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의 말을 타고 전남편 집으로

AD 256일

by 이휘


- 이휘님의 국민카드가(이) 1시간 안에 배송 예정입니다.


만든 적도 없는 체크카드가 나를 찾아온다고 문자가 왔다. 메시지함을 뒤져 보니 23년 9월자로 만료되는 체크카드의 갱신카드를 배송해준다는 문자가 그저께 와 있었다. '갖고 있는 카드 중에 유일하게 모든 숫자를 외우는 카드인데 아깝네.' 새 돈은 새 카드에 담으랬나. 하지만 나는 30분 안에 약속을 나가야 했다.


- 오후 4시 이후 수령 가능합니다.

- 성함과 생년월일 알려주세요. 카드를 우편함에 넣을게요

- 이휘 000000 감사합니다

- 27동 402호?


뇌의 생각회로가 멈췄다. 27동 402호? 이혼하고 웨딩앨범이 제발로 찾아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사를 했더니 갱신카드가 김유신의 말을 타고 전남편의 집으로 찾아간다. 경로를 재검색해주라. 거기가 아니야.


- 저 주소지를 변경해서 마포구가 아닙니다.


전화가 왔다. 배송해주시는 분은 목소리에 기운은 없지만 친절해 보이셨다. 주소지가 이전된 경우 카드사에 연락해서 다시 배송인을 배정한 후 배송해 주신다고 했다. 근데 뭐. 어차피 우편함에 넣어주신다는데 '우편함'으로 찾으러 가도 상관없잖아? 마침 약속이 집 근처라 일정이 끝나면 카드만 찾아 오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시간을 맞추고 카드를 기다리는 게 귀찮았다.


오랜만의 상암동은 변함없이 공기가 차고 좋았다. 내가 전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이며, 가장 사랑하는 방송일을 하는 곳이고, 나를 먹여살린 자본의 출처이자 금융치료를 도와주는 금전적 고향이다. 마음이 맞는 작가님을 만나 맥주도 마시고 와인도 한 잔 했다. 나의 글들을 읽고 지난 날이 생각나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해 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 공감의 마음만으로도 이미 큰 위안이 되었지만, 작가님 또한 나로 인해 '11년 전의 본인'을 위로하고 어루만지시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장소를 옮긴 곳은 평소에도 자주 가는 카페였는데, 함께 마신 커피가 유독 평소보다 맛있었다.


작가님과 헤어지고 그 집으로 걸었다. 내가 많은 것들을 '두고 간' 집. 일 끝나면 꼭 걸어서 퇴근하던 길을 조금 다른 신분이 되어 당차게 걸어간다. 카드. 카드. 나는 카드를 가지러 간다. 오늘따라 하늘도 건강해 보이고 햇살 받은 나무도 튼튼해보여서 기분이 좋았지만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맥주, 와인, 커피가 내 안에서 점점 찰랑거린다는 거였다. 왜 이런 것들은 급하게 갑자기 찾아올까. 일단 화장실이 너무나도 급하다. 가는 길엔 하천과 버스정류장 뿐이고 가장 가까운 화장실은 '두고 간' 집 뿐이다. 그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는 화장실을 써야 했다. 허락받을 시간 따윈 없었다. 양심보다 방광이 더 나를 꽉 조여온다. 집으로 올라가 비번을 눌렀다. 그래 비번을 바꿨을 리 없지. 조심스레 화장실을 이용했다. 이 정도면 나만 아는 프라이빗 휴게소인가? 별 생각이 다 들지만 일을 끝마치고 나니 배부른 양심이 말을 건다. 그래. 예의가 있지.


- 갱신된 카드가 마포로 가서 찾으러 왔는데 화장실이 급한데 잠시 써도 되니 . .

