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져의 감정은 그 또는 그녀의 것이다. 내 감정은 내가 선택한다.
조용한 사무실, 매니져가 출근한다. 오늘 기분은 어떠실려나? 어제만 해도 새롭게 시작한 연애에 기분이 좋았던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인데 오늘도 그 기분이 이어질려나?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표정 부터 좋지 않다. 아무래도 남자친구와 싸운듯 하다. 다들 똑같은 느낌을 받은건지 삼삼오오 팀원들과 매신져에 접선해 오늘의 '매니져 날씨'를 공유하며 다들 더 조용해 진다. 그런데 하필 오늘이 팀미팅 날이다. 팀미팅이 시작되고 각자의 업무 현황을 공유하는데 천둥 번개가 5분 간격으로 매섭게 몰아친다. 결국 어제 칭찬받았던 그 기획안은 반려되었고, 다같이 야근이 확정되었다. 지금은 지난 추억으로 웃으며 애기할 수 있는 인생의 한 장면이지만, 그때의 나는 이런 모든 감정 소모가 힘들고 버거웠다.
이런 상황이 힘들어 몇번의 이직을 해도 바뀌는건 없었다. 어느 조직이든 흔히 말하는 또라이 질량의 법칙에 따라 매니져가 아니면 팀원중의 한명은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드는 사람이 꼭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힘겹게 직장생황을 하다 한 줄기 빛을 발견한건 정말 우연이였다. 약속에 조금 늦을 거라는 친구의 말에 서점을 서성이던 나는 심리학 책을 뒤적이다 이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감정도 내 선택이다. 지금의 내 감정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감정을 선택한다... 이게 가능한건가? 그렇게 친구와 맥주 한잔을 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안, 나는 이 문장을 수십번 되뇌었다.
돌이켜보면 항상 어떤 상황이 닥쳤을때 감정은 그냥 그렇게 내게 다가와 있었다.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그 감정을 선택할 수 있는 '객체'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문장을 발견한 이후 타인에 의해 감정의 소용돌이가 생길때마다 아주 종종 그 감정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그날도 나의 매니져는 알수 없는 짜증을 내게 토해냈고 나 또한 습관적으로 그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내 몸 세포 곳곳에 짜증을 퍼트리는 중이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되었다. '이 짜증은 저 사람이 만든 감정인데 왜 내가 이 감정에 반응해야 하는거지? 내가 이 감정을 안받으면 되는거 아닌가?' 바로 그 순간! 감정을 선택한다는 의미를 이해했다.
그때부터 나는 연습을 시작했다. 매니져가 짜증을 낼때 마다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되뇌였다. '반사! 나는 이 감정 안받는다. 이 짜증은 당신이 선택한 감정이고, 나는 나를 위해 보다 행복한 감정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매니져와 '감정분리'를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동료가 내가 이런 말을 남겼다.
"요즘 인생 득도한거야? 이 상황에서 감정의 동요가 없네?" 이때 나는 일종의 성취감을 느겼다. 감정분리를 위한 나의 노력이 뭔가 결실을 맺은거 같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건 매니져의 변화였다. 나에게 짜증을 '덜' 내기 시작했다. 왜냐고? 짜증도 그 짜증을 받는 사람의 반응이 있어야 그 맛에 하는건데, 내 반응이 시큰둥하다보니 재미가 없었던거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부분이 더 열받는 부분이지만...
혹시 그때의 나처럼 매니져 또는 직장 동료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 헤매이고 있다면 꼭 '김정분리' 연습을 추천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위해 행복한 감정을 선택한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멋지게 실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