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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 15. 2020
영국 락다운(Lockdown) 체험기
영국 락다운 조치 3주 차, 얄궂게도 찬란한 이 봄볕을 어찌해야 하나
확실히 나는 살면서 무엇 하나 쉽사리 얻어지지 않는 운 없는 편에 속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나름 인생 걸고 넘어온 단 1년짜리 유학 생활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라니.
거즌 매일 비가 내렸던 우울한 겨울을 지나, 드디어 영국의 화창한 봄 날씨가 찾아올 때쯤 영국 정부의 이동제한령(락다운, Lockdown)이 발표되었다. 지난 3월 23일 저녁,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친구가 만나자고 하면, 당신은 No라고 대답해야 한다.”라며 아주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락다운 조치를 발표했다. 그럼 과연 진짜 영국 락다운의 실상은 어땠는지 지난 3주 동안 직접 경험한 락다운 체험기를 남겨본다.
락다운 이전: 다국적 룸메이트 기숙사의 갈등 고조
대학 기숙사 갈등의 전조는 이미 락다운 시행 전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3월 12일, 보리스 총리의 집단 면역(Herd Immunity) 전략 발표에 누구보다 먼저 마스크를 쓰며 전염병을 예방하려 했던 아시안 유학생들은 매우 민감해졌다. 정말 70%가 걸릴 때까지 가만히 두겠다는 거냐며 격분한 몇몇 유학생들은 빠르게 고국행 비행기를 구해 떠나기도 했다.
조금씩 상황이 나아져가던 한국과 대조적으로 영국 상황에 대한 나쁜 소식들이 연일 잇따르자, 한국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은 계속해서 ‘인종차별당하지는 않니?’, ‘마트에 생필품은 있니?’라며 안부를 물어왔다. 이런 따뜻한 관심들이 역설적이게도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지내던 나를 더욱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직 마스크를 쓴 아시안에 대한 조롱 섞인 시선이 있을 때였고, 내가 공부하고 있는 브리스톨은 런던이나 맨체스터 같은 대도시가 아니여서인지 아직 저녁 펍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처럼 사람마다 코로나19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랐던 탓에 곳곳에서 불필요한 갈등이 일어났었다.
대표적으로 다국적 유학생들이 모여 있는 기숙사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전기밥솥 하나로 방 안에서 모든 식사를 해결하며 공용 주방 조차 나오지 않는 중국인 룸메이트가 있었고, 이 시국에 생일이라며 고국에 다녀온 이탈리아인 룸메이트는 다른 룸메이트들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다른 경험과 입장이 충돌하며 각 기숙사마다 크고 작은 잡음이 이어졌다.
나 역시 상황이 허락한다면 3월 말에 독일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겠다고 하니, 중국인 룸메이트들은 끊임없이 다가와 설득했다. ‘너 코로나바이러스가 얼마나 위험한 줄 아니? 지금 독일, 스페인, 프랑스 다 난리도 아니야! 너 갔다가 못 돌아올 수도 있다?’ 이어지는 설득에 진지하게 재고해보겠다며 매번 달래서 돌려보내곤 했다. 돌이켜보면 다 부질없는 논쟁이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다음 날 보리스 총리가 락다운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락다운 실시: 취소다, 취소! 눈물의 환불 러쉬!
비록 모든 저축과 대출까지 끌어모아 떠나온 유학이지만, 유럽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는 한 번 참석해봐야겠다는 부푼 꿈이 있었다. 나름의 거금을 들여 일치감치 독일 왕복 항공부터 현지 교통 및 숙소 등을 모두 예매를 마쳐놓을 상태였다. 그리고 그 모든 예약들은 락다운 조치와 함께 골칫덩어리 환불 러쉬가 되어버렸다.
그뿐만이랴. 두근두근 기대하던 <21세기 자본>의 ‘토마 피케티’ 직강부터 한국에서도 가본 적 없는 ‘혁오 밴드’ 콘서트까지! 예매내역과 캘린더를 바라보며 뿌듯해했던 행사들은 얄짤없이 모두 취소가 되었다. 1년 유학으로 얻고자 했던 좋은 경험들이 모두 취소되는 허탈함이 앞섰지만, 정말 스트레스받는 건 환불 절차였다. 사상 초유의 취소 사태에 저가 항공 및 숙박 관련 회사들은 거의 마비된 수준이었고, 느린 처리 속도 탓에 안타깝게도 눈물의 환불 러쉬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비단 유료 행사들 외에도 취소 대란 속에 많은 소중한 기회와 약속들이 멀어져 갔다. 친구들과 함께 펍에서 이야기 나누던 일상의 행복은 멀어졌고, 정들었던 대학원 동료들이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떠나갔다. 학교에서는 필요한 논문 지도나 워크숍 같은 남은 일정들을 온라인으로 대체하고 과제 제출 일정을 조절해주는 등 빠르게 대처해주었지만, 아무래도 진한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불평불만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영국 상황 때문이었다. 어느새 급속도로 불어난 영국 확진자 수는 한국을 추월했고, 보리스 총리와 찰스 왕세자 같은 유명인사들이 코로나19 확진을 받았다. 영국인 친구들은 부정적인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특유의 영국 유머를 뽐냈지만, 한 편으로는 길거리의 영국인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 시작했다.
