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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론도 Apr 26. 2023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내 인생의 마법 한 스푼


내 고향은 강원도 홍천에서도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어느 깊은 시골마을이었다. 요즘엔 말해줘도 모를 테지만, 어릴 적 삐라를 주우면 경찰서에 가져가 학용품으로 바꿔 쓰기도 했었다. 무장공비가 남한으로 내려왔던 언제쯤에는 집 뒤의 산에서 당장 무장공비가 내려와 덮쳐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던 곳이었다.


주변에 지천인 게 산이고 들이고 밭이고 냇물이라 봄이 되면 엄마와 밭에서 냉이를 캐고, 산으로 따라가 봄나물을 뜯기도 했고, 더운 여름날에는 무릎 조금 넘는 작은 냇가에서 물놀이도 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작은 분교였는데 어느 날은 선생님과 바닥에 포장을 깔고 오디나무를 흔들어 함께 입술이 까매지도록 오디를 먹은 추억도 있다. 서로 그 입을 보며 한바탕 웃기도 했던 게 생각난다. 지금은 어느 중년의 옛날이야기에서나 들을 법한 동화 같은 추억들이다. 한 학년에 10명도 안 되는 작은 분교에서는 여러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했는데 학년을 나눠 친구의 개념을 갖기보다는 그때는 모두가 친구였던 것 같다.


오빠들과 함께 흙길을 따라 걷던 학교로 가는 등굣길은 그저 즐거웠고 나는 오빠들만 있으면 친구의 빈자리 따위는 느낄 겨를도 없이 놀 거리가 넘쳐났다. 겨울이면 손재주 좋은 우리 오빠들은 대나무를 깎아 창호지를 붙여 연을 만들어 날렸고, 나무를 자르고 못질을 해서 꼬챙이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얼음썰매를 타기도 했다. 또 하루는 나무를 휘어 단단한 끈을 묶고 얇고 튼튼한 나뭇가지들을 뾰족하게 깎아 활쏘기 놀이도 했으며 양동이에 눈을 가득 담아 쌓고 쌓아 우리들만의 이글루를 만들어 해가 질 때까지 아지트 삼기도 했었다. 흙에서 뒹굴고, 물에서 물장구치고 눈 오면 눈을 장난감 삼아 우리 3남매는 자연이 놀이터였고 그때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지금은 엄마들이 돈을 주고 시키는 그 경험들을 나는 운 좋게도 어릴 적 마음껏 누리며 살았던 것 같다. 그 시간들은 값비싼 장난감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다. 그땐 그저 마냥 행복했었다. 엄마 아빠가 집에 자주 없었어도 오빠들이 있어 그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고 라면을 끓여 먹어도 꿀맛 같던 시간들이었다.


학교 문제로 이사를 하면서 오빠들과의 시간이 많이 줄었다. 오빠들은 중학교에 갔고 나는 전학을 가 초등학교도 혼자 다녀야 했고 내겐 가장 큰 친구들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는 학교 근처 친척 집에서 오빠들은 하숙을 하게 되었고 더더욱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외로움의 시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게 말이다. 여전히 부모님은 바쁘셨고 나는 이제 집에 혼자가 되었다. 그때 심심함을 책으로 달랬다면 지금쯤 나는 좀 더 멋지게 내 길을 찾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빈 여백의 시간 덕분에 내 생각의 크기가 커졌고 스스로 할 줄 아는 재주가 많아졌다는 생각도 들어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은 이젠 흙길이 아닌 아스팔트 길이 되어 비가 와도 신발이 진흙투성이가 되지 않았지만 함께할 친구가 없어 그 길이 그리 좋게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다. 갈 곳 잃은 내 눈과 마음은 걷는 내내 그저 동무가 되어주는 산과 하늘, 긴 아스팔트 길, 길가에 자라난 이름 모를 풀들과 꽃들, 나무들로 향했던 것 같다. 가끔 살랑이는 바람이 반가웠고 가끔 곁을 지나는 차들은 조금 무서웠다. 후~ 하고 불면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나 박주가리 홀씨 같은 유일한 장난감을 발견하면 그 재미에 빠져 또 몇 걸음 걷기도 하며 4km 정도의 그 길을 매일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학교 끝나고 운동장에서 모여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집에 갈 친구들의 모습, 그리고 또 시끌벅적 손님들이 몰려와 술판이 벌어지고 있을 집, 그리운 오빠들.. 터덜터덜 그렇게 걷고 또 걷는다. 놀면서 떠들면서 걸었으면 더 짧게 느껴졌을 그 길이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인 나에게는 지루하기도 무섭기도 외롭기도 했던 길이다. 그렇게 나는 길고 긴 나와의 시간을 가져왔던 것 같다.



그때부터 하고 싶은 마음속 이야기를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에 슬프고 무엇에 기쁘고, 무엇을 바라는지 말로는 서툰 감정 표현이 종이 위에서는 자유로웠다. 일기장이 내 마음을 토닥여주는 듯 알아주는 듯 큰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게 되어 교환일기를 쓰기도 했다. 전학을 가서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그렇게 글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를 지켜준 수호천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내가 위로받을 수 있는 무언가를 늘 보내줬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땐 오빠들이었다가 그다음엔 동무가 되어준 자연이었다가 마음을 쏟아낼 일기장과 펜을 주고, 그리곤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도 보내줬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한 뼘씩 자라온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부모님이 주입하지 않은 그저 오로지 내 스스로 이끌어온 내 감정과 생각들이 지금의 나를 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 대신 글로 표현할 일이 많았던 탓일까 학교에서 국군장병 아저씨들께 위문편지를 쓰면 꼭 내 편지엔 답장이 왔었고, 커서도 교육 후기나 상품 리뷰를 쓰면 당첨이 되어 종종 선물을 받기도 했다. 지치고 무기력했던 내 주부의 삶에서 블로그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글로 이야기하는 게 익숙해서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난 가까운 가족들과 도란도란 소통하는 그런 따뜻한 그림을 꿈꿨지만 그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대신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감사함을 선물 받았다 생각한다. 잘 쓰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걸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핍이 때론 마음 한 구석을 허전하고 외롭게 만들었지만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나의 보석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고 믿는다. 그걸 깨닫고 사용하게 된다면 더 이상 그 시간들은 나를 작아지게 만들기보단 오히려 내 안의 보석을 찾아내기 위한 인고의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런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을 성찰이라 부르는 걸까?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보석을 알아볼 수 있도록, 스스로 깨닫고 배워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나의 과거가 슬프게 기억되지 않고 아름답게 추억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것이 돌아보는 시간이란 생각이 든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 마법은 나를 권위적인 어른으로 만들지 않았으며 내가 바라던 어른의 모습으로 아이의 부모가 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는 듯하다. 인생에 그런 마법 한 스푼이 어쩌면 살아가는 희망이 되어주는 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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