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브랜드가 일본에서 태어나 올리브영에 오기까지
화장품이 아니라 케이팝에 대한 질문이라 놀라셨나요? 잠깐만 저와 함께 생각해봐 주세요.
하이브가 미국에서 결성한 걸그룹 캣츠아이(KATSEYE)는 케이팝인가요? 한국인 멤버가 한명 포함되어 있지만 그 외 멤버들은 한국인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미국 시장을 타겟했기 때문에 멤버들은 ‘한국어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인 멤버가 영어 공부를 했죠.) 하지만 HYBE의 시스템으로 훈련받았고, K팝의 문법으로 데뷔했습니다. JYP가 일본에서 런칭한 NiziU는 어떨까요? 전원 일본인이지만 한국식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탄생했고, 한국 스타일의 퍼포먼스와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넷플릭스와 소니픽처스가 합작한 애니메이션 「K-POP Demon Hunters(케이팝 데몬헌터스)」는요? 한국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 실존 아이돌도 아닙니다. 그런데 세계 사람들은 이것을 '케이팝'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한국에서 시작한 특유의 트레이닝 시스템, 세계관, 팬덤 문화, 퍼포먼스 스타일 — 이 공식을 따르면 만든 사람이 누구든, 어디서 만들었든 케이팝이 됩니다.
지금, 케이뷰티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산 화장품'이 아닌, '한국적 감성과 기술로 만든 화장품'이 케이뷰티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 일본의 레인메이커스가 있습니다.
2019년에 시작된 이 회사는 브랜드를 만드는 공식이 명확합니다. '이 화장품을 쓰면 이렇게 예뻐진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 메이크업 아티스트, 뷰티 크리에이터, 인플루언서 — 을 브랜드의 중심에 세웁니다. 그 사람이 직접 제품을 기획에 참여하고, SNS와 YouTube로 팬에게 직접 설명합니다. 광고가 아닌 신뢰입니다. 팬이 사는 게 아니라, 믿는 사람의 추천으로 삽니다.
2021년 CipiCipi(シピシピ)를 첫 브랜드로 론칭한 이후, 이 공식을 반복하며 현재 약 15개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Rainmakers의 브랜드들은 위 공식대로 각각 다른 사람의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뷰티 크리에이터 후쿠레나(ふくれな)가 프로듀스한 CipiCipi는 "콤플렉스를 아군으로 바꾼다"는 컨셉으로 10~30대 여성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카와키타 유스케(河北裕介)가 프로듀스한 &be는 피부 본연의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스킨케어&메이크업 라인입니다. AKB48 출신 카시와기 유키(柏木由紀)의 upink, 모델 카와니시 미키(かわにしみき)의 muice, 피겨스케이터 출신 혼다 마린(本田真凜)의 Luarine까지. 각 브랜드는 프로듀서의 팬덤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Rainmakers는 크리에이터의 팬덤에만 머무르지 않기 위한 전략도 의식적으로 구사합니다. CipiCipi의 경우 2025년 브랜드 앰버서더로 NCT WISH를 발탁했습니다. 뷰티 크리에이터의 팬덤에서 시작했지만, K팝 팬덤과 연결하면서 타깃층을 더 넓게 가져가는 전략입니다. 2024년 10월 론칭한 tilnus는 한일 공동 개발로 탄생했고, 이미지 모델로 NiziU를 기용했습니다. 이처럼 프로듀서 역할을 맡은 인플루언서 / 크리에이터 외에도 아이돌과 엔터테인먼트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한편 Rainmakers는 자체 브랜드 외에 한국 코스메틱 브랜드의 일본 공식 대리점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스킨케어 브랜드 Abib(아비브)와 색조 브랜드 NAMING.(네이밍)의 일본 정규 수입 판매를 담당하며, 한국 최신 트렌드를 빠르게 흡수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Rainmakers의 브랜드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Wonjungyo(ウォンジョンヨ, 원정요)입니다. 이 브랜드는 한국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원정요 씨가 말 그대로 본인의 이름을 걸고 만든 브랜드거든요.
