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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휘 Dec 21. 2023

호흡기 달고 편집하는 피디

 녹화가 길어진다. 끊어가는 타이밍에 지루함을 견딜 길이 없어 미뇽의 편집실을 간다. 나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다. 지금 당장 8층에 가면 미뇽이 떡진 머리를 하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편집을 하고 있을 거라는 굳건한 믿음. 대포자루로 한 자루만큼의 고달픔이 있지만 그 중에 딱 한 되만 푹 하고 떠서 요약하듯 말해줘도 아직 다 일일이 열거하지 못한 나의 모진 괴로움들을 백 번 만 번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 아마 내가 노크를 하면 미뇽이 “네”라고 대답할 것이고 그럼 나는 문을 열어젖히고 “미뇽!” 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 순간 서로가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바로 그 존재감 하나로 알 수 없는 전우애가 싹트며 우리는 안심할 것이다. 통신보안! 수신양호! 성큼성큼 걸어간 편집실의 문이 열린 채 비어 있다. 아무래도 미뇽이 잠깐 담배 피러 나간 것 같다.



 미뇽을 처음 알게 된 건 2022년 8월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같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피디와 작가로 처음 만났다. 프로그램 특성상 세계관, 콘셉트, 구성, 게임, 인물, 아이디어 회의가 정말 중요했는데, 당시 유독 맹렬하게 싸우며 친해졌다. 미뇽이 제시하는 레퍼런스들은 나와 취향이 정말 잘 맞았는데, 이상하게 아이디어는 꼭 반대였다. 미뇽이 왜 그렇게 찍고 싶은지를 한창 말하면, 나는 왜 그렇게 찍어서는 안 되는지를 말하고, 어떤 게 더 재미있고 어떤 게 더 신선한 구성인지에 대해 서로 똑바로 듣고 반대로 말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갔다. 회의를 주도하는 메인피디님이 다양한 의견들에서 오는 힘을 믿는 젊고 좋은 분이었고 우리 역시 경청하는 태도를 가진 피디 작가들이었지만, 하필이면 제작진들이 다들 ‘내 생각을 얘기 못하면 병이 날 지경’인 것처럼 보이는 애들만 모인 바람에 회의 자체가 정말 다이내믹하고 길었다. 회의 진도가 안 나가는 이유는 대부분 미뇽 때문이었다. (미뇽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런 미뇽의 고집과, 미뇽이 하는 수많은 ‘안 웃긴 농담’들을 사랑했다. 언젠가 함께 또 다른 콘텐츠를 만들면서 싸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살면서 그렇게 좋았던 회의시간은 그 팀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무튼 그 시기에는 그냥 기획 회의만 하고 퇴근하는데도 집에 돌아오면 수능 공부를 한 것처럼 저녁을 때려먹자마자 미친 듯이 잠을 자는 게 일상이었다.


 오랜만에 본 미뇽은 뭔가 엎질러진 물을 부리나케 닦고 난 수건처럼 정신없이 축 처져있었다. ‘퀭’이라는 글자가 3차원 세상에 존재한다면 미뇽일 것이다. 기운은 없는데 부어 있는 느낌. 정신에 총명함은 있으나 명징함은 없는 느낌. 그래도 언제나처럼 선한 눈을 하고 있다. 미뇽은 쿼카를 닮았다. 다만 못 본 사이에 흰머리가 많이 나 있다. 그래서 늙은 쿼카가 되었다. 미뇽은 화요일에 출근해서 토요일에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미뇽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전쟁터에서 고작 발목 좀 삐끗해서 아프다고 징징대려는데 사지에서 피가 철철 나고 있는 사람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빨리 종영했으면 좋겠다고, 힘들다는 말을 자신 없이 내뱉으며 편집실을 두리번거리는데 웬 청소기 같은 게 보인다.


 “이게 뭐예요?”

 “나 호흡기 달고 편집하잖아요.”


 올 것이 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미뇽의 ‘진짜 안 웃긴데 친하니까 너무나도 웃긴’ 농담인 줄만 알았다. “아 뭔 소리야 진짜 또!” 하고 웃어넘기려는데 정말이었다. 미뇽은 코골이 치료용 호흡기를 달고 편집을 하고 있었다! 이 긴 회색 호스와 작은 호흡기의 조화라니, 키도 크고 덩치가 둥글둥글한 미뇽이 이 양압기를 착용하고 가동하면 반드시 매드맥스의 임모탄 같은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을 굳이 편집실에 가져와서 사용해야만 하는가.


 “코골이 심해?”

 “평소에 좀 있는데 술 마시면 좀 더 심한 편이라.”

 “근데 이걸 왜 여기서 써?”


 질문하는 순간 답변을 자동으로 알아서 깨닫게 되는 물음이 있다. 그런데 미뇽의 답은 한 차원 높았다. 말인즉슨 렌탈을 해서 한 달에 7만 원 정도를 내고 쓰고 있었는데, 한 달에 21일 이상 사용하면 월 만 원 대로 가격을 낮춰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매일같이 편집으로 밤샘을 하니 잠 잘 시간이 도무지 나지 않아서, 편집할 때 이걸 쓰면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이게 사용기록에 남나? 아 남는구나.. 아.. 그래서...”


 잠을 잘 때 코 고는 습관을 고치려고 빌린 건데 정작 제대로 잠을 잘 시간이 없어서 밤새 편집을 하며 이 치료용 호흡기를 달고 있다는 이 웃기고 슬픈 상황을 내가 어떻게 삼켜야 할지 몰라서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말 그대로 밤새 호흡기 달고 일하는 사람이 내 눈 앞에 있었다. 미뇽을 아는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웃긴 이야긴데, 가까이에서 보니 그닥 웃긴 상황이 아니어서 그냥 웃음 장례식에 온 기분이었다. 그냥 이 곳에 더 있다가는 미뇽이 호흡기 달 시간을 내가 빼앗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하늘 아래 편집 잘하는 피디는 다 멸종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헤어졌다. 결국 누군가 밤새서 마스터 편집을 하는 이유도 결국 어느 누군가들의 부족한 가편을 수정하기 위해서다. “편집 아카데미 같은 걸 만들면 어때?” “우리 때는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배우려고 애 쓰지 않았어?” “요즘 애들은 그냥 일단 퇴근을 해. 욕심이 없어.” “근데 욕심을 강요할 순 없잖아. 그들에게는 그게 중요한 삶이 아닐 수도.” 그런 꼰대 같은 대화들을 1분도 채 안 나눴는데 앞길이 캄캄하다. 더 중요한 위치에 올라갈수록 아마 우리는 더 외롭고 괴로워질 것이다. 이래도 욕하고 저래도 욕하는 수많은 후배와 동료들 앞에 맞서야할 것이다. 그 거친 항해를 꼭 같이 하자고 몇 번이나 약속한 사이지만 지금 그 맹세를 돌이켜본들 그는 눈앞의 원본과 씨름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기에 말을 아꼈다. 축 처진 미뇽이 피곤한 걸음으로 나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해준다. 어쩐지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보고 힘을 낼 수밖에 없게 되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지만, 우리 둘의 막방 날짜가 비슷하다는 건 저절로 힘이 난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적당히 맛있는 술을 먹으며 그동안 겪었던 각자의 고생담 배틀을 할 것이다.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금세 미화되고 까먹을 것 같아서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그저 미뇽의 코골이가 조금이라도 치료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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