락다운 이후: 문자 그대로 정말 ‘갈 곳’이 없다
항상 사람 많던 거리에 단 한 곳도 문 연 가게가 없다한국 친구들과 연락을 나누다 보면 영국의 락다운 조치에 어리둥절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갈 곳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는 것처럼. 한국처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외출을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은 식료품점을 제외한 모든 곳이 문을 닫았다. 학교도, 도서관도, 카페 조차도 문이 연 곳이 한 곳도 없다. 문자 그대로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으니, 길거리를 나서도 황망할 따름이다.
코로나19 사태로 폐쇠한 박물관 입구는 노숙자의 거주지가 되었다유동인구가 줄자 거리에서 특히 더 눈에 띄는 것은 노숙자들이었다. 이전에는 행인들 사이에 가려 종종 보이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노숙자들이 거의 텅 빈 거리의 주인이 됐다. 폐쇄한 건물 입구, 볕 좋은 자리에 이들이 자리를 폈다. 어찌 보면 전염병에 가장 취약한 계층이면서도, 이 락다운 조치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 된 셈이다.
모든 영국 슈퍼마켓 앞에는 보안직원이 입장 인원 제한 및 2m 간격 유지를 지도하고 있다.식료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이라고 자유롭게 갈 수 있지는 않았다. 모든 슈퍼마켓 앞에는 보안직원들이 입장인원수를 제한했고, 대기자들은 2m 간격으로 부착된 스티커에 맞춰 줄을 서야 했다. 이뿐만 아니라 물건 사재기(Panic Buy)를 예방하고자 인원 당 살 수 있는 식재료 제한이 생겼고, 일행 중 한 명만 매장에 들어가게 하는 곳도 있었다.
또한,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밤낮없이 바빠진 영국 보건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종사자들이 식재료를 구입하지 못하자, 특정 저녁 시간대에는 해당 보건의료서비스 종사자만 쇼핑이 가능한 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찬란한 봄볕에도 불구하고 공원에 일광욕하는 영국인이 한 명도 없다.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영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하루 한 차례 운동을 위한 외출만을 허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나는 과연 영국인들이 락다운 조치를 잘 따를지 의문이 들었었다. 햇볕 든 날은 남녀노소 공원으로 뛰쳐나와 일광욕을 하는 영국인들이다. 공원에 꽃은 만개하고, 봄볕은 이토록 따사로운데 그 영국인들이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실제로 락다운 초반에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제법 보였다.
그러나 경찰들이 꾸준히 순찰을 돌며 사람들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권고했다. 경찰은 락다운 조치에 따라 3명 이상 모여있으면 벌금을 부과하거나 해산을 요구할 수 있다. 경찰은 정말 꾸준하게도 공원에 앉아서 쉬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두 집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으니 동참합시다.’라며 귀가시켰다. 나는 혼자서 공원에서 잠시 광합성을 즐기고 있었는데도, 경찰에 권고에 서둘러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얄궂은 인생이여, 그저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평소 영국 날씨 VS 격리 기간 영국 날씨 - 출처 <meme>이렇게 기숙사에 갇히게 된 자타공인 천성 밖돌이인 나는 코로나19 락다운으로 인해 창밖만 쳐다보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날씨가 정말 사람한테 영향을 많이 주는구나 새삼 깨닫고 있다. 쨍한 햇볕과 파란 하늘, 그리고 살랑이는 봄바람이 얼마나 사람을 애타게 하는지. 야속하게도 락다운 조치 실시를 기준으로 영국의 날씨는 정말 드라마틱하게 좋아졌다. 오죽하면 이런 밈(meme: 특정 메시지를 전하는 그림, 사진, 또는 짧은 영상)까지 유행했을까. 참으로 얄궂은 하늘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며 삶의 활력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친구들과 화상회의 어플로 온라인 펍을 열기도 하고, 룸메이트들과 프라이팬과 병뚜껑으로 실내 배드민턴 놀이를 하고, 유튜브 요리 채널을 따라 온갖 요리에 도전하면서.
사실 운 없는 인생이었던 나는 알고 있다. 인도 여행 중 지프 기사가 나를 산속에 버려두고 도망쳤을 때에도, 네팔 여행 중 오토바이에 치였을 때에도 그랬다. 아무리 원망스러운 일이더라도, 몸만 크게 안 다치고 지나고 보면 좋은 경험인 셈이다. 이렇게 글 거리도 되어주고,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때, 내가 영국에 있었는데 말이야…’라며 오래오래 추억할 이야깃거리가 되어주리라 믿으면서.
그래서 오늘도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씩 해본다. 우리가 모두가 그러하듯이.
이 글은 딴지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