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이라 다행이야 | 4편
스타트업이 헤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수 차례 피벗(pivot)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흔한 일이고요.
입사 초기를 지금 돌이켜보면, 매일 미친 듯이 몰입할 만큼의 양의 업무가 있지는 않았어요. 사실 좀 들쑥날쑥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은근한 불안 요소였지요. (아마, 회사도 불안했겠죠?) 내가 충분히 내 역할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뭔가 더 만들어 해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많이 됐었습니다. 그럼에도 뭘 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아 보이기도 했고요. 아니, 제가 아직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던 것이었을 수도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도 분명히 겪을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어요. 야근, 빠른 실행, 끊임없는 몰입. 100%를 불태우면서 만들어가는 실패와 성공의 경험.
물론 사실입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업무에 내 역량의 100%를 태우며 달려간다는 게 사실상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설령 가능하다 해도 현명한 일인지는 모르겠달까요?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쇼핑조차 길어지면 다리가 아파 쉬어가야 합니다. 물도 좀 마시고, 화장실도 좀 다녀와야 하죠. 좋아하든 싫어하든 힘든 활동에 속하는 ‘일’이 이보다 나을까요.
에너지는 둘째 치더라도, 회사 업무에만 매몰되면 새로운 시각이 필요할 때 그 시각이 들어오기 어렵습니다.
특히나 스타트업이라는 환경 상, 사내에 충분한 경험이나 레퍼런스, 아이디어가 흐르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도 한몫하지요. 생사를 결정짓는 도전적인 목표에 창의성이 필요한 순간, 아이디어와 영감은 보통 일 안에서 오지 않아요. 전혀 무관해 보이는 활동 — 예술을 보거나, 놀거나, 쉬거나 — 그런 데서 오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전사적으로 야근을 하는 문화(“이게 문화라니?!”)도 아니다 보니 정시 출근과 퇴근을 마치면 저는 여러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예술 전시를 보러 갔습니다. 전시품을 통한 미감 충전 외에도 잘 기획된 공간과 굿즈에서 아이디어와 재미를 찾았습니다.
박람회를 보러 갔습니다. 책, 커피, 포스터 등등. 수많은 크고 작은 회사들이 모여 세일즈/마케팅하는 자리는 밀도 있는 학습의 경험이었어요.
팝업 매장을 찾아다녔습니다. 성수동을 걸으면서 새로 생긴 브랜드들을 들여다봤습니다. 슈퍼말차 같은 공간을 보며 공간의 톤, 메시지, 고객과의 거리감을 유심히 봤어요. 한 번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정을 찾아보고, 제품도 사봤습니다.
이런 관찰과 학습이 너무 재미있어서 성수동 브랜드 아카이빙 인스타 계정을 만들기도 했어요. (지금은 업데이트를 못 하고 있지만요 하하!) 사 본 적 없던 잡지를 읽고, 책을 읽고, 모임에 들어가고, 좋아하는 브랜드를 더 깊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취향을 찾아가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클라이밍에 빠져서 동료와 함께 옷을 직접 만들어 팔아보기도 했습니다. 늦은 밤,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던 그날도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일인지 취미인지 모르는 활동에서 가장 즐겁게 배워나갔던 것 같아요.
두낫띵클럽, 모배러웍스 같은 브랜드를 보면서 단순히 "멋있다"에서 끝나지 않고, 왜 이 구조가 사람을 끌어당기는지 생각하게 됐어요. 제품보다 세계관이 먼저고, 단순한 물건의 판매보다 이야기가 앞서는 방식. 그 태도가 좋았습니다. 그걸 브랜딩이라고 한다는 걸 알게 됐고요.
마케팅 방식 그 자체는 사실 배우면 되는 거예요. 툴을 익히고, 채널을 배우고, 프레임워크를 공부하면 됩니다. 근데 그전에 필요한 것들이 있어요.
"고객은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어떤 회사로 비추어져야 하는가?"
이런 고민들은 업무 안에서만 앉아 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전시를 보고, 브랜드를 찾고, 취향을 쌓아가는 그 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거였습니다.
쉬기 위해 달려가는 일이 아니라, 일에 도움이 되는 쉼. 이게 저한테는 상당히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쓰는 시간과 돈이 낭비가 아니라니?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채워지는 느낌이었던 거죠. 채우고, 일에다 쏟아붓는 사이클. 항상 모든 것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건 당연한 거고요!
물론 이게 모두에게 맞는 방식은 아닐 수 있어요. 하나에 완전히 몰입해서 최고의 성과를 내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았을 뿐이에요. 지금까지 제게는 이 방식이 맞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지는 모르는 일이긴 합니다 ㅎㅎ
지금 저는 퇴사하고 쉬고 있습니다.
근데 단순히 쉬기 위한 쉼은 아니에요.
7년간 있었던 곳에서 더 이상 새롭게 배우는 것이 느려졌고, 다음을 위한 준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한 퇴사였습니다. 회사를 다니며 양다리 걸치는 게 아니라, 온전하게.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40년간 광야를 걸었던 이야기가 있어요. 노역을 멈추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으로 가는 여정. 그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예상치 못한 이적들을 만났죠.
저도 그 마음이에요. 아직 배울 게 많고 갈 길이 멀지만, 다음 행선지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곳을 기대하며.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채우고 있어요.
숨 쉴 틈이 있어야 새로운 게 들어옵니다.
항상 바빠야 성장한다는 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지금까지는요.
채우는 시간이 있어야 쏟아부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채우는 시간이 낭비처럼 느껴질 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일 수 있습니다.
지금 너무 소진되고, 일과 집 외에 그 무언가를 위한 에너지가 전혀 없다고 느껴지시나요?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봐볼까요.
마지막으로 일과 전혀 무관한 걸 해본 게 언제인가요?
릴스, 숏츠를 스크롤하는 것 말고, 늦은 잠을 몰아자는 주말 말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 보고 행동으로 옮겨 본 때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