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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리지블루 Nov 12. 2022

호텔에서의 두 번째 밤은 항상 그랬다

호텔을 좋아하시나요? 누군가에게는 사치의 수단,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일상,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상 속 잠깐의 휴식. 다양한 의미와 용도로 소비되는 호텔은 우리의 삶 속에서 숙박 시설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이번에 저는 호텔에 관하여, 체크인을 할 때와 욕조에 잠겨 있을 때를 빼고는 다 싫은 기억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작년과 올해 각각의 연도 중 가장 우울하고 무기력했던 날을 떠올리자면 역시 호텔에서의 두 번째 밤이었습니다.

정갈한 프런트와 컨시어지가 주는 압도감에 젖은 채로 체크인을 마친 후, 넉넉한 수에도 불구하고 항상 막히는 승강기를 타고, 왠지 모르게 매캐한 복도를 지나면 제가 배정받은 방이 나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인위적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편안함을 만끽하며 얼렁뚱땅 첫 번째 밤을 보내고 나면,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두 번째 날이 찾아옵니다.


작년에는 인천 송도에 있는 쉐라톤 그랜드 호텔에서 다소 늦은 여름휴가를 보냈습니다. 첫날에는 누군가와의 부적절한 관계 속에서 발버둥을 쳤더랬죠. 결국 홀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했지만요. 당장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인천 송도에서 비 내리는 센트럴 파크를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게 반가웠던 이유는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지금의 내 상태를 기상상황의 탓으로 돌릴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그 자체로 참 귀하지 않나요? 객실 유리의 나름 우수한 방음 성능 덕분인지 빗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것만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어째 아무리 목욕을 하고 잠을 자도 개운치 않은 기분을 달래려, 비를 뚫고 근처의 쇼핑몰에서 저녁 식사로 먹을 스시 한 접시와 마크 에브라 샴페인 한 병을 사 왔습니다. 배경 음악으로는 언제 들어도 좋은 존 메이어의 LA 라이브 앨범을 틀어놨고요. 스시와 샴페인은 아주 맛이 좋았고, 존 메이어의 노래와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럼에도 저의 기분은 한껏 더 아래로만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샴페인 속의 우아한 기포와는 다르게요.​


친구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나 지금 올 한 해 중 가장 우울한 하루를 보내고 있어.'라고 문자를 보내고선 저는 다시 욕조로 들어갔습니다. 물속에 잠겨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음악을 들어도 나아지지 않는 기분이었습니다. 잠도 잘 오지 않아 뜬 눈으로 겨우겨우 억지스럽게 보낸 밤이었습니다.


작년에 그토록 가라앉았으면서 올해도 또 호텔에서 여름휴가를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서 말이죠. 이런 걸 보면 저는 사실 우울감을 즐기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호텔에서 찍은 사진이 정말 딱 체크인 때와 욕조 안에서 찍은 것들 두 개뿐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근사하게 정돈된 객실 인테리어와 창밖으로 보이는 뷰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더랬죠. 제게 레지던스 스타일의 객실 중 거실은 짐을 두는 곳, 침실은 잠을 자는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작년의 우울감을 반성이라도 하듯 이번 투숙 전에 입욕제를 잔뜩 사 갔습니다. 2박 3일 일정에 6개의 입욕제를 준비했습니다. 자기 전과 잠에서 깬 후에는 꼭 욕조에서 시간을 충분히 보냈습니다. 다량의 거품과 함께 올라오는 산뜻한 향은 물론 제게 더 나은 목욕 경험을 선사해 주었지만, 역시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오히려 더 분명히 느껴졌습니다. 겨우 입욕제로 우울감을 달래려는 제가 이번에도 틀린 거겠죠.

분명 중간중간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웃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감상을 떠올려 본다면 역시 또 올해 들어 가장 우울했던 호텔에서의 두 번째 밤이었습니다. 저는 분명 호텔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보면 그저 좋아하고 싶었던 걸까 싶기도 하지만요.


호텔에서 보내는 밤은 집에서 보내는 밤과 달리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 특별한 느낌이 저로 하여금 특별한 뭔가를 더 해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것 같아요. 하지만 특별하지 않은 저는 특별한 공간에서 특별하지 않은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자발적인 우울함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마 내년에도 또 호텔을 갈 것 같습니다. 또 설레는 마음으로 일정을 조율하겠죠. 여전히 무엇이 저를 그렇게 끌어내리는지 모르는 채로 말입니다.

언젠간 저도 호텔이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머무는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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