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향을 품은 새로운 꽃을 피우길…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어 작년 하반기에 몇 개의 프로젝트를 끝내고 난 이후에는 부동산 개발기획 업무 의뢰가 없다. TV 뉴스를 보거나 지인들을 통해서 다들 사는 사정을 들어보면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닌 것 같다. 대출 금리가 높아서 공실(空室)을 껴안은 상업시설은 총체적 난국이라고 하며 부동산 신규 사업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인크루트’와 같은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하고 몇 개의 구인광고를 올린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내 이력서를 열람하거나 전화로 연락을 한 기업은 대개 보험설계사 사무실 또는 인터넷 상품 판매 회사이다. 허울 좋은 다단계 회사는 관심 없다고 거절했다.
지역 구직 사이트인 벼룩시장에도 간단한 이력서를 등록하고 집에서 가까운 곳을 기준으로 일자리를 찾아봤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정말 많은 회사가 도산하고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들도 줄줄이 폐업했나 보다. 고용주 측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나 같이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은 일 할 곳이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닌가.
의류 판매점과 같은 곳의 구인란을 찾아서 몇 군데 문의를 했지만 벌써 재빠르게 움직인 젊은 사람으로 채용이 마감되었다고 한다. 인터넷 구인광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
지인들과 자주 갔던 낙지요리점에서 직원을 구한다기에 전화 문의를 했다.
몇 살 이신가요? 하고 물어봐서 나이를 대답했더니 벌써 구했다고 한다.
첫 번째 퇴짜.
집에서 가깝고 주차하기도 편한 해장국 전문점에도 전화 문의를 했다. 한번 와보라고 해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약속시간에 맞춰 나섰다. 식당 사장님이 나를 보고 처음 한 말이 ‘여기 일 무지 힘들어요.’이다. 뜨거운 해장국 뚝배기를 나르는 카트가 있어서 그리 무겁지 않을 것 같은데요 했더니, ‘하루에 300그릇 팔려면 날아다녀야 해요~.’ 하면서 작은 체구의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저녁까지 연락을 준다는 해장국집 사장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두 번째 퇴짜.
친구 은영이의 말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인간은 나이가 들면 몸을 움직이는 속도가 느려지게 돼서 민첩하게 움직이기 힘들게 된다고 한숨을 쉬면서 걱정을 했다. 식당 사장들이 꺼려하는 이유라고 한다. 하긴 빨리빨리를 외치는 대한민국 정서는 식당 현장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긴 하지.
‘이모님! 여기 제일 빨리 되는 게 뭐예요?’
‘사장님! 우리 주문한 음식 아직 멀었나요?’
식당에서 많이 듣는 불만이다.
내가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는다고 하니까 옛 직장 후배들은 안쓰러워했다. 아니, 안타까워했다. 친구 운미는 생전 안 해 본 일을 어떻게 하냐고 전화 너머 목소리에 걱정이 늘어 붙었다. 험하거나 하찮은 일이더라도 나름의 소신과 의미를 갖고 한다면 못할 게 뭐가 있나.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일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름이 예쁜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직원을 구한다고 구인 사이트에 올라왔다. ‘겨울 아침 창가에서’ 이것도 재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놓칠 새라 바로 전화를 했다. 레스토랑에서 정규직으로 일한 경력이 없지만 예전에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다고 했더니 면접을 보자고 했다.
봄이 시작되는 화창한 날에 차를 몰고 면접장소로 가면서 상상을 했다. ‘겨울 아침 창가에서’라는 이름의 레스토랑. 커다란 창가에서 바라보는 가로수 길, 나뭇가지 위에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면서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두운 공간에 천장과 특정 벽 쪽에만 보라색과 마젠타 색의 조명이 켜져 있고 등받이가 높은 소파가 창가에 늘어서 있어서 넓은 레스토랑 공간을 둘러싼 창문이 거의 가려져 있었다. 정문 출입구의 반대쪽에는 단이 높은 공연 스테이지가 있었다. 순간, 여기가 아닌가 하고 다시 나와서 간판을 확인했다. 여기 맞는데?
라이브 카페 레스토랑이라고 했다. 공연 스테이지가 잘 보이도록 창문에 시트를 부착해서 햇빛을 차단했다고 한다. 레스토랑 대표는 그간의 연혁을 설명하더니, ‘내가 마음에 들어도 셰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안 되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더니 셰프를 부르러 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주방 보조’라고 한다.
호텔 레스토랑 셰프들이 입는 하얀 가운과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테이블 건너편에 앉았다. 동그란 얼굴에 눈도 동글동글, 코도 입도 못난 데가 하나도 없이 동글동글한 선하고 순하게 생긴 청년이다. 매일 TV를 통해 ‘턱이 뾰족하고 부리부리하게 큰 눈을 치켜뜨는 꽃 미남 연예인’들만 쳐다보다가 동글동글한 미남을 보니 깜깜한 ‘겨울 아침 창가’에서 곤혹스러웠던 내 마음까지 동글동글해졌다.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셰프는 ‘모처럼 오셨는데 커피라도 한잔 드릴게요. 마시고 가세요.’하며 자리를 떴다. 볼일을 마친 레스토랑 대표가 돌아오더니 ‘셰프 하고는 면접이 끝났나요?’해서, 아니요. 커피 주신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에요. 했더니 ‘셰프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커피까지 직접 갖다 준다니. 출근 언제부터 하실 수 있어요?’
집으로 돌아와 이제 일을 하게 되면 바쁠 테니 시간 있을 때 해 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방 안 여기저기에 놓아둔 초록색 화분에 물을 갈아 주려고 살펴보았는데 시들어서 죽었다고 방치해 둔 난(蘭) 화분을 새삼스럽게 보니 꽃대가 두 개나 올라와 어느새 꽃이 피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물만 줬는데 기특하게도…
게으른 주인의 무관심으로 죽었다고 포기했던 난(蘭) 꽃이 은은하고 그윽한 향을 풍기며 소곤소곤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 어떤 일이든 소신과 의미를 가지고 한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어요.
당신의 인생에서도 새로운 꽃대가 나와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당신의 인생처럼 깊이 있는 은은한 향을 품은 꽃이 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