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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솥을 돌려주세요

브랜드는 추억이다

7년 전 이맘때, 저는 강동구의 작은 출판사에서 인턴으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국어국문 전공이니 그나마 자연스러운 수순은 출판사에 취업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출판사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기에 부딪히면서 경험을 쌓기로 결정했고, 학교를 휴학히고 회사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렇게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첫 월급을 받았던 날이 아직까지 기억납니다. 오늘 같이 하늘이 높고 푸른 날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회사 밖으로 나와 부모님께 용돈을 부쳐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으니 오늘은 근사하고 거하게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마음으로 회사 근처 '한솥 도시락' 매장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근사하고 거한 점심이 한솥 도시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솥 도시락의 많은 메뉴 중에서 가장 비싼 메뉴였던 '매화' 도시락을 꼭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매번 한솥 도시락을 먹을 때는 도련님 도시락이나, 치킨마요 같은 오천 원이 넘지 않는 저렴하지만 맛있는 메뉴를 먹었습니다. 돈 없는 학생한테는 한솥 도시락만큼이나 좋은 한 끼 식사가 없었죠. 만 원짜리 매화 도시락은 뭐랄까, '대체 저 도시락에 뭐가 있길래 만원이나 할까? 언젠간 꼭 먹어봐야지'라는 동경의 대상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말 많이 먹었던 한솥의 도련님 도시락과 치킨마요. 투박하고 소박하지만 참 맛있었습니다.


그래서 월급 탄 기념으로 가장 비싼 매화 도시락을 주문했습니다. 또 밥도 곱빼기로 시키고, 단품 메뉴인 김치찌개도 시켰습니다. 주문을 받던 사장님의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혼자 다 먹을 거냐고. 저는 아주 당당하게 다 먹을 거라고,(그때가 스물여섯, 하루에 세 시간씩 운동을 하는 건강한 돼지였죠) 오늘이 월급날이라 한 번 먹어보고 싶었다면서 계산을 했습니다. 사장님은 꽤 나이 드신 어르신이었는데, 남겨서 버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너털웃음을 지으시며 도시락을 건네주셨습니다.


근처 공원으로 가 도시락을 열어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엄청났습니다. 양도 양이었지만 맛도 좋았습니다. 아, 사치란 이런 걸까 하며 도시락을 흡입하니 결국 그 많은 양을 다 먹어버렸습니다. 소불고기, 제육볶음, 튀김에 반찬에 찌개에... 그날 점심은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회사를 다니며 번 첫 월급으로 먹고 싶은 걸 사 먹었다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서 만끽했습니다. 그때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고, 한솥 도시락은 그렇게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한솥 도시락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회사나 집 근처에 매장이 있었다면 일부러라도 사 먹었을 텐데, 집 근처나 회사 근처에 매장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잊고 있었는데, 최근에 한솥 도시락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도시락 메뉴가 아닌, 바로 브랜드로 말이죠. 한솥 도시락이 리브랜딩(Rebranding)을 한 것입니다.


리브랜딩이라고 한다면 브랜드 수명 주기(BLC, Brand Life Cycle)에서 브랜드가 쇠퇴하는 단계에 접어들 때, 브랜드의 재도약과 성장을 위해 브랜드의 미션과 아이덴티티, 여러 비주얼 요소를 재정비하고 제품과 서비스를 대대적으로 리뉴얼하여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찾아 활로를 뚫고자 하는 브랜드 전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도입 > 성장 > 성숙 > 쇠퇴의 4단계로 이뤄진 브랜드 수명 주기.


한솥이 리브랜딩을 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브랜드 로고를 새로 디자인하고, 브랜드 컬러도 새로운 것으로 정하고, 홈페이지 리뉴얼은 물론 홈페이지 내 콘텐츠도 이전과는 다르게 꾸몄으며, 제품 용기도 바꾸는 등 한솥이라는 브랜드가 가진 요소의 대부분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가 알던 한솥과는 다른, 환골탈태라고 해도 불러도 될 정도로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하게 변모했습니다.


홈페이지 내 콘텐츠의 톤 앤 매너, 브랜드 로고 및 컬러, 포장 디자인이 대폭 바뀐 한솥.


몇 년 전과는 다르게 본 도시락 같은 프리미엄 도시락이나 오봉 도시락 같은 중소 도시락 브랜드도 많이 생기고, 또 편의점 도시락이 워낙 강세이다 보니 경쟁 브랜드와 제품 사이에서 한솥만의 차별점을 가지고 독보적인 포지션을 점거하기 위해 리브랜딩이란 전략을 택한 것 같습니다.