원정요씨가 일본에서 압도적인 지지도를 가지게 된 배경에는 일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TWICE의 전속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점이 컸습니다. 한국 아이돌 특유의 “애교살 메이크업”의 창시자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합니다.
Wonjungyo는 사실 2021년 출시 초반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브랜드가 히트한 것은 레인메이커스와 손잡고 일본에서 리뉴얼 런칭을 한 2022년 - 런칭 직후부터입니다.
일본에서의 성공은 운이 아니였습니다. “애교살 메이크업의 창시자”가 만든, 누구나 한국 아이돌 같은 아이메이크업을 할 수 있는 제품 - 명확한 타겟과 컨셉 아래에 그걸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모델(앰버서더) 선정.
성공적인 런칭 후 4년간 일본에서 “정작 한국인은 모르는 일본 속 한국 브랜드”로 인기를 끌던 원정요는 2026년 3월 27일, 드디어 한국 올리브영에 입점했습니다.
한국인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일본 회사를 통해 일본에서 히트를 친 뒤, 한국 시장에 역수출된 것입니다. 케이팝의 문법이 국적을 초월했듯, 케이뷰티의 감성도 이제 한국 화장품 회사를 경유하지 않고도 작동하기 시작한거죠.
2026년 3월 18일부터 22일까지 닷새 동안, 서울 성수의 "XYZ SEOUL"에서 Rainmakers 역사상 첫 해외 이벤트 "Beauty Wonderland by Rainmakers"가 열렸습니다.
Rainmakers 소속 14개 브랜드와 I-ne등 타사 브랜드 3개를 포함한 총 17개 브랜드가 집결했습니다. Rainmakers 우사미 사장은 이번 이벤트에 대해 "일본 인디 화장품 브랜드의 해외 진출 선구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팝업이 아닌, J뷰티 해외 진출의 발화점으로 이 이벤트를 위치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행사장에는 기존 브랜드 외에도 새로운 소식들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인 스타일리스트 서수경과 메이크업 아티스트 강다인의 협업 브랜드, 샤프와 Wonjungyo의 "플라즈마클러스터" 기술을 탑재한 헤어브러시 공동 개발, 전 모닝구무스메 후지모토 마키의 스킨케어 브랜드 론칭 예고까지. 한국의 인재와 일본의 기술, 일본의 인재와 한국의 미적 감각이 뒤섞이는 공간이었습니다.
"Made in Korea" 표기는 이제 마케팅 포인트가 됐습니다. 일본뿐 아닙니다. 미국, 동남아, 유럽에서도 "한국산"이라는 사실 자체가 품질과 트렌드의 신호로 읽힙니다. 한국 OEM 공장에서 생산됐다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외국 브랜드도 늘고 있습니다.
(영국 프리마크가 만든 PB화장품 브랜드 - 한국제조)
케이팝의 확장과 구조가 닮아 있지 않나요? "한국에서 만든 것"에서 시작한 K뷰티는 "한국의 문법으로 만든 것"으로 정의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Rainmakers는 그 흐름의 최전선에 있는 회사입니다. 일본 회사지만 한국인 아티스트를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한국 브랜드의 일본 대리점이며, 한국 지사를 두고 한국 트렌드를 흡수하고, 한국 성수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었습니다.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양쪽을 자유롭게 오가는 포지션이 이 회사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케이뷰티의 위상은 지금 역사상 가장 높습니다. 동시에 경쟁도 가장 치열합니다. 일본의 Rainmakers처럼 케이뷰티의 문법을 흡수해 자국 브랜드를 만드는 회사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케이뷰티의 공식이 오픈소스처럼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케이뷰티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요? "한국에서 만들었다"는 원산지의 힘을 계속 키워야 할까요? 아니면 케이팝처럼 "한국적 감성과 시스템" 자체를 수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원정요처럼 한국인 아티스트가 세계의 파트너와 손잡는 방식이 케이뷰티의 새로운 루트가 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