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마로브 MAROB
Dec 01. 2020
엄마도 그냥 되는게 아니라구요
끝나지 않는 리스트와의 전쟁
"헉... 이게 다 모야?"
내년 즈음엔 슬슬 아이를 생각하고 있다고 얘기하자 회사 친한 언니가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긴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언니는 임신 중이었고, 언니가 나에게 보여준 리스트는 일명 '출산용품 리스트'. 이 리스트를 대강 쭉 훑어보자니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즐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업무 관련도 아니건만 대략 삼사십 개를 훌쩍 넘는 빡빡한 엑셀이 과히 업무 관련 자료라 해도 속을 정도였다.
"이게 바로... 출산용품 리스트라고 하는 거지.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이게 다??? 이걸 다 언제 사?"
"아기 낳기 전까지 틈틈이 사두는 거지!"
"아니... 도대체 이.. 가제손수건? 이건 왜 20장이나 필요한 건데???!!!"
"나도 몰랐는데 아기가 토할거나, 먹다가 흘리거나, 이것 저것 닦을 때 필요하다던데?"
"도대체 이걸 어디서 구하는 거야? 언니가 직접 작성한 거야?"
"인터넷에 보면 다 나와있어. 거기에 내가 column(열) 추가해서 친환경 브랜드들까지 정리한 거야."
길고 긴 출산용품 리스트를 입을 쩍 벌린 채 보고 있자니 2년을 거슬러 가 결혼 준비를 할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결혼 준비 리스트, 혼수 리스트 등등 온갖 '리스트'라는 것들이 존재했었는데, 결혼 준비를 하며 뭐하나 빠뜨릴까 가뜩이나 노심초사했던 당시의 나에게 결혼 준비 리스트 작성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과제였다. 나의 리스트는 '헷갈리니깐 정리나 좀 해볼까?' 하는 소박하고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되었으나 중간 웨딩 업체 없이 모든 것을 직접 고르고 알아보아야 했던 나의 상황과 걱정 제조기인 나의 성향이 합쳐져 10가지가 금세 20가지로 분화했고 이윽고 30가지를 넘었으며 마침내 거의 60가지에 육박해 갔다. 개수가 늘어나자 60가지 항목을 한눈에 볼 수 없어 회사에서 배운 것을 써먹어 기꺼이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로 나누는 등 나의 온갖 열정을 그 안에 담았는데 한편으론 내가 지금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건지, 리스트에 나를 끼워 맞추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 지경이 오기도 했다.
"자! 이거 봐!"
"이게 뭔데?"
"내가 공들여서 만든 우리 결혼 준비 리스트! 지금 우리 여기까지 했고, 앞으로 이거, 이거, 요고, 조고, 저거, 그거 하면 돼"
"..."
처음 만든 거대한 나의 리스트를 무려 A3용지에 뽑아가자 당시의 남자 친구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 이쯤에서 인정한다. 난 당시 리스트 관리의 광이 되었고, 리스트를 안 만들려면 처음부터 안 만들었겠지만 이왕 만들기 시작한 이상 제대로, 모든 정보를 담아, 마스터 엑셀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쓸데없이 자칭 피곤한 나의 성향이 빛을 바랐던 순간이랄까. 아무튼 리스트는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나에게 안심을 주는 '위안'이자, 동시에 빨리빨리 끝내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그런데 이런 리스트가 임신에도 있을 줄이야. 언니가 나에게 장작 40개 정도의 아이템을 보여줄 때 나의 (설렘과 별개로) 길고 고된 결혼 준비 과정이 다시금 떠오르며 이 일을 임신할 때 다시 한번 겪어야 한다니 앞이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내의는 뭐고, 스와들업은 뭐고, 우주복은 또 모야? 속싸개랑 다 다른 건가? 도대체 몇 겹을 입히는 거야!'
'손, 발은 도대체 왜 싸? 여름에도 싸야 하나?'
'아기 욕조도 따로 있어? 세면대에서 씻기는 거 아니었어?'
'수유패드랑 수유쿠션이랑 뭐가 달라?'
'이걸 다 친환경 브랜드인지 따져서 사야 한다고?'
'오 마이 갓'
리스트를 쭉 훑어보며 수많은 의문과 궁금증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아니 물어보지 않았다. 어차피 답을 듣는다 한들 내가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어차피 나중 되면 잊어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난 나이만 서른을 넘긴 무늬만 어른일 뿐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없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 많은 것을 알아야 엄마가 될 자격이 있을 것만 같이 느껴지자 나의 무지가 버겁게 느껴졌다. 그 세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몇 년 간의 연애 끝에 자유와 방종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신혼의 나는 그 시계가 낯설었고 막연히 두려웠다.
'아직 임신 준비를 하진 않았으니 시간이 좀 있네...휴...'
아이를 준비하려고 한다고 하자 주변에서 많은 정보를 주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바로 "엽산 챙겨 먹어!"라는 말. 엽산을 먹어서 그런지 태어난 아이가 건강한 것 같다며, 남편과 같이 먹으라는 조언에 일단 나의 to-do 리스트에 '엽산 구매'를 추가했다. 또 이제 막 임신을 한 언니 중 한 명은 임신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때 꼭 배란테스트기를 해보라고도 귀띔해주었다. '배란테스트? 임신테스트기도 아니고 뭐지?'라고 생각하는 찰나 나의 궁금한 눈빛을 읽었는지 세세하게 설명해주었는데 요약을 하자면 즉 '두줄이 뜨면 곧 배란이 되니 그때가 중요한 시기'라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보건소 산전 검사, 예방 접종, 영양제 등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필요했던 것들을 기억을 더듬어가며 얘기해주었다.
'아이고... 임신을 하기 위해서도 준비해야 할 것도 많구나... 머리 터지겠구만...'
갑작스럽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따끈따끈한 정보와 농밀한 조언을 듣고 나니,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 허우적 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 유경험자의 고민과 그들의 발자취를 듣는 것은 임신 무경험자인 나에게 임신이 나 혼자 만의 일이 아니라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엄마가 되기로 결심할 때, 나는 분명 '이런 출산 준비 리스트, 예비 검사 같은 것들 때문에 육아가 예전보다 훨씬 더 피곤해지는 거잖아!'라고 툴툴거릴 것이다. 하지만 결국엔? 나도 그들 못지않게 일일이 비교하고, 이것 저것 따져가는 열혈 엄마가 되고 말겠지.
엄마가 된다는 것.
그 엄청난 일을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반문해본다. 해보기 전엔 역시나 모르는 일이겠지만 잘할 수 있어서, 잘하니깐 엄마가 되는 건 결코 아닐 것이다. 누구나 엄마가 되고자 하면 초보 엄마로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 오고, 그 순간이 올 때 '엄마니깐, 엄마라서 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아이를 위해, 내 가정을 위해, 우리 부부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결혼 이후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던 나의 to-do 리스트가 다시금 쭉-쭉- 늘어날 생각을 하니 덜컥 겁이 나지만 어쩌겠는가. 초보로써 우당탕탕 시작해보는 수밖에. 그러면 나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른 어딘가에 도달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