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나를 알아줄 회사는 많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이 말을 뱉고 난 후 내 머릿속은 어떤 회사로 이직한다고 거짓말할까에 대한 궁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제일 야근 많이 하는 사람이었던 건 옆 팀에서도 다 아는 사실이었기에, 이직할 곳도 없이 그만둔다고 말하면 회유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일이 힘들어 도망치는 모습은, 그게 사실임에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애써 웃으며 다른 회사로 가게 되었다고, 직무도 맞고 연봉도 맞춰 준다고 말했는데도 본격적으로 '귀한 호구 잡기'가 시작되었다. 군말 없이 주말이고 연차고 기꺼이 반납하는 이런 호구는 다신 없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리라. 연차 날도 '나와야겠는데?' 한 마디면 난 달려 나갔다. 뒤에서 울지언정 결국 군말 없이 혼자 처리하는 애였으니까.
- 같이 일하는 인원을 늘려주겠다
- 팀을 바꿔주겠다
- 네가 이직한다는 그 회사는 분위기가 안 좋다
- 연봉 상승 여기만큼은 못 할 것이다
일주일간 출근만 했다 하면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일하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주겠다는 회유부터 그 연차에 지금보다 많이 받기는 힘들 거라는 가스라이팅까지 방법은 다양했다. 사실 팀을 바꿔준다는 이야기에는 솔깃했지만, 커리어와 전혀 상관없는 팀인 데다가 같은 회사에 계속 다니며 힘든 일에서만 혼자 빠져나가는 그림은 내 호구 같은 성격상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퇴사를 앞두고 인수인계가 시작됐다. 인원이 많이 필요하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혼자 해왔던 내가. 그렇게 새로 배정된 인원은 총 5명이었다. 그들은 내가 그만두지 않는 한 영원히 이 업무에 배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퇴사만이 벗어날 수 있는 굴레였음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인수인계를 받던 중 메인 담당자가 '이걸 어떻게 혼자 다 하셨어요?'라고 물었다. 대면으로는 차마 다 하지 못해 집에 가서 인수인계 파일을 만들었을 정도니. 정말 다들 내가 힘든 걸 몰랐던 걸까, 아니면 필사적으로 모른 척했던 걸까?
그렇게 우리 엄마 아빠를 잠시나마 기쁘게 해 준, 내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한, 한 때는 자랑스러웠던 회사를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걸어 나왔다. 왜인지 명패와 명함은 꼭 챙겨가지고서.
뭐가 그리 급했는지 많게는 하루에 세 군데씩 면접을 보러 다녔다. 일밖에 모르고 살던 사람에게 일이 없어졌다는 것은, 자유라기보단 상실에 가까웠다. '일하지 않는 나'는 존재 가치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면접 날이 다가왔다. 사실 이 회사는 나에게 1년 전부터 오퍼를 보내왔던 곳이었다. 분명 상호 간 납득이 잘 되는 포지션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움직였던 건 배려 넘치는 면접 분위기였다.
- 혹시 대답하기 싫으시면 안하셔도 됩니다.
- 예민할 수 있는 질문에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감히 평가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닙니다.
-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상태여서일까, 존중 받는다는 느낌만으로도 이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결과는 합격이었고, 연봉도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제시 받았다. 백수가 된 지 한 달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날부로 알게 되었다. 세상은 넓고 나를 알아줄 회사는 많다는 것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