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직진! 전진하라!

이력서 난감

by Marisol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자신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어처구니없이 인생의 바닥을 칠 정도로 힘든 역경의 시간을 겪게 되었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의 경우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다시 입사한 백화점에서 디자이너로 맹활약을 하며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몇 개의 대학교에서 입심 강한 강사로도 인정받는 등,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인생의 꽃이 활짝 폈다고 할 정도로 잘 나갔을 때,

자신만만하게 퇴사를 하고 무모하게 벌인 사업을 시작하면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공포의 IMF.


국가가 도산하게 된 상황 속에서 거래하던 패션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도미노처럼 처참하게 같이 무너진 회사들 중에 그녀가 운영했던 디자인 회사도 여지없이 공중분해 되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그녀는 그나마 직장 경력을 인정해 준 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또다시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헤엄칠 그녀 인생의 물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서울의 끝 태능에서 성남, 봉담, 천안과 아산, 안성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장거리 운전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냈던 열혈강사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항상 조용하게 말이 없던 대학원 동기가 다가와서 그녀처럼 매사에 전투적인 열혈여인을 찾고 있다는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우리 남편하고 같이 사업을 했던 분인데 새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일 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찾고 있다는데, 꼭 자기 같은 사람인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명함 한 장을 주면서 전화해 보고 찾아가 보라는 동기녀의 권유에 그녀는 약간의 의심과 고심으로 며칠을 보냈다.


왜냐하면 그 동기녀와 같은 시기에 석사과정을 지내면서 알게 된 몇 가지 사실 때문인데, 매사에 핑계와 변명으로 리포트 제출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연구발표나 테스트에서도 몇 번이나 하위점수를 받는 등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면모에 그녀로서는 전혀 호감이 가지 않았던 인물이 소개해 준 것에 대해 신뢰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교 강사로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그녀가 좋아하는 여행을 하거나 노화가 시작된 얼굴에 투자할 안티에이징 화장품을 쟁여놓는 등의 여유 있는 생활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며칠을 밍기적거리다가 그 동기에게 받은 명함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약간 거들먹거리는 말투의 사장이라는 남자는 이력서를 지참하고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사무실이 있는 양재동까지 도착했지만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울렁증이 왔다. 무슨 일이든 결정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전하는 그녀의 전투력에 사이드 브레이크가 걸린 듯 돌 뿌리에 걸린 전투화가 꽤 무겁게 느껴졌다.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서 불을 뿜는 것 같이 열을 토하고 있었다.


순간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가 기억났다.


차가운 겨울 날씨에 두꺼운 외투를 꼭 여미고 가는 나그네의 웃옷을 누가 먼저 벗기는가 내기를 하는 태양과 바람 이야기이다.


바람은 잔뜩 볼에 바람을 담아 물고는 나그네를 향해 힘껏 불어댔다. 하지만 그 나그네의 웃옷은 벗겨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단단히 여미고 벗겨지지 않도록 웅크리고 있었다.


태양은 바람을 비웃으며 뜨거운 열을 나그네를 향해 내려 쏘았다. 두꺼운 옷을 입은 나그네는 땀을 흘리며 자기 손으로 옷을 벗게 하여 결국에는 태양이 이겼다는 동화의 내용이다.


그녀는 뜬금없이 생각난 의미 없는 동화 속 나그네가 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를 낯선 분위기에 잔뜩 웅크린 그녀가 의심으로 두꺼워진 외투를 스스로 벗고 망설이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라는 듯, 불 같은 태양이 뜨거운 에너지를 뿜고 있다.


저벅저벅, 그녀는 무거운 전투화를 땅바닥에서 떼어 한 걸음 두 걸음 전진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간 사무실에는 무슨 물건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골판지 박스로 가득 쌓인 구석 한편에 등이 구부정하고 왜소한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얼굴만 출입문 쪽으로 돌려 비뚜름하게 째려보면서 들어오라고 팔을 들어 손짓했다.


무거운 전투화 차림에 총만 안 들었지 전쟁터에 돌진한 전투병처럼 그녀는 죽음을 각오한 굳은 얼굴로 입술만 움직이면서 여전히 삐뚜름하게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서혜란 씨 소개로 연락드린 강한나입니다.”


이력서를 접어 넣은 하얀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작고 거무스레한 피부, 눈동자보다 작은 눈구멍이기에 눈동자가 다 보이지 않아서 으스스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얼굴이다. 무엇보다도 눈 가장자리가 검은 아이펜슬로 칠 한 것처럼 눈자위가 까맣다.


얼핏, 캐리비언의 해적에 등장하는 영화배우 조니 뎁의 음흉하고 우스꽝스러운 눈을 닮았다.


조니 뎁은, 아니 조니 뎁의 눈을 닮은 그 남자는 봉투에서 이력서를 꺼내어 까만 눈자위로 게슴츠레 한참을 훑어 내려보고 있었다.


“이력서는 인생의 내역이지. 이력서를 보니 참으로 힘든 인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어. 열심히는 사는데, 그만큼 얻는 게 없는 답답하고 가련한 인생이야.”


무슨 개 뼉다귀 같은 말인가!


남의 이력서를 보고 막말이라니.


그녀는 벌떡 일어나 무거운 전투화로 뒤 돌려차기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찾는 바로 그런 사람이야.

차갑게 얼어붙은 맨바닥을 딛고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당찬 사람.

인생을 바람 가르듯 뚫고 맹진하는 전투사 같은 사람.

맘에 들어. 같이 일 해봅시다!”


그녀는 또다시 시작하는 전쟁터에 출전하는 여전사가 되었다.


남자는 그녀의 답답하고 가련한 인생을 적은 이력서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으면서 조니 뎁의 눈을 치켜뜨며 광대뼈를 실룩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쉬지 않고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다니는 쇠파리가 단순 간에 천리를 날아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나?”


남자는 소파에 허리를 깊게 파묻고 삐딱하게 다리를 꼬면서 니코틴으로 거무스레 물든 이빨을 드러내며 여전히 삐뚜름한 입술로 비아냥거리듯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단단한 전투화를 딛고 일어서면서 그녀는 대답했다.


“천리마 엉덩이에 딱 달라붙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면 되죠.

사마천의 이야기이죠.

그런데 어쩌죠?

저는 쇠파리가 아닙니다.


저는 전쟁터 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 인생을 승리의 길로 조정하는 전투기 조종사입니다.

천리마보다 빠르게 날죠.”


뚜벅뚜벅 전투화 소리를 남기고 문을 닫고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남자는 입술을 씰룩이며 혼잣말을 했다.


“역시 맘에 들어. 저런 전투력을 가진 사람이래야 나하고 하는 어떤 일이든 버텨내지.”


사무실에서 나온 그녀는 아직도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두꺼운 외투를 벗었다.

사장이라는 남자와 눈에 힘을 주고 말전쟁을 하느라 정장 외투의 겨드랑이 부분이 땀으로 젖어 축축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지 안 물어봤네.


젠장!’


누구랑, 언제, 어디에서 전투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전쟁이라니…

쩝.


하지만,

뭐든, 어디에서든, 누구하고든.


그녀는 거리낄 것이 없다.


인생직진!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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