- ㅇㅇ 집 보고 안 놀랄 수 있다면


집이 더럽단 얘기다. 허락받고 화장실을 쓴 척 했지만 사실 집안이 쑥대밭인 걸 눈으로 확인한 후였다. 여기저기 빨래가 널려 있고 소파는 앉을 곳도 없이 옷무덤이 되어 있었다. 휑했던 집에 전신거울도 생기고 선풍기도 생기고 침구도 바뀌어 있었다. 딱히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그냥 모르는 사람의 집 같았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커서 다시 갔을 때 어딘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처럼 집 분위기가 많이 변해 있었다.


중고로 구매한 것 같은 어쿠스틱 기타가 보여 튕겨봤다. 엉망진창인 소리를 내는 기타 줄은 할머니 바지 고무줄보다 더 느슨해져 있었다. 사 놓고 한 번도 안 쳐 봤구나. 같이 사는 사람에게 단 한 번도 안기지 않은, 마치 과거의 내 신세 같은 그 기타를 안고 무작정 조율을 마쳤다. 연주라고 말할 수도 없는 실력이라 아는 부분 몇 구간을 가야금 뜯듯이 뜯어보다가 그대로 소파 옆에 세워뒀다.


사실 이혼하고 이 집에 온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서 구분했는데도 몇 가지의 짐이 섞여서 집이 비어있을 때 한 번 다녀갔다. 그는 세탁기와 냉장고 없이 살아보겠다며 바득바득 손빨래를 하겠다고 고집했는데, 내 몸통만한 세제와 물에 잔뜩 잠겨 있는 옷가지들이 그 말을 증명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성통곡한 날보다는 얼추 사람 사는 집 같아 보였다.


옷방에서 내 청바지와 폰케이스를 따로 담아둔 쇼핑백을 발견했다. 그래, 저걸 가져가면 이 집에 다시 올 일은 없다. 다시 코트를 챙겨입고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카드를 안 가져왔다. 애초에 목적은 우편함에서 카드만 갖고 나오는 거였는데 쓸데 없이 방광이 오바육바를 하고 쓸데 없이 여기저기 갖은 참견들을 다 하느라 정작 빈 손으로 나온 거다. 다시 김유신의 말을 타고 전남편의 집으로 향한다. 어이가 없지. 요즘 스마트폰 때문인지 깜빡깜빡 한다니까 정말. 그렇게 우편함에서 다시 카드를 쏙 챙겨 집으로 왔다. 저녁에 쉬는데 그에게서 카톡이 왔다.


- 아니 물 안 내림 어케 ㅋㅋㅋㅋㅋㅋ

- ??? 내렸는데 ...?

- 정답


장난이라는 걸 알아채기까지 로딩이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도 참 감이 떨어졌다. 그 잠깐 사이에 당황은 했지만 '창피함'은 딱히 느끼지 못했다는 게 신기했다. 이런 게 안 창피한 사이가 있을 수도 있는가.


- 코 푼 휴지를 그냥 두고 가신 듯


이건 맞다. 세상에. 기타를 조율하는 동안 에어팟을 충전했는데 그 때 코를 푼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이다. 같이 살 때 하도 안 치워서 그 정도 휴지조각은 '배경'쯤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정물'인 걸 알아채는 사람이었다.


오늘 일이 반가웠는지 밤늦게 그가 한 번 더 연락을 해 왔다. 야식 먹기엔 출출한데 시간이 너무 애매하다는 내용이었다. 안타깝지만 그런 '스몰토크'나 '수다'까지는 내 매뉴얼에 없다. 적당한 대답을 해줄 수가 없어 그대로 두었다. 오늘의 나는 생리현상에 굴복한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화장실을 좀 썼다고 해서 그가 나와 밤에 연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다리를 꼬아가며 기어이 상가 화장실을 찾았어야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몰래 왔다 갔다가 모른척을 했어야 맞았을까(이건 양심상 도저히 안 된다), 이것도 모르겠다. 그가 우리동네에서 화장실이 가고 싶다며 비번을 물어오면 나는 우리집의 비번을 알려줄 수 있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내가 기타 조율은 기가 막히게 잘 해두고 왔다는 사실이다.


그 와중에 이런 오타들은 마음을 콕 콕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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