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투원 - 처음 만들어본 경험이 가장 오래갑니다

스타트업이라 다행이야 | 3편

by 마케터호야


회사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게,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신규 무료 고객을 모아라!

무료고객이라니. 공짜로 서비스를 쓰게 해 준다는 거였죠. 조금은 쉽게 생각하며 66명한테 콜드 이메일을 보냈는데 단 하나의 답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가의 서비스를 공짜로 쓰게 해 주겠다는 제안이었는데, 고작 1명이라니요.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저 조금씩 바꿔가며 먹히는 대상이 나타나길 바라며 저희는 시도를 지속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처음 뭔가를 만든다는 건 이런 거더라고요. 예상해 보고, 깨지고. 정답을 알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하다 보니 알게 되는 것 말입니다.


회사도 나도,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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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제로투원입니다.

제로투원(Zero to one).


기존 시장에 뛰어드는 대신,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서 만들어나간다는 페이팔(PayPal)의 공동 창업자이자 투자자인 피터 틸(Peter Thiel)의 ‘창조적 독점’에 대한 개념이죠.

제게는 스타트업의 초기 모습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입사했을 때 준비된 것은 서비스의 MVP였습니다. 사업 아이템이 만들어져 있었고,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 정도였죠. 나머지는 전혀 없었어요. 고객을 어떻게 모을지, 고객을 위한 웹사이트는 어떻게 만들지, 잠재고객 데이터는 어디에 쌓을지. 다 처음이었죠.


회사도 처음이었고, 저도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잘 준비해서 시작한 게 아니라, 일이 주어지면 그걸 하기 위해 필요한 걸 배웠어요. 일에서 배웠고요. 학습이 제게 주어진 업무 중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웹사이트의 제로투원 — 원페이지에서 멀티페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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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했을 때 회사엔 원페이지 웹사이트가 있었어요. 회사와 비전을 소개하는 수준이었죠. 입사 후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오픈할 시점이 되면서, 서비스를 제대로 설명하고 유입까지 시킬 수 있는 웹사이트가 필요해졌습니다.


세일즈 팀원, CEO, CCO와 함께 기획하고 디자이너와 개발자가 만드는 흐름이었어요. 저는 기획과 콘텐츠를 맡았는데, 그러려면 서비스 자체를 먼저 이해해야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엇을 믿고 제게 맡겨주셨는지…?) 생명과학 전공이었어도 유전학과 유전자검사는 낯선 영역이었거든요. CEO, COO, 세일즈 매니저한테 배우고, 회사에서 기초 학습을 위해 전달 주신 영어로 된 온라인 유전학 강의를 들으면서 시작했어요.


웹사이트 구조에 대한 것 또한 처음이다보니, 블로그와 유튜브 등을 통해 배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페이지가 필요한지, 어떤 순서로 보여줘야 하는지. 마케팅적으로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그 요소들을 알아갔습니다.


GA(Google Analytics) 설치 준비도 제 몫이었어요. 사용자 행동 추적을 위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구글 공식 강의, 블로그, 유튜브를 찾아가며 공부해서 CTO에게 보고하고 세팅했습니다. 그렇게, 고객을 모집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요소가 담긴 랜딩페이지 같은 웹사이트 V.1이 완성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부분도 있어요. 웹사이트 개선을 더 빨리, 더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2023년 말부터 이미 사용자 행동을 개선하기 위한 실험을 시작할 수 있는 만큼 트래픽이 모이고 있는 상태였는데, 본격적으로 신경 쓰기 시작한 건 2025년 말이 됐을 때였거든요.


리드의 제로투원 — 66명에서 수십만 명으로, 그리고 다시 좁히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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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P가 이제 막 갖추어진 저희 서비스의 앞으로를 위한 가장 중요한 자산은 ‘환자들의 진단 데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료 고객을 모으려고 했던 거죠. 전 세계를 대상으로 빠르게 시도해 보기 위한 방법은 바로 논문 수집이었습니다. 수집한 서비스 관련 논문의 저자인 의사들의 정보를 활용한 콜드 이메일이었어요.


크롤링된 리드의 정보를 추리는 동안 더 늦출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저희의 첫 발송 대상은 66명의 리드. 1명이 답했습니다.


