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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샘 Jan 02. 2023

지금, 제주 #2 : 느리게, 더 느리게

카밀리아 힐, 이시돌 목장, 애월 해안도로

하루 지나고 또 생각해보니 그냥 글 하나로 다 써버렸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해봅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데 그대로인 것들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일상입니다.


마지막날 발걸음을 옮긴 곳은 '카밀리아 힐(Camellia Hill)'입니다. 말 그대로 '동백 언덕'입니다. 언덕이라기 보단 정원에 가깝습니다. 12월에 카말리아 힐에 가 본건 처음입니다. 하긴 12월의 제주는 그냥 모두 처음입니다. 이제까지 12월을 제외한 모든 달에 제주에 가봤는데 12월의 제주는 처음이었습니다.

12월의 카밀리아힐.

동백꽃을 정말 사랑합니다. 동백꽃의 꽃말은 바로 이겁니다.


오직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모든 것들이 분산 투자의 시대이지만 '사랑' 만큼은 올인하는 동백꽃이지요.


그러면서도 동백꽃이 언제 피는지는 검색 한번 해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크게 상관 없으니까요. 언제 피든, 또는 안피었어도 그냥 동백은 동백으로 있는 거라서요. 제 마음도 좀 동백을 닮았나 봅니다. 추울수록 더 짙어지고 아름답듯 어려운 시간들이 올 수록 더 올곧게 버텨줄 그런 모습이고 싶습니다. 올곧게 꾸준한 것들이 점점 귀해지는 시대지만 동백꽃같이 살아낼 많은 풍경들을 바라봅니다.


12월에 둘러본 카밀리아 힐은 아직 동백의 짙음보다는 동백잎의 반짝임이 훨씬 더 빛나는 시기였습니다.

1월의 카밀리아 힐. 길 가에 흐드러진 꽃들.

혹시나 싶어 제가 블로그를 검색해 보니 1월 과 2월의 카밀리아힐 사진을 올려둔 게 있어서 함께 소개해봅니다. 어쩌면 같은 장소를 이렇게 찍어두었을까 싶습니다.

2월의 카밀리아 힐.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카밀리아 힐에 가서 동백꽃을 실컷 구경하는 것만도 좋은데 눈 까지 내려주는 날은 그간 선하게 살아온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번엔 제가 덕이 부족했는지 눈이 오지 않았지만 4년전쯤 2월에 카밀리아 힐에 방문했을 때는 이렇게 눈이 펑펑 와서 마음 설레는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밀리아 힐에는 다양한 가랜드(Garland)와 팻말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또는 길가에 자리 잡아서 왠지 모를 위안을 줍니다. 그것만 읽어도 왜 여기 왔는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가랜드들이 항상 그대로인 건 아니고 방문 시기에 따라 계절에 따라 문구도 모양도 바뀌고 있습니다. 입구의 가랜드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같은 가랜드를 본 적이 없는 듯 합니다.

열대 식물원 앞 현무암 구유 속에는 이렇게 꽃들을 둥실 띄워 놓았는데 그냥 있는 게 아니라 바람 따라 살랑사랑 새초롬하게 움직여서 한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또 금방 가까운 시일내에 눈 내리는 카밀리아 힐에 다시 오고 싶단 생각을 포개며 돌아섰습니다. 그렇게 쥐어짜며 얻으려고 하면 쥐어지지 않던 것들이 편해지면 갑자기 오더라구요. 삶의 경험들이 늘 증명해주고 있어서 그렇게 맞추지 않더라도 다시 한번 눈 오는 카미리라힐을 선물 받을 거라 기대해봅니다.


날은 엄청 추웠지만 근처의 이시돌 목장에 가서 눈으로 파노라마를 찍어왔습니다. 말도 소도 한 마리도 없었지만 높은 산 하나 없이 넓게 펼쳐진 공간들이 주는 탁 트인 마음을 언제나 느낄 수 있어서 오름과 함께 좋아하는 장소중의 하나입니다.

이시돌 목장의 상징, 테시폰 건물. 목장의 이름만큼 볼 때마다 굉장히 이국적인 느낌입니다.

잠시 머물러 맛있는 아이크림을 하나 먹고 애월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 구경을 실컷하고 또 카페에서 긴 시간을 머물렀습니다. 아인 슈패너를 찾았는데 없어서 비슷한, 최대한 비슷한 커피를 주문해 마셨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카페 이름을 또 모르겠습니다.

여기 카페에 긴 시간 머무르며 바다와 해안의 현무앞에 깨지는 파도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고 저기 멀리 보이는 해안선을 그대로 타고 도는 둥그런 도로가 너무 예뻐서 한참을 보고 있었습니다. 해안 도로의 곡선을 타고 등장하는 차들도 그 재미를 더해주었습니다.


제주의 길들은 마치 축구 전용 구장의 관중석처럼 바닷가에 바짝 붙어 달리고 있어서 차를 타고 달려도 마치 바닷가를 걷는 것 같은 시야를 줘서 정말 좋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도 바닷가지만 모두 생활의 바다라 늘 긴박하고 분주한데 여긴 마치 바다와 섬의 경계를 표시하며 그리는 회색 색연필 같아서 자꾸 모든 풍경이 그림 그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평안하게 쉬어 가겠다는 생각을 실천하는 게 참 어렵다는 걸 이번 제주 여행을 통해서 느꼈습니다. 몇 곳 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정리해보니 꽤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이제 다시 빈번해질 제주 여행에서는 더 적게 움직이고 느리게, 더 느리게 지내다 오고 싶다는 생각을 포개봅니다. 게으르게도 지내보고 싶고, 세상 복잡한 일에도 눈 감고 귀 닫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노트북이나 맥북을 챙겨가지 않는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매년 그렇지 않은 해가 없지만 더더욱 분주했던 올해, 이제는 작년이 되어버린 2022년의 끝자락에서 이렇게나마 느리게 지내는 시간이 있어서 올해는 조금 덜 버겁게 시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2023년 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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