리브랜딩은 하나의 브랜드의 요소 대부분을 뒤집어엎고 새로이 세팅하는 것이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있었던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 나가는 작업이기에 상당한 비용이 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과 전략은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쟁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들에게 다른 모습으로 비쳐야 합니다. 특유의 모습과 행동들을 통해 다른 것들은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를 만든다면 유일무이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한 한솥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영 어색하고 적응이 안되더군요. 저에게 한솥은 '싼 가격에도 맛있는 한 끼, 배부른 도시락'입니다. 한솥 도시락이 중저가형 도시락 브랜드라는 포지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거기서 더 나아가 저의 개인적인 추억이 담겨 있는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친숙함으로 언제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리브랜딩 한 한솥은 뭐랄까요, 고급스러워지고 멋있어지긴 했지만 거리가 멀어진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그리고 여타 다른 음식 프랜차이즈와 같아진 것 마냥 보입니다


한솥의 '고메이'라는 카테고리로 '큐브 스테이크 필라프'라는 신 메뉴가 나온 것을 지하철 옥외 광고를 통해 접했습니다. 대체 필라프라는 음식이 뭘까, 싶기도 했지만 그 광고를 볼 때마다 제가 알고 있던 한솥과는 너무 멀어져서 적응하기 어렵더군요. 마치 양은 적고 맛도 없고 비싸기만 한 아웃백 도시락을 보는 것 같은 광고 카피와 디자인이 돈 없던 학창시절 싼 값에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친숙한 한솥 도시락과는 너무나 갭(Gap)이 심했습니다.   


이게 뭣이길래 6300원이나...


또 홈페이지의 메뉴 사진들과 실제 도시락과의 차이도 상당하다고 느꼈습니다. 뭐, 어느 음식 프랜차이즈나 그렇겠지만요. 그런데 리브랜딩을 하면서 도시락 용기도 스티로폼에서 검은색 플라스틱 용기로 바뀌었던데, 차라리 좀 더 위생적인 용기로 변경이 되었다는 걸 보여줬다면 가맹점주에게도, 소비자들에게도 좋은 방향으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홈페이지만 보면 도시락이 아니라 식당 프렌차이즈인 것 같은...


아무래도 마케팅에 관심이 있다 보니 콘텐츠에 신경이 쓰였는데, 콘텐츠의 톤 앤 매너가 너무나 상이한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한솥의 예전 브랜드 로고와 컬러, 그리고 최근에 변경한 로고와 컬러가 함께 쓰이고 있는 것이 '대체 왜?'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로고와 컬러를 인식시키는 것이 단기간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기에 예전의 비주얼 요소를 그대로 쓰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콘텐츠는 예전 한솥의 느낌이 나고, 어느 콘텐츠는 다른 브랜드를 따라하는 것처럼 세련되서, 마치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것 같이 통일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제품의 성격, 프로모션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디자인했겠지만...이질감이 드는 건 제 눈이 이상한 걸까요


여러 도시락 브랜드는 물론 대기업 리테일 사의 PB 도시락 브랜드가 강력한 경쟁자이지만, 한솥은 중저가라는 포지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맹점 수도 타 브랜드 대비 가장 많을뿐더러 매출액도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학생들, 직장인들은 한솥 도시락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한솥은 사람들에게 잊혔거나, 잊히고 있는 브랜드가 아닙니다.

물론 홈페이지를 개편하고, 콘텐츠를 다시 만들고, 제품 용기를 바꾸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이미지 쇄신은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이슈입니다.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결국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타당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브랜드의 비주얼 요소를 변경하는 리브랜딩이 굳이 필요했을까 싶습니다.


한솥 브랜드에게 필요한 건 고급지고 세련된 이미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싸고 맛있고 따듯한 도시락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하는 쪽으로 브랜드를 정비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일상 속에서 언제든지 싸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고, 그것을 한솥이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캠페인이나 광고를 집행하여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한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빨리 밥을 먹고 쪽잠이라도 자고 싶은 직장인, 매번 이동하는 택배 기사, 점심 값을 아끼려는 학생 등등 한솥은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전달하는 고객들과 가장 가까운 도시락이다,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면 아마 제 추억 속 한솥과 지금의 한솥 간에 괴리를 느끼는 일도 적었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한솥이라는 브랜드는 추억입니다. 브랜드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특별한 이미지를 심어 놓는 '각인'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을 하늘 아래서 한솥 도시락을 먹으며 느꼈던 소소한 행복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고, 그 안에 한솥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본 한솥은 그때 그 모습이 아닌 것 같아 다소 아쉽습니다.

물론 한솥은 여전히 맛있고, 싸고, 좋은 브랜드입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연찮은 기회로 한솥을 다시 보게 됐으니 리브랜딩 이후에 한솥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쭉 지켜보겠습니다.


아마 앞으로 브랜딩을 고민한다면, 브랜드를 접한 사람들의 스토리를 살펴볼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브랜드가 어떤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이미지를 더 강하게 굳힐 수 있는 노력들을 해보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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