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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쿠나 Jan 31. 2022

겨울의 한창에서 돌이켜보는 인생의 화양연화

영화를 읽어내다

[청춘, 아름답고, 한스러웠던 한 때의 동화]

데이미언 셔젤 감독의 라라랜드를 처음 봤던 개봉 당시에는 두 청춘 남녀의 꿈과 사랑 이야기를 한 편의 근사한 ‘환상동화’처럼 풀어낸 영화로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제법 흘러 다시 볼 때는, ‘환상’으로 포장된 겉면을 살짝 들춰내 속살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안에는 ‘현실’의 청춘들이 느끼는 지독하고 자욱한 고독이 있다. 뮤지컬 영화가 갖고 있는 무기인 다채로운 음악과 알알이 느껴지는 노랫말, 그리고 화려한 색의 대비를 걷어내고 무심하게 작품의 서사를 따라가면, 라라랜드라는 ‘동화’는 관객들 각자가 끝내 택하지 못하고 한 켠으로 미뤄뒀던 청춘의 한 때를 깊은숨과 함께 마주하게 만든다.

원색의 열정을 어찌 할 줄 모르는 청춘의 한 모습, 셉

[거절감에서 오는 고독, 청춘의 한 조각]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세바스찬에게 있어 재즈는 애정하는 대상을 넘어, 삶을 살아내게 하는 일종의 신념과도 같은 것이다. 재즈는 셉을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의 길이다. 하지만 청춘은 자신의 정념과 현실을 적당히 잇는 것에 능숙지 못하다. 오히려 때때로 자신만의 고유함에 취해버리는 것, 그것이 청춘의 속성이다.


고유함에 대한 열망은 다른 이와의 차별에 대한 강박과 집착을 낳기도 한다. ‘나’라는 존재를 자꾸만 세상과 분리해 차별화시키려는 욕망과 세상과 얼크러질 수 없다는 좌절의 감정, 상충하는 두 가지의 모순적 정서는 의외로 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청춘이 쉬이 빠지는 관념의 도식에 세바스찬도 역시 사로잡혀 있다. 재즈에 대한 대중의 밋밋한 호응과 주변의 이야기를 비춰보며 셉은 점점 더 고유한 고독에 대한 집착에 빠진다. 셉이 느끼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거절감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고, 이 감정은 셉의 마음의 반기를 더욱 공고히 하여 내면의 고유함과 독립심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내면의 고유함과 독립심이 단단해졌다 한들 인간인 이상 반복되는 거절감 앞에서는 지치게 된다. 거절감에서 비롯한 단절감은 셉을 점점 더 방어적으로 변하게 한다. 조금 오래 머물렀다는 이유로 앞차의 운전사에게 화를 내는 건 그나마 납득할 만하다. 자신의 현실을 고민해주는 누이에게, 일자리를 주고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한 클럽 사장에게, 급기야 자신을 알아봐 주고 건너오는 관객에게까지. 하물며 함께 꿈을 꾸었던 사람과 동료에게마저 그는 뾰족할 뿐, 도무지 접점을 찾을 여유가 없다. 급조한 해결책은 늘 탈이 난다. 나름의 고민으로 세상과 타협하는 선택이었던 키이스와의 연합은 오히려 셉, 본인을 점점 깊은 고뇌의 숲으로 인도한다.


청춘이 대상을 향해 품은 무차별적인 사랑은, 물이 찰랑거릴 만큼 가득 찬 양동이와도 같다. 차마 넘칠까 무서워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조급함을 제어하지 못해 모든 것을 쏟아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실수를 저지르게도 한다. 엄두나지않아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나 질끈 눈을 감고 무작정 달리거나, 보이는 것은 전혀 다른 양상이지만 발원하는 이유는 같다. 적당한 온전함이란 애초에 청춘과 어울리지 않는 법. 쏟아져 버릴 것만 같은 에너지를 주체할 원숙함은 청춘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그 시절을 만추가 아닌 푸른 봄, 청춘이라 하겠지만.


내가 지나온 시절을 돌이켜봐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미숙함의 연속이었다. ‘나’라는 개별적 존재를 세상은 품으려 하지 않는 것만 같았고, 결국 세상과 ‘나’는 유리될 수밖에 없다는 관념의 욕조 안에서 숱하게 맴돌았다. 어쩌면 관객들도 셉이 느끼고 있는 고독의 감정, ‘처음’이라는 절벽에 서 있는 그의 모습에 자신의 청춘의 한 시절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을까. 모든 ‘나’는 고유하고 특별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우리’ 모두는 비슷한 시기의 한 때를 보냈음을 삶으로 알게 됐으니......


[불확실성이 만드는 고독, 청춘의 또 다른 한 조각]

셉이 보여주는 고민이 비범함과 평범함에서 항로를 정해야 하는 고독의 모양이었다면 엠마 스톤이 연기한 미아가 느끼는 고독은 암담함에서 출발한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상태. 태평양 한가운데서, 아니 태평양인지 어딘지조차 알 수 없는 망망대해의 어느 한 곳에서 좌표를 모른 채 서 있는 외로움과 불안함. 사방의 모든 것에 물음표가 떠 있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 미아가 겪고 있는 고독이다.

미아는 확실한 자신의 꿈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고독은 셉이 느끼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를 가장 지치게 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열정은 있지만 자신의 재능이 그 열정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고민하게 되는 현실을 미아는 살아내고 있다. 슬프게도,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신기하게도 이 역시 청춘이 느끼는 고독의 한 모양이다.


학창 시절, 석차나 점수로 모든 것이 규정되는 것에 대한, 그 참혹한 비인간성에 대한 비난과 불만은 늘 풍성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절대 무적의 논리로 학교 교육의 무정함과 잔혹함을 신랄하게 비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정답이 아주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되는 때가 찾아온다.

