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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케터입니다

꼭 하고 싶었던 숨긴 이야기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잘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보통은 '아, 저는 IT 제조 회사에서 마케팅 관련 일을 해요'라고 대답했지만, 그렇게 대답한 뒤에는 항상 생각에 빠졌습니다. '내가 정말 마케팅을 하고 있나?'라고 말이죠. 실상 마케팅이 뭔지도 모르면서 마케팅을 하고 있나 하고 자문했으니, 이 얼마나 웃긴가요.


지금에 와서야 명확하게 알게 된 사실은, 지난날 나 자신이 담당해서 진행했던 모든 일들이 마케팅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케팅을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지겠지만, 시장(Market)의 고객들이 원하는 바를 얻게끔 만드는 모든 활동을 마케팅이라 한다면 확실히 제가 했었던 일들은 마케팅이라 부르기에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카피라이팅, 슬로건/캐치프레이즈 기획, 웹/모바일 서비스 리뉴얼, 상세 페이지 기획 등 실제 마케팅 실무를 진행했지만 어떤 방법을 써야 효율적으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에 대한 기초 지식, 실무 지식이 없이 맨 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했으니 어떤 것이 유의미한지 알지 못했고 더 나아가 실제로 진행했던 일들의 결과를 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또 넓은 시야를 갖지 못했습니다. 소위 잘 나간다는 브랜드에서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콘텐츠가 왜 인기가 있는지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부족하고 또 잘 하지 못했던 와중에도 단 하나의 '먹히는' 문장을 쓰기 위해 몇 날 며칠을 머리를 싸매며 고민했고 구글님의 힘을 빌려 스토리보드를 만들었으며 레이아웃과 디자인, 업무 일정 때문에 디자이너와 싸우고 화해하고 푸념 들어주기를 반복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나는 지금 마케팅을 하고 있다, 나는 마케터다'라고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했었습니다.




제품 슬로건을 기획했습니다. 

제품 출시 전, 제품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명확히 하여 타 사 제품과 차별점을 갖게 하는 슬로건을 기획했습니다. 이렇게 기획한 슬로건이 

제품의 세일즈 포인트가 되고, 홍보나 영업에 사용되었습니다.


위 제품은 DAP(Digital Audio Player,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FLAC, AIFF, WAV, DSD 등 고음질 음원을 재생할 수 있는 재생 장치)로, 'PLENUE'라는 음향기기 브랜드의 보급형 제품이었습니다. 동종 업계 최초로 최저가로 나온 보급형 제품이었기에, '가장 저렴하면서도 뛰어난 성능을 지닌, 가성비가 매우 좋은 제품'이라는 점을 강점으로 잡았고, 슬로건 기획을 진행했습니다.


DAP는 꽤나 고가의 제품(100만 원 이상)이어서, 좋은 음질의 음악을 휴대용 기기에서 듣고 싶지만 비싼 가격에 구입할 엄두가 쉽게 나지 않는 제품입니다. 그러나 이 제품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20만 원대)이어서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언제 감동받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을 얻었을 때? 아니면 원하고 있었지만 뜻하지 않게 선물 받았을 때? 

엄두가 나지 못했던 것을 '이건 네 것이야'라는 말과 함께 건네받았을 때, 감동은 배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언 아닌 선언을 하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것이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라는 메시지로 비싼 가격 탓에 구입하기 어려운 제품이라는, 제품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It's your Hi-Fi(High Fidelity, 고음질 음향 시스템의 총칭)'라는 슬로건을 기획하여 제품을 론칭하였습니다. 해당 제품은 높은 퀄리티, 접근 가능한 가격대로 호평을 받았고 동종업계 제품 중에서도 높은 판매율을 기록했습니다. 기획했던 슬로건이 제품 판매나 제품 이미지 형성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까다로운 경영진을 쉽게 설득했던 텍스트였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퇴사할 때까지 기획했던 약 20여 개의 제품 슬로건 중에서도 제품의 정체성과 가치를 잘 표현하는 슬로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런 슬로건을 기획하기까지 수많은 단어를 썼다 지웠다, 합쳐보고 지워보고 다시 쓰기를 꽤나 많이 반복했었고 문뜩 괜찮은 텍스트가 생각나면 바로 메모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제품 상세 페이지에 들어갈 제품의 특장점과 차별점을 잘 보여주는 카피를 썼습니다.

텍스트의 양이 상당했고, 출시되는 제품마다 다른 기술을 적용한 경우가 많아 특정 기술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기에 신제품 출시 전에는 카피라이팅을 하느라 꽤나 시간을 들였습니다. 

