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759일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그런 게임이 있다. 주어진 제시어를 듣고 진행자가 ‘하나, 둘, 셋!’을 외치면 같은 동작을 외쳐야 통과되는 그런 게임.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2020년 6월 우리는 헤어졌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건넸던 말은 ‘우리의 관계가 종료됐음을 서로 이해하고 이제는 응원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보살펴주어서 고맙다’였다. 나는 그에게 아주 자연스럽고 정중한 방식으로 이별하고 싶다고 말했다. 8분여가 지나고 그가 보내온 답장은 놀라울 정도로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며칠간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그게 무례하게 느껴졌다면 미안하다’며, 자신의 마음은 그대로라 내가 결정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안 어울리게 쉼표를 두 번이나 넣어가며 눌러쓴 문장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정말 이상해졌다. 마치 한 사람이 두 개의 이별문장을 나눠 쓴 듯 그의 언어에 내 감정까지 묻어있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만나는 5년여 동안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고, 앞으로 좋은 일만 있기를 응원한다고 했다. 세상 다정한 말투였다.
늘 그런 식이었다. 그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순간에만 웃는 사람이었다. 버려지는 순간에만 애틋해지는 사람. 위기의 순간에만 다정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사람. 그래서 나를 언제나 안타깝고 외롭게 할 사람. 우리의 기승전결은 그렇게 마무리 됐었다.
재회한 건 한 달 반 만이었다. 얼굴을 보자며 서울로 올라온 그가 꽤 이른 시간에 우리집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제시어 퀴즈라도 하는 것처럼 커플운동화를 신고 만났다. 유일하게 같이 산 신발이었다. 웃음이 나질 않았다. 그저 여름의 온갖 습기를 다 머금은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길바닥에서 발로 아스팔트를 슬슬 긁을 뿐이었다. 뭘 먹으러 자리를 옮기기도 뭐해서 내가 살던 오피스텔 1층에 있는 ‘산쪼메 라멘’에 갔다. 아무 라멘이나 2개를 시켰다. 우리가 서로 확인한 게 마음인지 안부인지 미래인지 그런 건 알 길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국물까지 꼴깍 꼴깍 먹었을 라멘인데 절반 이상을 다 못 먹고 남겼다. 우리의 시즌 3가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사실 장거리 연애를 5년씩이나 하면서 헤어진 건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 이별도 섹스도 연중행사였던 우리에게 딱히 쓸 만한 자존심 같은 건 없었다. 내가 못 견디면 헤어지고, 서로 못 견디면 다시 만났다. 당장 없으면 못 살겠다는 감정 하나 때문에 ‘쌀통에 쌀을 보는데 왜 이렇게 너 생각이 나냐’ 같은 말 한 마디로 다시 예전의 우리가 되는 것이다.
그가 내 돈을 갚을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대했을 때, 나와의 관계를 노부부쯤으로 여긴다고 생각했을 때마다 나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지만 결과는 매번 실패였다. 헤어지고 나서 CJ ENM 화장실에 주저앉아 전화기를 붙잡고 엉엉 운 적도 있고, 그 찰나의 빈틈을 비집고 대시하는 남자들과 밥을 먹고 영화를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그의 빈자리는 채워지지가 않았다. 누가 돈을 쥐어주고 헤어지라고 하면 싫다고 울고불고 꽹과리를 쳐대면서 한강에 돈다발을 뿌려댔을 것이다. 수많은 이별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도 그 여름날 라멘을 먹지 않았으면, 다른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면 어땠을까를 아직도 생각한다.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확신 때문이었기 보다는 정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확신이 부족한 연애를 오래 이어간 데에는 나의 합리화도 컸다. 사랑한다는 말을 가뭄에 콩 만큼도 안 해주던 그였지만, 나를 만날 때마다 지어주는 표정 하나 때문에 나는 늘 그를 향해 달려갔다. 비번을 누르고 문을 열면 언제나 공식처럼 환하게 웃어 보이는 표정. 그 얼굴 하나면 그냥 우리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설명이 됐다. 나는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그의 무던함과 무뚝뚝함 속에서 기어이 사랑을 찾아댔다. 나는 연금술사였다. 사랑은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옛날부터 집안 벽에다가 가훈을 주렁주렁 달아놓고 지키려고 애를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성실’, ‘가화만사성’, ‘건강하게 살자’ 이런 지키기 힘든 문장들처럼.
사랑이 몸서리치게 충만해서 하는 결혼생활도 그 좆같음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확신 없는 결혼이 얼마나 괴로운 지는 꼬박 2년 2개월이 지나고 ‘그 사건’ 덕분에 알게 된다. 사실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알고 있지만 외면했던 것들을 마주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왜 어느 누구 하나 나를 도시락 싸다니면서 말려주지 않았을까 싶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모두가 우려했던 결말이기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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