미아, 좌표부재의 암담함을 느끼는 고독의 모습

셉이 느끼는 고독이 세상과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미아가 느끼는 고독은 불확실성이 주는 암담함의 위력을 보여준다. 수십 번 반복되는 오디션임에도 미아는 떨어지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사람들의 반응을 갖고 어림짐작으로 유추하고 살펴야 했다. 열정과 재능은 애당초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 독립변수지만, 재능에 대한 의심이 들불처럼 마음속에서 번져갈 때, 아무런 관계가 없던 두 변수는 영역을 넓혀 스스로를 의심하는 공격의 도구로 무장한다. 계속되는 좌절을 통해 어쩌면 미아는, 열정은 마땅히 재능이라는 선결조건을 갖추고 나서야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 미아의 마음속 공간은 자신감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무용함과 한심함이 가득 메운다.


자신이 어디쯤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는 데에서 비롯하는 좌표 부재의 고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인내하고 꾸준히 기약 없는 꿈의 탑을 쌓아내다 어느 순간 마음속 공허함에 마주하는 외로움의 감정은 숱한 청춘이 겪고 있는(또는 겪었던) 현실과 닿아있다. 셉과 미아를 통해서 드러난 거절감과 암담함은 영화가 개봉했던 2016년의 현실에서도,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도 변함없이 청춘들이 느끼는 고독의 가장 큰 이유이리라.



[친절하게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하지만 관객의 몫을 남겨두는 예의]

라라랜드는 뮤지컬 영화이다. 감독 데이미언 셔젤은 영악하다 싶을 정도로 특성을 마음껏 활용한다. 시작과 동시에 winter라는 자막을 보여줌으로 감독은 영화를 연극적으로 연출할 것임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계절은 두 사람의 상태와 관계의 현재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기능을 무리 없이 담당한다. 미아와 셉, 두 사람의 서로 간의 냉랭한 첫인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춘의 처절한 현 상태를 보여주는 겨울부터 둘의 사랑이 싹트는 봄을 지나 사랑이 만개하며 동시에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시작되는 여름, 그리고 앙상함과 성숙함을 함께 나타내 주는 가을 등 감독은 계절을 활용해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청춘의 상태를 친절히 안내한다. 그리하여 라라랜드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갑작스러운 전개에 의해 놀라지 않는다. 영화의 흐름이 예상되는 순간 관객은 빤한 전개에 재미가 반감될 수 있지만 감독은 빼어난 연출과 메시지의 차별을 통해 이를 극복한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전개를 감독은 뮤지컬의 여러 장치를 통하여 관객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물들 수 있게 연출한다. 오히려 안정적인 연출을 통해 관객은 감독이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다.


좋은 이야기꾼은 관객의 감상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다. 라라랜드는 영화의 이야기를 왜곡 없이 관객에게 전달하면서도 마지막 엔딩에 대한 해석과 감상의 몫을 온전히 관객에게 돌려준다. 두 시간 남짓한 영화를 보고 나면, 환상과 현실을 이어내는 은밀한 마법의 공간이 마음속 어딘가에 창조된다. 관객은 그 공간 안에서 자신이 청춘이라 인식한 시간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와 달리 어른이 되어 만나는 동화는 속 시원히 하나의 감정과 정서로 정리되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대상의 노출된 한 면 외에 반면의 존재를 경험했기 때문 일 것이다.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되지 않고, 정답이란 게 하나가 아닐 수 있음을 막 깨닫기 시작하던, 어른의 문턱에 서 있던 청춘의 그때가 라라랜드를 보고 나면 속절없이 창조된 마음속 공간에서 재생된다.


그림 ⓒ 103layers

[삶이 알려주는 가르침 _ 꿈이 구원이 아닌, 존재가 구원이 되는 마법]

삶은 인간에게 꿈을 꾸는 자유를 허락하지만, 꿈이 이루어지는 성취를 담보하진 않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것은 자유지만, 사랑의 감정이 반드시 대상이 되는 상대방 동일한 바라봄을 약속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삶은 꿈과 사랑을 통해서 쓰러져 있는 인간을 다독인다. 설령 그것이 더 큰 아픔을 훗날 잉태할지 모르지만, 당장의 지금을 살게 하는 마법이 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꿈으로 상처받은 청춘들에게, 사람들에게 사랑만 한 묘약은 없다. 다다를 수 없는 꿈의 좌표에 절망한 청춘은 사랑을 통해 삶의 또 다른 모습, 환희의 또 다른 얼굴을 경험한다.

미아와 셉이 서로에게 구원이 됐던 것처럼, 앞으로 삶에 허락할 꿈과 사랑의 관계는 얼마나 남아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당장의 결과가 달갑지 않을 지라도, 부디 생의 전부가 하나에 함몰되지 않기를.

꿈도, 사랑도, 그리고 숱한 존재들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삶이 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되기를.


         - End가 아닌 And가 계속되는 시간을 희망하며-



*한 줄 읽기

꿈을 꿀수록 갈증이 나던 시절, 그들은 잠시 서로의 꿈이 되어 주었다.



작가 '원우씨'와 함께 호우시절이라는 채널로 그 시절 반짝거렸던 때를 추억하며

영화를 리뷰하고 있는 조쿠나입니다.

이번 작품은 데이미언 셔젤 감독, 라이언 고슬링, 엠마 스톤 주연의 2016년작 '라라랜드'입니다.

영화에 대한 더욱 다양한 이야기는 네이버 오디오클립 ‘호우시절’과

유튜브 ‘영화발골채널 호우시절’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두 수다쟁이의 이야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디오 클립 호우시절

유튜브 영화 발골 채널 호우시절

호우시절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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