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샘 Aug 17. 2022

감정기념물 1호 '공감'

멸종위기의 감정 '공감'을 찾아서

여름방학 전 물놀이에서 만난 청개구리입니다.



방학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부터는 개학이니까요.


번 여름 방학은 그간의 교직 생활 중에 가장 두서 없었던 방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애초에 별다른 계획이 없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아무것도 안했던 방학은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해하실까봐 부연하자면 정말 아무것도 안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뭔가 의미를 부여할 만한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 이야기해두는 것이 더 상황에 맞을 듯 합니다.



예전엔 흔했는데 지금은 없는 것들도 있고, 예전엔 없었는데 지금은 흔해진 것들도 있습니다. 그게 제 친구 청개구리처럼 동식물일 수도 있고 사람의 습관이나 행동, 그리고 주변의 사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얼마전 지인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나를 안 반겨주지?

이게 질문인지 푸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질문이어도 사실 답을 알지만 답할 수 없고 푸념이라면 어떤 대응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분이 부각된 것일테고 푸념이라면 어디까지 동조를 해야하는지 또는 어디까지 반대를 해야하는지 그 선을 정하는 것도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가끔 저도 그 지인이 안 반가울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반갑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지인인 저도 그럴 테지요. 그게 당연한 빈도고 당연한 관계의 양상일 것입니다. 그렇담 그 지인은 아마 반겨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반겨주지 않아서 실망한 것이었겠단 생각이 글을 쓰는 방금 스쳐지나갑니다.


처음 글을 쓸 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그냥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보고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했어도 스스로 답을 찾았을 거란 생각이 깨달음처럼 옵니다.


어릴 때부터 어려운 이야기들이 있는데 사실은 지금도 참 어려운 이야깁니다.


누구네 누구는 이러더라?
이번에 누구는 선물로 이거 받았다는 데 좋아보였어.
짜장면은 맛있긴 한데 질리기도 하고 또 짬뽕은 좋긴 한데 막 먹긴 그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좋다는 건가?
선물을 해달라는 이야기인가?
두개 다 시켜서 골라 먹으라고 해야하나?

그래서 저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에 제가 어떻게 했는지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저 이야기같은 기억만 꼬리를 물고 따라옵니다. 뭔가 길게 쓸데 없이 설명하고 설득했던 것 같은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인거야?
정말 잘 모르겠어서. 어릴 때부터 너무 어려웠어.


그냥 그렇다는 거야.

뭘 해달라거나 뭘 하지 말라거나 선물해주라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거'랍니다. 그럼 이럴 때 이렇게 말하면 된다고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선물 받아서 좋았겠다.
둘 다 사줄게!

그래서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말을 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정말 억울하기도 합니다.


좀 보고 배워라.
나도 선물 받고 싶은데 눈치가 없냐.
나 안 먹어.


참 어려운 일들입니다.



공감(共感)

「명사」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출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공감은 분명 나 스스로 상대방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그렇다고 느껴지는 감정인데 저건 마치 이미 정해진 답을 찾는 유재님의 '동거동락' 속 퀴즈 코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정답을 알아도 객관식으로 몇번 정답인지 알아야 하는 알 수 없는 답 찾기의 연속이랄까요.


그래서 지금은 시골에서도 정말 보기 힘든 청개구리 마냥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공감을 하기도 공감을 받기고, 공감을 찾기도 어려운 시절을 살아내고 있는 느낌입니다.


공감이라는 감정은 억지로 쥐어짜는 것도, 그렇다고 쉽게 나눌 수 있는 감정도 아닙니다. 어쩌면 '공감'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공감은 다분히 상대적인 것인데 그걸 못한다고 한쪽이 한쪽에게 강요하는 것 자체가 공감을 못하고 있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해'나 '공감'은 온전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나마 '오해'의 폭과 깊이를 줄여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배려'가 모이고 모여 흐르다 보면 그게 언젠가 '공감'이라는 바다 언저리에 닿는 것은 아닐지 고민이 가득한 시간들입니다. 이 생명이 다하기 전까지 당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청개구리처럼 없어진 것 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어딘가에 있는 것들이 있을 테고 '공감'이라는 것도 분명 양상은 다 다르겠지만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2022년 8월 17일>

작가의 이전글 브랜드 이야기 : 우연히 만난 '귀리카페 오트릿'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