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쿠나 Dec 13. 2021

20세기에 던진 21세기의 고민

영화, 매트릭스를 읽다


의심하는 남자, 토마스 앤더슨

성경 속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 '도마'와 인간을 상징하는 '앤더슨'을 의미하는 이름, 토마스 앤더슨, 네오 ⓒ 영화 매트릭스

2199년. 인류는 기계의 에너지원이 된 채 생명을 연명하고 있다. 기계는 매트릭스라는 허상의 세계를 창조하여 생체 에너지가 된 인간에게 보여줌으로써 마치 현실의 세계인 것과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토마스 앤더슨 역시 매트릭스 세계 속 한 사람이다. 매트릭스 안에서 그는 두 가지 모습으로 살아간다.

하나는 지극히 평범한 샐러리맨인 토마스 앤더스. 다른 하나는 저명한 해커 네오라는 삶.


평범함과 비범함, 공존할 수 없는 경계에서 양가적 모습으로 살아가는 남자는 완벽해 보이는 매트릭스라는 거푸집의 결함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게 끊임없이 의심하고 집요하게 탐구해 들어간다. 하지만 그의 의심과 탐구에 대한 답은 같은 차원에서는 찾을 수 없다. 오직 한 차원 높은, 그리고 먼저 그 질문을 품고 그 길을 갔던 선생만이 답 할 수 있었다.


 뚜렷한 한계를 가진 선각자, 모피어스.

앞니가 상당히 많이 벌어진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모피어스.

이 남자는 토마스앤더슨이 품었던 질문을 먼저 던졌던 사람이다. 그는 매트릭스 속의 현실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고 그 사실을 인류에 전하고 있다.

모피어스는 자신과 토마스앤더슨과 같이 매트릭스에 대한 질문을 품은 자들을 계몽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모피어스는 하나의 문제를 풀었다고 곧 인생의 완성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비범한 선각자이지만, 그 역시 연약한 육신의 하나일 뿐. 고대의 꿈의 신을 뜻하는 그의 이름은 그의 한계를 잘 나타낸다.


모피어스에게 바라봄과 믿음은 실존의 근거였다.

네오는 모피어스에게 있어 The One이어야만 하는 존재이고, 우주였고, 메시야였다.

당위에 갇힌 자는 한 편에 치우친다. 치우침은 두루 볼 수 없게 하고, 두루 볼 수 없음은 필연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잉태한다. 오직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믿고 싶은 세계만 찾는 자는 결국 그 안에 갇힌다.


모피어스 역시 그랬다.

모피어스는 시뮬레이션 세계의 오류는 확인했지만 정작 자신의 신념과 당위의 꿈에서는 아직 깨지 못했다.

바라보고 싶은 것을 바라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사람. 하나의 한계를 극복했지만 다른 한계에서는 그 역시 연약한 인간일 뿐.


많은 이들이 네오를 예수에, 모피어스는 세례 요한에 비유한다. 하지만 성서 속 인물에 비유하자면 모피어스는 오히려 모세에 가깝다. 애굽의 노예로 있던 유대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에는 성공하지만 가나안 땅에는 이르지 못한 지도자 모세. 그의 사명은 ‘출애굽’에 있었다. 가나안의 사명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모피어스 역시 마찬가지다. 모피어스의 역할은 인류에 매트릭스라는 허상을 전하는 것. 매트릭스 세계의 오류를 인식하지만 진정한 인류의 구원을 완성시킬 수 없는 꿈의 운명. 그것이 모피어스의 역할이었고 또한 그가 가진 한계였다.


ⓒ 영화 매트릭스, 1편에서 오라클을 연기한 배우 글로리아의 죽음으로 2편과 3편의 오라클은 매리 엘리스가 연기한다

답을 알려주지 못하는 ‘완벽한’ 안내자 오라클

네오의 질문에 모피어스의 의지와 바람 섞인 안내만으로는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한다.

매트릭스에 대한 궁금증은 이 시스템을 만든 이, 오라클에게 물어야 했다.