무료로 이 좋은 걸 쓸 수 있는데 왜 반응이 없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무료로 이 좋은 걸 쓸 수 있는데 왜 반응이 없지? 제목을 바꾸고, 버튼 문구를 바꾸고, 내용을 바꾸면서 계속 시도했습니다. 단시간에 빠르게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그냥 계속했어요. 이제는 다수의 리드를 추가해 더 본격적인 시도를 해야 할 때였습니다. 이때 모은 의사와 연구자 정보를 수십만 명의 규모였습니다. 발송 규모가 급격히 커진거죠.


회사 이메일 전체가 스팸 도메인으로 차단됐습니다. 마케팅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직원의 이메일이 다 막혀버린 거예요. 스티비로 대량 발송한 이메일이 구글 스팸 필터에 걸린 거였습니다. 인터넷을 뒤지고, 구글에 서포트 메일을 보내고, 스티비 담당자와 여러 차례 연락한 끝에 하루 만에 겨우 해결했어요.


이 사고 이후 전략이 바뀌었습니다. 실시간 자동 이메일을 쓰지 않기로 했어요. 대신 목록을 지역, 언어, 키워드로 세분화해서 발송하기 시작했고, 제목과 메시지 테스트를 훨씬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스팸 사고가 오히려 전환점이었어요. 많이 뿌리는 게 아니라, 맞는 사람에게 맞는 메시지를 보내는 방향으로 더 빠르게 전환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데이터 관리의 제로투원 — 시트에서 Salesforce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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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규모가 커져갈수록 데이터도 커지고 복잡해집니다. 저희의 처음은 다른 많은 서비스가 그렇듯 스프레드시트였습니다. 비록 메일 발송 대상자였던 프로스펙트(Prospect; 구매의사를 확인하지 못한 리드)는 수십만 명 있었지만 정작 연락 중인 잠재 사용자인 리드는 수십 명 있을 뿐이었고, 고객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다행히 구글 공유 시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서로 변하고 쌓여가는 데이터를 볼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인원이 늘어가며 점점 더 산재된 시트에 잠재고객 정보가 정리되기 시작했어요.


무료 고객 확보도 많아지다 보니 CS 목적의 CRM 툴이 필요해졌습니다. 누가 이 사람에게 언제 연락했는지 알아야 중복 연락을 방지하고 더 효율적으로 대상을 놓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Freshdesk를 쓰다가 HubSpot 무료 플랜으로 넘어갔어요. 저렴한 유료 플랜까지 써봤는데, 회사가 성장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세일즈팀의 리드와 마케팅팀의 리드가 겹치거나 놓쳐지는 이슈가 생긴 거죠.


그래서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 2021~2022년쯤 - Salesforce Sales Cloud를 도입하게 됐습니다.

지금 돌아봤을 때 당시에 일하던 사람들끼리 잘 결정했다 싶은 게 있다면 이거예요. 잠재고객 데이터 풀을 초기부터 쌓기 시작했다는 것. 2024년부터 이 사람들의 Nurturing을 통해 가입과 매출이 명확히 눈에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앞서 심은 씨앗이 몇 년 뒤에 열매가 됐습니다.


하다 보니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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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다양한 제로투원 경험이 커리어에서 어떻게 도움이 됐냐고 물어본다면, 두 가지를 얘기하고 싶어요.

첫째, 무에서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어떻게든 하면 된다는 걸 수년간의 경험으로 익혔어요. 모르면 찾으면 되고, 틀리면 다시 하면 됩니다.

둘째, 잘 준비해서 시작하는 것보다 빠르게 시작해서 여러 번 시도하는 게 낫다는 것. 이걸 확실히 경험했습니다. 잘 준비해서 시작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있는데, 초기 스타트업에서는 상황이 급변해 갑니다. 타이밍에 따라 많은 것을 잃게 될 수 있죠.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보면 솔직히 말하면 부족한 것도 있어요. 제로투원은 경험했지만, 원투텐 — 이미 돌아가는 걸 폭풍 성장시키는 경험은 부족합니다. 이건 여전히 제 과제로 남아있어요.


마치며


지금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 있다면, 그게 오히려 기회일 수 있어요.

정답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불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근데 어차피 처음엔 다 모르거든요. 회사도, 나도.


하다 보면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쌓이는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값진 자산이 돼요.


혹시 지금 비슷한 상황에 있나요? 처음 만들어보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 이야기 들려주세요.


스타트업이라 다행이야 |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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