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나의 고향에 있는 와인바 ‘소우주’에서 직원 행세를 해보았다. 개인 일정으로 부재중이신 사장님의 아버님을 대신해 일을 돕게 된 것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당일은 모든 좌석이 예약된 상태로, 격무가 예상되는 날이었다. 손님으로서 어떠한 기대감을 갖고 이 공간을 방문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최선을 다해 실수 없이 맡은 일을 해내자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이러한 다짐에도 불구하고, 처음 겪어보는 와인바에서의 일은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접객은 부장님을 독대하는 것보다 어려웠고, 와인 서빙은 (물론 경험은 없지만 굳이 비유를 해보자면) 산모의 아이를 받아내는 것만큼 긴장되었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졌다. 주방 일을 돕던 중, 접시를 깨뜨리고 피클 통을 엎어버린 것이었다.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에 나는 일순간 얼어버렸다. 글을 쓰는 지금도 당시의 순간을 떠올리면 마음이 복잡하다.
꼼짝없이 굳어버린 나의 마음을 녹여준 건, 그 사단을 슬쩍 본 사장님이 무심하게 흥얼거리는 콧노래였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그 허밍은 내게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위안이 되었다. 마치 그런 실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덕분에 나는 재차 마음을 다잡고 더 이상의 트러블 없이 그날의 업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여유와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루를 되돌아봤다.
뜨거운 불과 날카로운 쇠붙이들로 가득한 주방은 전쟁터 그 자체였다. 그간 내가 이 공간에서 손님 신분으로 만끽했던 평화는, 누군가가 치열하게 분투해낸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직접 경험해 보고 난 후에야 새삼스러운 감사함이 밀려왔다.
어느 정도 손님이 빠진 뒤엔, 다 함께 족발에 와인을 곁들이며 자연스럽게 갈무리를 했다. 족발과 와인은 사장님께서 내어주셨는데, 미숙한 일일 아르바이트생의 일당 치고는 너무도 훌륭한 것들이라 송구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물론 사양 않고 다 먹고 마셔버렸지만 말이다.
한참을 쉼 없이 이야기하다가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시간의 흐름은 막을 방도가 전혀 없는 데다가 그 속도가 심히 빠르게 느껴지는 탓에 나로선 여간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일궈낸 것 하나 없이 달력만 넘겨대는 나의 삶이 그 자체로 무섭게 느껴졌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다들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장님의 관점은 나와 정반대였다. 그는 하루빨리 나이를 먹어 미래의 자신을 맞이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의 자신보다 40대의 자신, 40대의 자신보다 50대의 자신이 더 멋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관념에는 마땅한 근거가 있었다. 다수의 직업과 그보다 더 다수의 취미로 매일을 살아내는 그는, 하루하루가 정진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나아가길 주저하지 않는 그는 당연하게도 더 다채로운 미래를 그려낼 것이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나름의 고충이야 있겠지만, 그가 나날이 인간적인 발전을 이뤄내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매일을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있는 그에게 미래는 두려움이 아닌 반가움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와인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그는, 명장이 빚어낸 한 병의 와인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주변을 달구는 따스한 마음의 아로마와 부드러운 미소 사이로 비치는 매력적인 덧니의 뉘앙스, 그리고 그 끝이 짐작조차 어려운 숙성 잠재력.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어른'의 정의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이야 했지만, 역시나 도움을 주러 간 곳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얻고 온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