오라클은 매트릭스 세계를 구축하고 창조한 프로그램이다. 로봇과의 한판 전쟁 끝에 패배한 인류는 로봇들의 에너지원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역설적으로 인류의 생명 유지는 그래서 로봇들에게 반드시 필요했다. 오라클은 아키텍트라는 프로그램과 함께 인류의 생존을 위해, 정확히 말하면 기계들을 위한 생체에너지원으로 인간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매트릭스를 창조했다. 아키텍트가 디지털 세계의 완벽한 ‘무오류’를 상징한다면, 오라클은 기계가 갖고 있지 못한 인간의 ‘직관성’에 가장 닿아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매트릭스를 창조한 어머니였기에 오라클의 앎은 모피어스의 불완전한 그것과는 달랐다. 오라클은 네오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길잡이였다.


오라클의 방에 들어가면 고대 델피의 신전에 써 있던 경구가 붙어있다.  

‘너 자신을 알라’.

오라클의 모든 안내(답변)는 다름 아닌 이 문장의 범주 안에 있다.

하지만 오라클 역시 모든 질문에 답을 주진 않는다. 아니 오라클 역시 모든 답을 다 할 수가 없다. 매트릭스는 오라클이 창조한 세계이지만 그것을 살아내는 이는 네오, 그리고 개별적 존재들이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오라클을 통해 자유의지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다.


네오의 질문은 매트릭스의 원리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가 궁금한 것은 자신의 존재의 목적이었다. 네오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오라클의 안내가 아닌, 네오의 가슴안에 존재한다. 네오에게 답한 오라클의 답변은 모호하고 어쩌면 불충분하게 느껴지지만 기실 가장 분명하고 완벽하다.


'네오, 너 자신을 알라.'


우리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개별적 존재들의 고민어린 질문도 결국 델피와 오라클의 문지방에 붙어있는 글귀로 귀결된다. 답은 오직 질문을 품은 자 스스로의 내면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인생의 길목에서 민낯의 나 자신을 깨닫게 되는 것이 생의 섭리이고 우주의 신비일 터.  


네오는 과연 디지털 예수인가

네오는 여러면에서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2천년을 살아낸 서구 사회가 생각하는 메시야, 즉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후속작 리로디드와 레볼루션의 네오가 보여주는 모습을 따져보면 네오는 곧 예수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네오는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관념 속 ‘정언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던 선택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연인 트리니티를 선택한다. 어디 이뿐인가. 3편 레볼루션에서 기계 세계의 1인자 데우스엑스마키나를 만나서는 급기야 거래까지 한다. 인류를 위해 몸소 대속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아닌, 타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네오의 선택은 기독교적 세계관 속 메시야라 하기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더욱 보여준다.


네오를 통해 보여주는 희망, 개별적 존재들의 무한한 잠재성

네오의 시작은 본디 의심하는 사람 토마스(도마)에서 출발한다. 평범한 남자 토마스가 던진 끊임 없는 질문은 그를 구도의 길에 서게 한다. 그 과정에서 모피어스, 트리니티, 오라클 등의 길잡이를 만나 지식과 지혜를 더한다.

ⓒ 카라바조, 도마의 의심


하지만 질문하는 미생, 토마스앤더스에서 완성된 네오가 되는 것은 누군가의 지원이나 가르침, 안내만으로는 가닿을 수 없다. 필연적으로 ‘극기복례’의 수행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찰을 거치고 나서야 최종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그제서야 개성이 거세당한 토마스 앤더슨이라는 인간을 탈피한, '구도자 네오'로의 단독적 존재가 가능하다.


횡적 구분에서 종적 구분으로의 세계관 변화

영화는 본질과 물질, 선과 악, 상과 현상 등 오랜 역사 속 서양철학을 점유한 횡적 구분의 세계관을 종적 구분으로 교정한다. 선과 악처럼 위 아래로 나뉜 것이 아닌, 인간과 기계, 나와 너 등 좌우로 구분된 세계관은 비록 대립과 갈등은 있지만 그 결과가 곧 상대에 대한 궤멸과 병립 불가능으로 결론 짓지 않게 만든다.


