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의 '자니?'보다 살벌한 구남편의 연락
"흑흐흑.. 나 살고 싶지가 않다."
지갑을 잃어버린 게 내 탓이라는 그의 카톡에 답장을 하지 않았더니 밤 12시에 어마무시무시한 전화가 왔다. 한밤중에 술에 취해 엉엉 우는 전남편 전화를 벌떡 일어나서 받는다. 며칠 전에 카드를 가지러 갔을 때 철봉에 매달려 있던 매듭의 모양이 번뜩 떠오른다. 그는 어떻게 하면 나의 버튼이 눌리는지 아는 사람같다. 그걸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매번 똑같이 꾹꾹 눌린다. 어디야, 무슨 일이야, 계속해서 말을 시켜 본다. 많이 취해 있다.
"어쩌다 잃어버렸는데."
"몰라.. 하... 주머니에 맥주 두 개 있는 게 더 싫어. 나 거기 현찰 넣어놨단 말이야.. 짜증나 흑흑"
"얼마 있었는데?"
"30개."
"아..."
"나는 왜 살까..."
이혼을 결정한 후부터 그는 주말이면 대리운전을 뛰기 시작했다. 내가 없어지니까 갑자기 부지런하게 살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게 참 얄미웠다. 이혼해도 변하지 않고 꾸준히 게으르게 살기로 약속했으면서 토익스피킹 책을 사는 걸 보고 잠깐 서운했지만, 5분만에 책을 덮고 e스포츠 경기를 보기 시작하는 모습에 안심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대리운전만큼은 꾸준히 했다. 가까운 거리는 뛰어서도 가고, 밤늦게 모르는 지역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털레털레 집으로 왔다. 그게 참 짠했다. 나의 가장 친했던 친구가 아등바등 노력하는 모습이. 역시 뭐든지 짠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약해지는 건 내 병이다.
"그래서 울어 지금?"
"응. 조금."
"크크... 뭘 이런 걸로 울어? 나한테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카드부터 정지를 하든 버스 회사에 전화를 해 보든 해야 할 거 아냐."
"뭐야. 너 왜 이렇게 강해졌는데.. 내가 강하게 잘 키웠네."
"넌 왜 그렇게 약해졌는데? 너야말로 내가 약하게 키웠구나."
"당장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하지?"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같이 술 마신 준식오빠(*가명)한테 말해라?"
신나게 웃으며 놀려준다. 웬일로 이성적으로 쏘아붙여도 본다. 그래놓고 이내 마음이 약해져 이것저것 물어본다. 그는 몇 번 버스를 어디서 탔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다고 징징거렸다. 탈 때는 분명히 있었는데 내릴 땐 없었다고. 그런데 왜 그냥 내려? 의미 없는 질문이다. 그 후로 몇십분을 달래주다가 '지난 번에 집에 왔을 때 왜 마른 반찬을 안 해주고 갔냐'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주기가 어려워서 썽을 내고 끊었다. 청소아줌마 은퇴했더니 이제 반찬아줌마인줄 아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 말이 그렇잖아. 넌 왜 내가 연락할 때마다 화를 내냐? 너가 연락 안 하면 화 낼 일도 없어. 그렇게 전남편의 전화를 받고 놀랐다가 웃겼다가 마음쓰였다가 언짢아져서 전화를 끊는다. 다음엔 속지 않는다. 헤어진 마당에 더는 괴롭힘 당하고 싶지 않다. 금전 문제만 정리되면 반드시 차단하리라 다짐한다.
이혼을 하고 나서도 그가 독거노인을 챙기는 사회복지사 코스프레를 하며 가끔 내 안부를 물어오곤 했다. 사실 서로의 연락처는 그와 나의 극단적인 마지막 옵션이다. 결국 그렇다. 한밤중에 지갑을 잃어버리면 연락해서 하소연과 푸념을 늘어놓을 곳이 전와이프 뿐이고, 공휴일 전날 쓰러질 정도로 아파서 수액을 맞으러 갈 때도 멀쩡하게 안 취해서 태워다 주겠다는 사람이 전남편 뿐이면 그의 차를 탄다. (나를 비롯한 내 친구들은 왜 이렇게 술을 좋아할까.) 인터넷 이전설치비가 나왔으니 입금해달라는 연락도, 각종 공과금을 처리하기 위한 고지서 같은 카톡도 이혼의 진부한 과정이었다.
물론 우리도 차차 변해갈 것이다. 여름이면 함께 살던 신혼집의 전세기간은 만료되어 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고, 재산 분할을 적정히 마치고 나면 더이상 연락할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이별로 가는 쾌속질주에 과속방지턱을 자꾸만 들이미는 건 전남편 쪽인 것 같지만, 그럴 때마다 덜컹거려도 쭉 밟고 지나는 쪽을 택하지 않고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아주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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