제품 프로토 타입, 알파 버전을 먼저 사용해보고 어떤 점을 특장점으로 잡아야 할지를 고민했고, 카피를 읽는 사람이 쉽게 제품의 기능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하고 논리적인 내용으로 구성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카피는 특히나 경영진의 입맛을 맞추기가 까다로웠습니다. 텍스트의 양을 줄이면서 필수적인 정보만을 담으려고 했지만 경영진은 되도록 많은 정보를 넣기를 원했고, 필요 이상으로 텍스트를 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보를 전달하는 텍스트는 그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소비자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고객의 행동이 빠르게 진행되는 웹, 모바일 환경에서는 중언부언하는 것보다 특장점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텍스트가 정보에 집중하는데 더 유리할 것입니다.


이런 상세페이지를 기획하는 데는 카피, 레이아웃, 이미지의 구성을 담은 스토리보드를 활용했습니다.



직접 만든 PPT 스토리보드 양식에 이미지 예시, 카피, 레이아웃 구성 등의 요소를 담아 기획서를 만들었고, 

이렇게 만든 스토리보드를 기초로 하여 상세페이지 디자인을 진행하며 디자이너와 협업하였습니다.

상세페이지에 들어갈 이미지의 쓰임이나 레이아웃 구성은 타 사 상품페이지를 레퍼런스 자료로 삼아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자사 홈페이지가 HTML5 반응형 페이지였기에 이미지에 애니메이션을 적용할 수 있었고, 

동일한 방식의 웹 환경을 가지고 있는 애플, 삼성, LG 사의 페이지를 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단순히 텍스트가 담긴 워드 파일을 디자이너한테 전달하고 알아서 디자인해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디자이너와 원활하게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서는 스토리보드를 통해 어느 정도 구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이게 다 뭐냐, 이런 건 처음 본다, 대체 왜 이런 걸 하냐, 관리할 파일만 많아지는 게 아니냐, 네가 

디자인에 왜 간섭하냐'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마케팅 담당자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담긴 페이퍼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페이퍼가 없다면, 그것은 궁리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자사 웹/모바일 서비스 리뉴얼도 진행했습니다. 서비스 내에서 채 구현되지 않았거나 미비한 점을 보완하는 서비스 기획서를 제작하여 디자이너, 개발자와 커뮤니케이션했습니다. 아쉬운 것은 이런 서비스 기획을 누구한테도 배우지 않았기에 어떻게 기획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다른 기획자가 진행한 기획서를 훔쳐보고, 참고하고, 구글님의 힘을 빌려가면서 기획했다는 점, 이렇게 만든 기획서가 실제 리뉴얼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기획서의 내용이 미비했기 때문도 있지만 리뉴얼을 진행할만한 개발자가 퇴사하거나, 서비스가 더 이상 운영되지 않거나 하여 개발단의 리뉴얼 작업에 참가해보지 못한 점은 개인적으로 너무나 아쉬운 부분입니다(기획서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몇 날 며칠을 고민했던걸 생각하면...).






이렇게 분기별 마케팅 플랜을 짜기도 했습니다. 프로모션 일정, 채널 운영 방향 등의 마케팅 Action Plan을 

기획하여 협력사와 커뮤니케이션하기도 했습니다. '상반기 마케팅 플랜을 짜서 공유해주세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대체 그게 뭔데?' '어떻게 만들어야 되는데?'라는 생각에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물어볼 사수도 없고, 이런 실무는 책에도 나와있지 않은 것이기에 역시 구글님의 힘을 빌려 공부하며 하나하나 내용을 만들었습니다. 

이외에도 유아 교육용 앱에 들어갈 콘텐츠를 기획하기도 하고(극히 일부분이었지만), 오프라인 부스를 운영하며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하기도 하고, 인쇄소에서 밤을 새우며 리플릿과 브로슈어, 책을 감리하기도 했었습니다. 


경력 3년 6개월, 4번의 회사를 왔다 갔다 하며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일을 할 때마다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일을 혼자서 처리했고, 딱히 의견을 나눌 사수나 동료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킬이나 능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어떠한 방식이든 노력했어야 하는 것인데, 너무 안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케터입니다. 몸으로 부딪히며 경험했던 일들은 모두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처음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최근 브랜딩, 카피라이팅, 콘텐츠 기획 등 브랜드 마케터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조금씩 쌓아가고 있습니다. 처음 접해보는 생소한 내용이 많아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슬로 스타터의 자세로 마케터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싶습니다. 단순히 좋은 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목적만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감동을 주는 마케터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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