매트릭스를 부수는 영웅의 모습, 위버맨쉬

인류는 끊임없이 신을 찾았다. 인간이 원하는 신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구복에서 출발한다.

‘시작은 미약하여도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는 희망의 말씀 안에서 어떤 이는 이데아를 꿈꾸며 현재를 희생했고, ‘순종할 때에 다음 생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종교의 교리에 어떤 이는 오늘의 눈물을 감내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소망했다.

"누군가 지금의 현실을, 가난한 현생의 삶을 해결해 줄 초인이 나타나지 않을까."


인류의 역사를 통해 메시야에 대한 바람은 지속됐다. 그러나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근은 계속 됐고, 빈자와 부자의 차이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인간의 마음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고 난 20세기, 기존의 질서와 관점에 이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삶이란 누군가의 결단과 은혜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닌, 인간 본연의 의지와 결정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들이 현대의 맨 앞자리에 서 있다.

망치를 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도덕을 주인과 노예의 것으로 구분한다. 그는 원한을 잉태하는 노예의 도덕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그 해악과 문제점을 근거로 서구의 플라톤 주의와 기독교적 세계관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물론 니체의 주장은 뚜렷한 한계도 있다.

그의 이야기가 인류 역사의 모든 종교의 교리를 다 부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진리도 아니거니와 과거 나치와 같이 그를 과잉 오해석하여 사용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하지만 매트릭스 속 네오의 모습을 통해 다른 어떤 모습의 구원자보다 니체의 위버맨쉬가 떠오른다. 니체는 서양 철학사의 한계를 지적하며 동시에 위버맨쉬라는 새로운 개념의 초인을 세상에 소개한다.


위버맨쉬는 인간이 기존에 갖고 있던 초인에 대한 관점과 다르다. 초월적인 존재의 강권적 구원으로 상징되는 영웅의 존재를 니체는 초인이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인간이 끝없이 수행하며 자신을 다져나가는 가운데, 세상과 타인의 기준에 채점되는 관성의 노예가 아닌 자신만의 철학으로 살아가는 주체적 인간상을 초인이라 이른다.

그의 말을 과격하게 정리해보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 삶에 대한 선택을 완전히 타인에게 맡기지 말라. 설령 그것이 신일지라도.


위버맨쉬, 당신의 주체적 삶을 응원한다

촌스러운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매트릭스 시리즈를 만든 워쇼스키 자매는 시리즈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 형제였다. 2010년대 들어서 형제는 차례로 성전환 수술을 한다.


어쩌면 그들은 네오를 통해서 그려냈던 주체적 선택을, 삶에서 실행에 옮겼던 것은 아닐까. 겸손의 옷을 입은 '노예'가 아닌, 타인의 관점과 주장에 길들여진 '소인'이 아닌,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 삶을 살아내는 주인이 된 모습으로 말이다.


열 번 넘게 같은 영화를 다시보면서 문득, 네오 같은 인류의 생존을 건 싸움이나, 워쇼스키 자매처럼 성전환수술에 필적할 수준의 주체적 독립이 아닐지라도, 아주 미미한 걸음일지언정 ‘나’라는 단독자를 잃지 않기 위해 오늘도 전장에 서 있는 나를 포함한 모든 개별적 존재들을 응원해 본다. 당신의 분투를, 당신의 외로움을 위로하며, 당신앞에 펼쳐질 오늘을 응원하며.




* 한 줄 읽기

영화 한편에서 만나는 철학 대백과.

하지만 무엇보다, 누구보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 자신과 마주하라.





작가 '원우씨'와 함께 호우시절이라는 채널로 그 시절 반짝거렸던 때를 추억하며

영화를 리뷰하고 있는 조쿠나입니다.

이번 작품은 워쇼스키's 연출, 키아누리브스 주연의 1999년작 '매트릭스'입니다.

영화에 대한 더욱 다양한 이야기는 네이버 오디오클립 ‘호우시절’과

유튜브 ‘영화발골채널 호우시절’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두 수다쟁이의 이야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디오 클립 호우시절

유튜브 영화 발골 채널 호우시절

호우시절 인스타그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