갈라진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서하의 동공이 흔들렸다. 누구에게서 도망치란 말인가. 어머니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가슴을 쥐어뜯듯이. 그리고 단 하나의 이름을 뱉어냈다. 세상의 모든 저주와 비통함을 꾹꾹 눌러 담은, 끔찍하게도 또렷한 세 글자였다.


"이현이."


서하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니 형… 이현이가… 그날 밤, 밖에서 내 방문을 잠갔다."


환청이 아니었다.

십오 년 전, 소피아가 미치광이로 몰려 철창에 갇히던 그 밤. 살려달라며 문짝을 긁고 울부짖는 제 어미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으면서도, 제 흰옷에 핏방울 하나 묻히지 않기 위해 방문의 걸쇠를 밖에서 걸어 잠가버린, 여덟 살 이현의 서늘하고 영리한 등짝.


이현의 짓이었다.

해원장의 썩어문드러진 비극의 가장 깊은 지하실에 똬리를 틀고 있던 것은, 야만적인 폭력이 아니었다. 가장 우아하고, 가장 이성적인 외면(外面)이었다. 폭력은 흔적을 남기지만 외면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더 오래, 더 깊이 사람을 죽인다.


어머니를 구하려 신의 율법마저 등지고 달려온 서하는, 제 등 뒤로 거대한 십자가가 산산조각 나며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바닥의 시퍼런 냉기가 무릎을 뚫고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들었으나, 서하는 일어서지 못했다.


신의 자비는 한없이 멀었고, 인간의 악의는 숨통이 끊어질 듯 가까웠다. 무릎이 찢어질 듯 아프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냉기가 당연했다. 이 아픔이 당연했다. 어머니가 십오 년을 감당한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눈물이 났다. 소리 없이. 서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로 그냥 울었다. 소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서하의 손을 쥔 손가락에, 아주 미세하게 힘이 실렸다.

뼈가 뼈를 잡고 있었다.




3

비슷한 시각. 해원 읍내.

산 24번지 대저택과는 뚝 떨어진, 시장통 뒷골목의 낡은 다방 건물 2층.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퀴퀴한 셋방에서 영숙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어제 수만이 해원장 안방 바닥에 놓고 갔던 유언장 원본과 등기 권리증은 이미 금고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 그것들은 기백과 이현의 숨통을 죄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다.


영숙이 홑겹의 얇은 블라우스를 통해 숨을 쉴 때마다, 가슴팍과 쇄골 언저리의 오래된 흉터들이 얼핏 드러났다. 짐승 같은 사내의 혁대 고리에 파이고 짓이겨져, 이제는 검붉은 나무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처들. 수많은 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제 입술을 깨물며 견뎌온 피멍의 흔적들이었다.


해원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영숙이 돈에 미친 요부가 아니라, 이 저주받은 땅바닥에서 가장 길고 지독하게 두들겨 맞으며 살아남은 여자라는 사실을.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해원장의 재산이 아니라, 이 끔찍한 제국의 완전한 파멸이었다. 최태국이 그토록 아꼈던 권력과, 그의 더러운 피를 이어받은 아들놈들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무너지는 것. 그것 하나였다.


여자는 이 땅에서 얻은 것이 없었다. 잃은 것만 있었다. 그러나 잃는다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두렵지 않았다. 이미 잃을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은 무섭지 않다. 그것이 영숙의 힘이었다.


영숙의 마른 손에는 수만이 가져다준 서류가 아니라, 아주 작게 접힌 종이 쪽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조금 전, 누군가가 소리 없이 문틈으로 밀어 넣고 간 것이었다.


쪽지에는 경찰서 조사실에서 꺾여버린 이현의 상황, 구치소 독방에서 미쳐가는 기백의 꼴, 그리고 막내 서하가 수도원을 나섰음을 알리는 서늘하고 단정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영숙은 이 보이지 않는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신과 수만을 장기판의 말처럼 부리며 최씨 일가의 숨통을 조여오는 또 다른 피해자. 유라. 영숙은 이미 오래전에 결정했다. 기꺼이 그 유령이 쳐놓은 거미줄의 가장 치명적인 맹독이 되어 주기로. 그 유령의 살기(殺氣)가, 제 뼛속에 사무친 한(恨)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으므로. 원래 독은 독을 알아본다. 피비린내 나는 같은 땅에서 자라난 독이라면 더욱.


지포 라이터가 찰칵, 하고 쇳소리를 냈다.

시퍼런 불꽃이 일었다. 영숙은 쪽지를 태웠다. 끝이 까맣게 말려 들어가던 종이는 이내 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다 비린내를 머금은 붉은 아침빛이 방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이현은 무너졌고, 기백은 미쳐가며, 가장 순결했던 막내 서하마저 진흙탕 속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영숙이 잿가루를 구둣발로 비벼 끄며 씁쓸하게 웃었다.

살아 있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벌은, 죽은 자들이 갚아야 할 댓가 보다 질기고 오래가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고인들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하였다."(코헬렛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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