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깡패는 그만!
100평 남짓의 사무실을 줄자로 대충 실측을 하고 나름 합리적인 공간 분할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완성된 도면을 가지고 논현동 사무실로 갔다.
역시 그날도 화려한 무늬의 셔츠를 입은 남자 세, 네 명이 반듯하게 줄을 잡은 갈치색 정장바지 주머니에 양쪽 손을 집어넣고 거들먹거리는 걸음으로 사무실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입었던 원색적인 컬러의 화려한 페이즐리 무늬의 셔츠와는 달리 이번에는 여러 마리의 말 그림이 그려진 에르메스 셔츠를 입은 남자에게 다가가 서로 호의를 품지 않은 터이므로 인사도 생략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저기 에르메스 씨, 사장님은 어디에 계시죠?”
“뭐? 에르메스라니? 그게 뭐여?”
그녀가 돌아서며 씨익 웃었다.
조니 뎁 사장의 오케이 사인에 도면대로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하고 그녀는 필요한 책상과 파티션, 컴퓨터, 복사기 등 사무기기 수량을 체크하고 발주하기 전에 사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부서는 어떻게 구성하고 직원은 몇 명입니까?
직원 수에 맞추어 책상을 그룹으로 배치하고 부서별로 전화선이나 컴퓨터 라인을 깔아야 해서요.”
“일단 도면에 그려진 대로 채워 넣을 수 있을 만큼 발주해.”
“네? 그럼 조직 구성은요?”
“뭐가 그리 급해? 천천히 하자고.”
이대로 계속 조니 뎁의 명령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그녀는 조니 뎁과의 공생에 종지부를 찍을 결심한 듯 물었다.
“사장님, 도대체 무슨 사업을 하시는지, 저 남자들은 뭐 하는 사람들인지, 저는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설명을 해 주십시오.
아무것도 모른 채 이렇게 질질 끌려 다니다시피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앉아.”
삐딱하게 든 얼굴에 게슴츠레 뜬 눈 사이로 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위협하는 듯 째려보며 새로 설치한 가죽냄새 풀풀 나는 소파의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길래 그녀는 절대, 정신 줄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등을 꼿꼿하게 세우며 풀썩, 앉았다.
예상외의 대답에 그녀는 황당했다.
아니 당황했다.
그녀는 조니 뎁이 담배 케이스에서 기다란 외국산 담배 한 개비를 꺼내고 금색 듀퐁 라이터로 쨍, 하고 소리가 나게 담뱃불을 붙이는 사이에 황당과 당황의 차이를 생각했다.
소변을 보러 화장실 변기에 앉았는데 설사를 해 버린 것이 황당.
볼 일을 봤는데 휴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당황.
그럼 이 상황은 뭐지?
회사 이름은 조니 뎁 사장의 이름을 따서, ‘JT 코리아’로 정했다고 했다.
조니 뎁 사장의 이름은 이 종태, 코리아는 유통사업을 글로벌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로 붙였다고 했다.
남대문에서 옷장사를 하면서 그 일대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장사꾼들을 상대로 일수를 놓고 사채사업을 하고 있던 어떤 사람의 뒤를 봐주면서 세력을 키웠고, 그 덕분에 정치계와 기업인들을 돈줄로 연결하는 잡무를 하면서 지금은 하고자 하는 일에 걸리적거리는 일을 아주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커졌다는 조니 뎁, 아니 이종태 사장은 자신의 역량을 자랑하듯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내 처남 알지? 내 처남은 직위를 이사로 정했고, 강한나 씨는 과장, 과장이면 되겠지?”
집에 들여온 버려진 반려견 이름을 붙이듯이 직위를 마구잡이로 정하고 의사타진도 없이 통보했다.
호랑이 셔츠, 아니 조지혁이라고 하는 남자는 서울 변두리의 조직 폭력배단의 넘버 투였는데, 그 지역에 있는 호텔 나이트클럽의 경영권을 두고 경쟁하던 옆동네 조직들과 싸우게 되었고, 그 패싸움에서 살인을 하게 된 두목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10년형을 받게 되었다. 8년 동안 그 어두운 곳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경제, 경영 관련 서적을 읽으며 유통사업의 초석을 다지는 등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하다가 이번 광복절 특사로 나왔다고.
하면서 조니 뎁, 아니 이종태 사장은 두 개비째 담배를 재떨이에 끄면서 검은 아이라인의 눈자위를 치켜올려 이제 됐나? 하는 의미의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더 자세한 건 조이사한테 직접 물어봐.
조이사도 애들 데리고 곧 올 거야.
정식으로 인사해.”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망설이던 때에 엘리베이터 앞이 어수선하게 시끄러워지면서 그녀가 주문한 책상과 사무기기들이 도착한 바람에 한 마디 대꾸 할 겨를도 없이 얼떨결에 업체 직원들에게 배치도면에 맞게 배치하도록 정신없이 지시하고 있었다.
한 바탕 전쟁 같은 작업이 끝나고 창문 쪽 책상에 걸터앉아 멍 때리고 있는데, 며칠 전 호랑이 셔츠를 입고 왔던 남자가 이번에는 웅장한 갈기를 목에 두른 커다란 숫사자 그림이 그려진 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그 자리가 맘에 들어요?
그럼 난 이 자리.”
하면서 숫사자가 아니, 이사라고 정해진 남자가 바로 옆에 배치한 그룹의 팀장용 책상에 걸터앉았다.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던 일수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이빨이 보이도록 입을 벌려 어설프게 착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관등성명을 하고 인사를 건네는데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가 뜬 앞니가 보였다.
순간 그녀는 푸훗, 하고 웃어버리는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렇게 반가워요?”
오른쪽으로 입술을 치켜올리며 숫사자가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잠깐만요. 이사님!
책상에서 엉덩이를 펄쩍 내리며 그녀가 정색을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숫사자는 연기를 하듯 움찔, 놀라는 척하면서 그가 데리고 들어 온 화려한 셔츠의 똘마니들을 향해 능글맞은 소리로 명령했다.
“애기들아. 여기 사무실은 금연이란다. 다들 잘 들었겠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저 여자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합니까 형님?”
“앞으로 여기에서 일하려면 저기 강 과장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알겠어?”
숫사자가 담배를 도로 담뱃갑에 넣으면서 실실 웃음을 흘리며 똘마니들을 몰고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피던 놈, 담배를 피우려고 했던 놈, 담배를 안 피웠던 놈 모두 조지혁 이사를 따라 나가며 불평을 지껄였다.
“형님. 저 여자는 깡패인 우리가 무섭지도 않은가 봅니다.”
왁자지껄 시끄러웠던 사무실에서 깡패들이 사라지자 적막감이 돌았다.
사채업자의 뒤를 봐주다가 세력을 키웠다는 조니뎁을 닮은 사장과,
살인을 한 두목 대신 감빵생활을 하고 광복절 특사로 나온 조직 폭력배 넘버 투.
언젠가 다시 후일을 도모할 것을 기대하면서 의리를 지키며 8년 동안 넘버 투를 기다렸던 똘마니들.
과연 그녀가 다시 뭉친 그들과 같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가득 찬 어두운 고뇌가 땅거미와 함께 사방을 둘러싼 창문을 점령하기 시작하더니 사무실이 캄캄해졌다.
논현동 거리의 화려한 불 빛이 그녀의 머릿속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고뇌를 비웃듯이 유리창에 투과되며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믿는 건 깡 밖에 없는 민간인이다.
깡패와는 다른 민간인.
깡패들을 몰아버린 용감한 민간인 강한나도 한차례의 전쟁을 종료하고 이만 퇴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